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9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95화(995/1105)
95. 공작님의 분노 (10)
◆
바닥에 깔린 가시덩굴을 박차며 몸을 비틀어 내게 뻗어 오는 가시덩굴을 피해냈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방금 피한 덩굴뿐 아니라 발판으로 썼던 덩굴까지, 가시를 바짝 세우며 나를 향해 줄기를 뻗었다.
피하는 것이 소용없다면 그다음으로 시도해 볼 만한 건 베어내는 것이다.
검에 신성력을 밀어 넣으며 최적의 경로로 휘둘렀다.
저항감이 검을 쥔 손을 타고 전해졌으나, 신성력을 덧씌운 검은 튕겨 나가는 일 없이 두 줄기의 가시덩굴을 베어냈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잘려나간 가시덩굴은 그 형상을 잃었다.
먼지처럼 흩어진 마기는 바닥으로 내려앉아 다른 가시덩굴에 스며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가시덩굴을 잘라내는 것으로 악마의 힘을 소진시키는 건 불가능할 성싶다.
“이런···!”
난처함이 묻어나는 음색에 고개를 돌리니, 무기와 팔에 감긴 가시덩굴을 떼어내려 애쓰는 이단 심문관의 모습이 보였다.
가시덩굴이 휘감기기 전, 팔에 신성력을 둘렀는지 덩굴 안쪽에서 희미한 황금빛이 새어나왔다.
그 덕에 다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안도할 수는 없었다.
덩굴에 작은 몽우리가 맺히기 시작했고 이단 심문관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나는 검을 휘둘러 신성력을 쏘아 보냈다.
가시덩굴이 잘려나가며 먼지로 화하자 이단 심문관이 재빨리 팔을 털어냈다.
“죄송합니다! 베어내도 큰 의미가 없는 것 같길래, 무기에 신성력을 두르지 않고 그냥 쳐내기만 하려다가···!”
신성력을 아껴보려다가 화를 당할 뻔한 것이 분하고 부끄러웠는지, 이단 심문관이 변명을 늘어놓으며 곡도에 신성력을 가득 담아 휘둘렀다.
슬그머니 그자의 발목을 향해 다가가던 가시덩굴이 잘려나갔다.
‘쳐내는 것도 안 되는 건가?’
영지의 중심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공격해오는 줄기의 숫자가 많아졌다.
전부 베어내며 이동하다간 악마와 마주치기도 전에 지칠 판이다.
하는 수 없이 피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피하고 그럴 수 없는 건 베어냈다.
꽃봉오리가 보이면 그것이 터지기 직전 신성 결계로 감싸, 마기의 씨앗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런 식으로 최대한 신성력과 체력을 온존하며 전진하다 보니,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가시덩굴에 의해, 앞에서 이동하던 이들의 모습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휴마누스와 이단 심문관 위치는 느껴지는 기운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거리상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시 서로 도움을 주는 건 불가능했다.
다시 모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눈앞에 보이는 가시덩굴을 전부 베어 가며,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이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한 명씩 데리고 이동하다 보면, 선두에서 나아가는 휴마누스와도 금방 합류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렇게 모이더라도 머지않아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각자 목적지까지 빠르게 이동하되, 서로의 위치에 신경 쓰며 혼자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그때 휴마누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런 방침이라면 내가 계속 후방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나는 고민을 마치고 곧장 신성력으로 날개 형태를 본떠서 몸을 띄워 올렸다.
촤라라락, 가시덩굴이 솟아올라 하늘을 덮었다.
거대한 새장에 갇힌 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어차피 내 목적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멀리 떨어지지 말라던 지시도 있었기에, 더 높이 날아오르는 대신 휴마누스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직행했다.
뒤에서 따라붙는 가시덩굴이 있긴 했으나 공중을 선회하는 것으로 가볍게 피해냈다.
하지만 휴마누스의 주변에 빼곡히 자라난 가시덩굴은 직접 베어낼 수밖에 없었다.
가시덩굴이라기보다는 가시덤불. 혹은 장벽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는 그것을 잘라내자, 가루 형태로 내려앉는 마기 사이로 휴마누스의 모습이 보였다.
휴마누스는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가시덩굴을 베어내려다가, 검의 경로에 끼어든 무언가를 마주하고는 덜컥 굳어버렸다.
자신의 발치에 돋아난 검은 꽃봉오리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삼키며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꽃봉오리에 결계를 씌우는 한편, 급강하하여 휴마누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을 단숨에 베어냈다.
“세, 세르펜스···? 네가 왜 여기에···?”
“각자 이동하는 거라면 대열을 유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앞질러 왔습니다.”
“어···, 그렇구나?”
멍하다 못해 맹한 그 반응에 겨우 삼켰던 한숨을 결국 입 밖으로 토해냈다.
그제야 제 잘못을 자각한 휴마누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는 게 아니라 방금 내가 벤 것. 다시 말해, 가시덩굴이 뿌리내린 인간의 시체를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숨만 붙어 있을 뿐,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았느냐는 말은 무용했다.
휴마누스라고 그것을 몰라서 성검을 휘두르지 못했을까. 그저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버린 것이겠지.
애초에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그를 대신하여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던가.
“뒤를 조심하십시오.”
나는 휴마누스에게 짧게 경고한 뒤. 이번에는 내 발치에서 돋아난 몽우리가 씨앗을 맺기 전에, 신성력을 덧씌운 신발로 그것을 밟아 짓이겼다.
휴마누스도 정신을 차리고 뒤에서 뻗어 오는 가시덩굴을 베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괜찮으려나?”
“그자들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가시덩굴이 자라난 이후라면 더는 손쓸 수 없다는 건 이단 심문관들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마음 아파할지언정 망설이지는 않으리라.
