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07)
106화에 계속 –
106화 할로우 블레이드
멜키오르의 팔은 이미 대장장이로서 제 몫을 해낼 수 없는 수준까지 망가져 있었다. 회복 주문은 당연히 먹혀들지 않았고, 기껏 약을 먹어 봐야 병세가 악화되는 것을 늦춰 주는 정도였다.
“어느 타이밍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내가 알려 주겠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대신해 모루를 두들길 너 자신이다.”
멜키오르가 말을 듣고 있던 스테치는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장갑 낀 손을 쥐락펴락했다. 저주받은 아이템을 베이스로 제작한 이 특수 장갑에서는 진한 사기가 발산되고 있었지만, 메멘토 모템의 능력 덕택에 스테치에게는 아무런 부작용도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아티팩트를 모루 위에 올려놓아라.”
스테치는 아티팩트를 감싸고 있던 강보를 풀어헤쳤다.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한 단검 하나가 모루 위에 놓였고, 멜키오르는 잠시 말없이 아티팩트를 감상하고선 중얼거렸다.
“좋은 단검이군. 바로 녹여 버리기엔 조금 아깝다만…….”
그의 손짓을 본 스테치는 집게를 들어 단검을 붙잡고, 망설임 없이 절절 끓는 용광로 안으로 집어넣었다. 약 한 시간 뒤에 다시 꺼내 보니, 아티팩트는 뜨거운 열기로 달궈져 백열하고 있었지만, 그 형태는 멀쩡히 유지되고 있었다.
‘아티팩트라는 건 저렇게나 뜨거운 곳에 처박아 둬도 아무 이상 없는 건가?’
『원래 아티팩트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티팩트밖에 없어. 저 정도로 열이라면…… 흠……. 나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걸.』
“잡아라.”
잡담을 그만둔 스테치가 다시 집게를 들이밀자, 멜키오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집게가 아니라 네 손으로 잡으란 말이다.”
“예? 하지만…….”
스테치는 그의 말에 기겁했다. 저런 걸 붙잡았다간 손이 장갑째 타 버릴 텐데? 그러자 멜키오르가 말했다.
“걱정 마라. 장갑이 널 보호해 줄 거다.”
그의 말에 스테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장갑 낀 손을 느릿느릿하게 아티팩트 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티팩트와 장갑은 서로 반발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스테치는 아티팩트를 직접 만지지 않고도 공중에 띄울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공에 아티팩트를 담아 둔 것 같았다.
“우와!”
너무나도 신기한 광경에 스테치는 어린아이처럼 감탄을 금치 못했고, 멜키오르는 피식 웃으며 다음 지시를 내렸다.
“그 반발력은 장갑의 사기에 아티팩트가 동조하고 있다는 증거야.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가지 않도록 잘 붙잡고, 천천히 주물러라. 장갑이 망치의 역할을 대신하는 거다.”
스테치가 손가락을 꿈틀거리자, 아티팩트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우그러졌다. 극한의 열과 더불어 사기의 힘까지 더해지자, 단검은 곧 찰흙처럼 끈적하면서도 찰기 있는 무언가로 변해 갔다.
그리고 몇 분 뒤, 아티팩트는 스테치의 양 손아귀 안에서 번쩍이는 에너지 덩어리로 뒤바뀌었다. 수백만 개의 작은 에너지 입자들이 공전하며,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스테치가 낀 장갑을 밀어내고 있었다.
“크윽!”
조금이라도 힘이 풀렸다간 진짜 폭발할 것 같다. 스테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에너지를 억눌렀고, 멜키오르는 그사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크루오늄 덩어리를 모루 위에 올려놓은 뒤 멀찌감치 떨어졌다. 오래전에 사기의 독으로 망가진 팔이 다시금 쓰라려 오는 것만 같았다.
“잘하고 있다!”
스테치를 쳐다보는 멜키오르의 눈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스테치는 아티팩트와 크루오늄을 합친 만큼의 막대한 사기를 홀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견뎌 내지 못하고 실패했었던 과거의 멜키오르와는 달리, 사기의 독에 면역인 스테치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티고 있었다.
“거기서 실수하면 너도나도 죽는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만약 스테치가 저 상태에서 에너지 제어에 실패했다간, 과거의 멜키오르가 그랬듯 대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멜키오르의 외침을 들은 스테치는 이를 악물며 힘겹게 대꾸했다.
“거참 도움 되는 소리네요!”
스테치는 붙잡아 둔 빛 덩어리를 크루오늄 위에 얹어 놓고선 강제로 밀어 넣었다. 분명 듣기로는 사기와의 친화력이 가장 높은 금속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든단 말인가.
자신이 실패하는 건 아닌가 하고 살짝 겁을 집어먹은 스테치의 우려와는 달리, 크루오늄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기존의 칙칙한 검은색에서 밝은 빛을 뿜어내는 금속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으윽!”
“돼…… 됐다!”
멜키오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다가왔다.
열기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에너지에 의해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크루오늄 덩어리. 실패했던 과정을 뛰어넘고,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결과물을 실제로 보게 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스테치는 밀려오는 피로감에 헐떡이며 멜키오르에게 물었다.
“됐나요?”
“그래. 이거면 정말 좋은 무기를 만들 수 있겠어.”
스테치는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까지는 검의 재료를 만들기 위한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테치가 망치를 집어 들려고 하자, 멜키오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넌 이제 쉬어도 된다. 여기서부턴 도리안과 내가 맡도록 하지.”
“엥?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 팔은…….”
갑자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멜키오르의 모습에 스테치는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자 그는 스테치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
“왜? 팔 썩어 가는 노인네가 이제 와서 망치질한다니까 불안하냐? 내가 일을 관둔 지 좀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생판 초짜인 너보다는 철을 더 잘 두드릴 자신이 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스테치는 묘한 고집을 부리는 멜키오르를 노려보며 물었다. 백번 양보해서 실력이 녹슬지 않았을 거란 그의 주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몸이 그의 의지를 순순히 따라 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자 멜키오르는 스테치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바보냐, 너? 진심으로 내 지시만 듣고 망치질해서 제대로 된 검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균등한 힘으로 수십, 수백 번 이상 같은 지점을 두들기는 감각은 말로 들어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
“그리고, 처음부터 내가 직접 손을 쓸 거라고 말했으면 네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겠냐?”
그렇게 말하니 바보가 된 기분이다. 스테치가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사이, 코웃음을 친 멜키오르는 대장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리안을 불러왔다.
“무슨 일이요? 왜…….”
“작업복 입어. 일할 시간이니까.”
도리안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는지 스테치와 눈이 마주치자 ‘이게 대체 웬일이냐.’고 묻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자신의 대장간 안을 둘러보던 도리안은 모루 위에 놓인 크루오늄을 발견하고선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저건……!”
설마 진짜로 성공시킬 줄이야. 그러자 멜키오르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 안정화 단계에 진입했으니까, 아무런 걱정 말고 마음껏 두들겨도 좋아.”
이제는 검으로 만들어 내는 일만 남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은 도리안은 황급히 작업복을 걸쳤고, 멜키오르는 멀뚱멀뚱 서 있던 스테치를 툭 밀어내며 말했다.
“자네는 바깥에서 기다리게. 이제부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 * *
깡! 깡!
그 이후로, 도리안과 멜키오르는 바쁘게 망치를 놀려 댔다.
한번 일에 몰두하면 끝을 볼 때까지 집중하는 드워프답게, 작업은 꼬박 하루 내내 쉬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대장장이로서의 테크닉과 고유의 단조 방식 덕분에 작업 효율은 인간보다 훨씬 우수했다.
두드려 펴고, 기름에 담그고, 다시 가열하고, 갈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금속 덩어리에 불과했던 크루오늄은 어느덧 그럴싸한 검의 형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던 도리안에게, 한참 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멜키오르가 말했다.
“마무리는 내가 하지. 슬슬 브라이언을 불러와 주게.”
도리안은 문득 멜키오르의 팔을 쳐다보았다. 붕대가 감겨 있어 겉보기로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그 밑에 있을 팔이 어떤 상태일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괜찮소?”
“아직 안 죽고 살아 있는 거 보면 모르나?”
농담인지 뭔지 모를 멜키오르의 말에, 도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바깥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
아무도 없는 텅 빈 대장간.
할 일을 마치고 서서히 식어 가는 용광로의 열기를 즐기며, 멜키오르는 조용히 남은 작업을 진행했다. 크로스 가드와 그립, 폼멜을 차례대로 결합한 그는, 스테치가 대장간 안으로 들어오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완성된 검을 보여 주었다.
“보아라.”
멜키오르가 말했다.
“이것이 너의 검, 할로우 블레이드다.”
스테치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검을 잡아 든 순간, 정전기라도 튄 듯이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이건?』
아티팩트인 메멘토 모템도 그 감각을 느꼈는지 자못 불쾌한 목소리로 반응했다. 그러나 스테치는 눈앞의 검에 정신이 팔렸는지 따끔했던 것을 곧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천천히 검을 살피며 그립감과 무게 중심을 가늠해 보는 스테치. 일반적인 도검에 비해 폭은 넓고, 한손검과 양손검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길이를 가지고 있었다. 페네트레이터처럼 눈에 확 띄는 비주얼만 아닐 뿐, 이쪽도 겉보기로는 훌륭한 명검이었다.
“벌써 이름까지 정하시고……. 근데 왜 하필 할로우(Hollow, 텅 빈)죠?”
“그야 실제로 알맹이가 비었으니까.”
멜키오르가 말했다.
“말했잖아. 그 검은 주인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정작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는커녕 주인이 바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지. 그거야말로 텅 빈 게 아니면 뭐겠냐?”
스테치가 검신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굴곡진 풀러를 따라 잔잔한 황금색 빛이 흘러나왔다. 사기 같은 불길한 기운을 담아 만들었다곤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소중히 다뤄라.”
검을 갈무리한 스테치는 멜키오르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이런 물건을 공짜로 줘도?”
스테치가 물었다. 검의 핵심이 되는 재료를 가져온 것은 분명 그였지만, 멜키오르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기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터. 그가 대가를 바란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값을 치를 용의가 있었다.
그러자 멜키오르가 때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떽……. 내가 돈 벌어먹으려고 그 고생한 줄 아냐? 필요 없어. 어차피 뒈질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돈이고 뭐고 무슨 소용이냐. 그 검을 만들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정 뭔가 주고 싶으면 날 도와준 저 젊은 드워프 친구한테나 주거나.”
그는 손을 마구 흔들어 대며 스테치를 대장간 바깥으로 몰아냈다.
“자, 이제 나가 봐. 내 할 일은 여기서 끝이니까.”
“거참 성질도 급하시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뵐게요.”
거의 떠밀려지듯 스테치가 대장간을 나서면서 다시 침묵이 찾아왔고, 가만히 서 있던 멜키오르는 천천히 대장간 한구석에 덩그러니 있던 의자에 앉았다. 푹신함이라곤 하나도 없는 딱딱한 목제 의자였지만, 지금의 그에게 그런 불편함쯤은 아무런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멜키오르는 눈을 감았다. 오래간만에 힘을 잔뜩 썼더니 묵혀 있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지금 자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
잠시 후, 멜키오르의 조용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대장간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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