그런 내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단 심문관들의 기운은 매우 안정된 상태였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휴마누스가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에게서 최대한 떨어지지 않고자 노력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러는 동안 내가 베어 넘긴 인간의 육신은 두 자릿수에 달하였다.
“사, 살···려···. 커헉-!”
열한 번째로 그것을 베었을 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가시덩굴에 휘둘리며 고통스럽다는 듯 몸부림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모든 행동이 악마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그 육신에 영혼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악마가 먹어치웠거나 다음 악마 소환을 위한 제물이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터다.
처음에는 휴마누스를 구하느라 영혼을 느끼고 말고 할 새가 없었다.
다섯 번째까지는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열 번째에 가까워지는 동안 그 무언가가 영혼임을 깨닫게 되었고.
열한 번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확신이 생겼다.
“세르펜스, 네가 나를 대신해서 이런 궂은일에 나서지 않아도 돼. 처음엔 좀 놀라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지만, 이제 진짜로 괜찮아.”
휴마누스가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한 건, 내가 영혼이 사라진 인간의 빈껍데기를 여섯 번째 베었을 때부터다.
세 번째까지는 우연으로 치부하다가 그 이후부터 긴가민가하더니, 그제야 내가 자신을 대신해서 그것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거다.
나는 계속 저 말을 무시하며, 영혼이 없는 육체가 보이는 족족 신성력을 날려 그것을 베어냈다.
“나는 네가 내 업보를 대신 짊어지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결의 넘치는 휴마누스의 얼굴을 보건대, 다음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나보다 먼저 나설 생각인 듯했다.
나 대신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아 다행이라 말하였던 자가 저런 소리를 하다니.
조금도 사리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저 확인할 것이 있어서 나섰을 뿐입니다.”
“확인할 거? 그게 뭔데?”
“이곳의 사람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냥 죽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은 이미 육신을 떠난지 오래입니다.”
“내가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면서 죄책감을 느낄까 봐, 걱정돼서 그런 말을 꾸며내는 거야? 그러지 않아도 된대도. 고통받는 이들에게 안식을 내려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다.
바닥을 박차 몸을 앞으로 날리며 검을 휘둘러 가시덩굴 하나를 잘라내는 동시에, 다시 한 번 목소리에 힘을 담아 주장했다.
“꾸며낸 말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살려달라고 말하거나 몸부림치는 것도 전부 악마가 그 육신을 조종한 것에 불과합니다.”
“나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어, 뭐야. 진짜였어?!”
강하게 말할 때는 도통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더니.
내가 슬픈 목소리를 꾸며내자마자 휴마누스는 바로 믿음을 주었다.
가시덩굴이 영혼 없는 인간의 빈껍데기를 흔들어도, 더는 동요하지 않고 성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람을 쉽게 믿는 건지 아닌지 조금 헷갈렸다.
“영혼이 없다는 건 어떻게 알았대?”
악마와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 즈음, 높은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가시덩굴로 뒤덮인 시계탑 꼭대기에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계탑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와 휴마누스가 도착한 이 장소가 본디 광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죄책감과 무력감 사이에서 괴로워하길 바랐는데, 일이 아쉽게 됐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그 목소리에는 조롱마저 담겨 있었다.
악마와 대화를 나눌 생각 따윈 없었기에, 나는 그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신성력으로 구현해낸 날개를 펼쳤다.
내 의도를 이해한 휴마누스도 나와 마찬가지로 신성력으로 날개를 만들어 날아올랐다.
“진짜 아쉽다, 아쉬워. 성검의 주인이 인질로 잡힌 인간들을 도륙하는 장면을 많은 이들이 보아야 하는데.”
악마가 탄식하며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가시덩굴이 영혼 없이 텅 빈 육신을 매달고 휴마누스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와 휴마누스는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베어냈다.
혈액 대부분이 가시덩굴에 흡수된 터라, 가슴을 양단했음에도 피를 뒤집어쓰는 일은 없었다.
“그나저나 신의 사자는 같이 안 왔네? 그러니까, 본명이 ‘썬’이라고 했던가?”
무시하려 했으나 무시하기 힘든 말이 악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선우가 태양처럼 눈 부신 사람이라는 건 맞지만, 그의 이름은 ‘선하고 어진 벗’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
“그 이름은···!”
“전투를 마치고 돌아가면, 그에게 직접 따져 물어야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악마에게 그 이름을 알려 주었는지.”
휴마누스가 눈치 없는 발언을 내뱉을세라, 나는 그의 팔목을 붙잡아 잠자코 있으라는 뜻을 전하며 심각한 표정을 꾸며냈다.
사실 어쩌다 그런 이름이 저 악마에게 전달되었는지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억을 상실한 선우가 본명을 별명으로 착각하여 대충 흘려들은 탓에, 어설프게 외워서 엉뚱한 이름이 악마들에게 알려진 것이겠지.
‘그러고 보니 선우가 꽥꽥이라 불렀던 그 악마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군.’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 선우는 정신을 차리고 있는 시간보다 멍하니 넋을 놓은 시간이 더 길었다.
만에 하나라도 선우가 다시 그때처럼 정신이 불안정해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가 기억을 되찾은 이후에도 일부러 당시의 일을 언급하길 꺼렸다.
일행들과 얘기를 나눠본 건 아니었으나, 다들 비슷한 생각인지 아무도 선우에게 악마와 나눈 대화 내용을 묻지 않았다.
‘그래도 선우의 정보가 얼마나 유출되었는지 정도는 확인해 봤어야 하는데···.’
돌아갔을 때 선우의 상태가 양호해 보인다면 넌지시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 지으며, 나는 눈앞의 적에 집중했다.
996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