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10)
109화에 계속 –
109화 비밀
검과 낫이 격돌하자, 거대한 충격파가 대공동을 한 차례 휩쓸었다. 밀려오는 풍압에 엘레나가 잠깐 눈을 감은 사이, 무기를 맞대고 있던 리퍼와 스테치가 으르렁거리며 상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카가각.
스테치의 눈과 리퍼의 텅 빈 눈알 구멍이 서로를 마주 보는 동안, 두 무기의 금속과 금속이 닿은 접점에서 불꽃이 튀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리퍼의 모습에 스테치는 이를 갈았다.
‘칫, 혹시나 했는데!’
할로우 블레이드는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처음부터 풀파워로 힘을 내고 있건만, 리퍼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상대하는 리퍼는 내색하지만 않았을 뿐, 내심 놀라워하고 있었다. 몬스터나 다름없는 그와 대등하게 힘겨루기를 하는 인간이라니, 과연 범상찮았다.
“나쁘진 않다만.”
리퍼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스테치는 뒤로 살짝 밀려났다. 뼈만 남은 몸뚱이에서 나온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완력이었다.
“고작 그 정도 힘으로 신의 대적자를 자처할 생각인가?”
“크윽!”
검을 크게 휘두른 스테치는 리퍼의 낫을 떨쳐 냈다. 할로우 블레이드에 바라크의 에너지를 불어넣자, 전류가 뱀처럼 날을 휘감고 올라가며 스파크를 튀겨 댔다.
“으아아아!”
이어지는 참격. 그러나 리퍼는 손에 쥔 낫을 회전시켜 스테치의 검을 튕겨 냄과 동시에 역공을 가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막느라 벽으로 몰리던 스테치는, 리퍼의 낫을 검으로 받아 낸 다음 외쳤다.
“엘레나!”
한참 스테치와 싸우느라 정신이 팔린 리퍼의 머리통으로 엘레나의 화살이 날아왔다.
탁!
썩은 살점이 군데군데 붙은 뼈 손으로 화살을 붙잡아 낸 리퍼.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설마 대적자 이외의 제삼자에게 간단히 공격을 허용했다는 것이, 그에겐 제법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리퍼가 한눈을 판 덕분에 스테치는 옆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엘프치고는 제법이군.”
인간으로 위장 중이던 엘레나의 정체를 단숨에 꿰뚫어 본 리퍼. 그는 화살을 바닥에 휙 던지고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네가 끼어들어도 될 싸움이 아니다. 넌-.”
탓!
삼각차기로 공중에 높이 뛰어오른 스테치가 리퍼의 머리통에 검을 휘두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꺾었다. 덕분에 허공만 가른 스테치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말이 많구먼, 너도!”
스테치는 리퍼를 노려보았다.
‘강하다.’
생각 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일반 몬스터와는 다르게, 리퍼에게는 그것을 커버해 줄 지성이 존재했다. 고작 열 번도 채 되지 않는 횟수만큼 공격을 주고받았을 뿐이지만, 상대의 무력이 만만찮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아크》!”
스테치는 냅다 전기를 쏘아 보냈지만, 리퍼는 보란 듯이 낫을 휘둘러 전격을 쳐 냈다.
“대적자의 징표를 가지고서도 고작 그 정도의 힘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건가? 날 상대로 봐주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제는 비아냥을 넘어 실망감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잔뜩 열 받은 스테치가 외쳤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난 네놈이 하는 말이 뭔지 못 알아듣겠다고!”
리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낫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어떻게…….”
그러더니 그는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대공동 전체에 울릴 정도의 광소를 터뜨렸다. 예상치도 못한 반응에 스테치와 엘레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지만, 웃음은 그러고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시원스럽게 웃어 재끼던 리퍼는 곧 말했다.
“그래…….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던 참이다. 내가 지금껏 잘못 생각한 거였어!”
팟!
사라진 리퍼는 스테치의 앞에서 등장하더니 매서운 기세로 낫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을 받아 내기 급급했던 스테치는 빠른 속도로 다시 코너에 몰려 버렸다. 할로우 블레이드의 빛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움직임이었다.
“으윽!”
엘레나가 화살을 쏴 대며 방해하자, 리퍼는 낫을 쥔 손을 번쩍 크게 휘둘렀다. 검붉은빛의 충격파가 뿜어져 나가자 엘레나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캉!
결국, 손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검이 땅에 떨어졌다. 리퍼는 무장해제 상태가 된 스테치의 왼손을 붙잡아 공중으로 들어 올리더니, 스테치의 반지를 남는 손으로 집었다.
『?!』
“저 엘프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내가 관심 있는 건 이쪽이니까. 그나저나…….”
리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어 대던 스테치는 깨달았다. 지금 상대가 응시하며 말을 걸고 있는 상대는 자신이 아닌, 메멘토 모템이라는 사실을.
“숙주를 각성시키지도 못한 주제에 내가 있는 장소까지 제 발로 기어들어 오다니, 어리석었구나!”
『미안하지만, 나도 내 파트너처럼 네가 뭔 소릴 지껄이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메멘토 모템의 외침에 리퍼가 조소를 흘렸다.
“그렇다면 이걸 보면 감이 오겠나?”
슈오오-.
리퍼로부터 어두운 아우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혀 올 정도로 진한 기운에 스테치는 물론이고, 메멘토 모템마저 당황했다. 까딱 잘못하면 영혼까지 얼려 버릴 것 같은 차가운 냉기가 몸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검은 아티팩트의 불쾌하고도 익숙한 감각.
“……!”
메멘토 모템이 감지할 수 없도록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스테치의 반응을 본 리퍼는 만족스러운 듯 킬킬거렸다.
“그래. 어디서 많이 맡아 본 향취 아닌가?”
“너…… 정체가 뭐야……!”
이제는 단언할 수 있었다. 눈앞의 괴물과 가장 깊숙이 연관된 것은 카시아나 노벨리아 같은 상인들이 아닌, 바로 스테치와 메멘토 모템이라는 사실을.
리퍼가 입을 열었다.
“나는 위대하신 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이요, 동시에 그분의 미천한 대리자. 내 목표는…….”
서걱!
“아아아아악-!”
왼팔과 분리된 스테치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 휘둘렀던 낫을 그대로 한 바퀴 돌려 묻어 있던 피를 털어 낸 리퍼는, 손에 쥔 왼팔 손가락으로부터 반지를 뽑아냈다.
“……그분과 대적하게 될 모든 이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
메멘토 모템은 리퍼의 해골 손바닥 위에서 녹색빛을 발하고 있었다. 반지를 성공적으로 회수한 그는 볼일이 없어진 스테치의 팔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선 만족스러워했다.
“정말 오래간만이군.”
대체 이 자식은 누굴까. 스테치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메멘토 모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모자라, 직접 대화까지 나눈다고? 생각해 볼수록 첩첩산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반지를 스테치의 손으로부터 제거한다고 해서 메멘토 모템과 그의 연결이 끊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둘이서 하나의 몸을 공유하는 한, 어느 한쪽만 사라지는 일은 없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최소한 이번에 데려온 인간은 지금까지 만난 대적자 중에서 가장 싸울 만한 상대였으니까. 꽤 잘 키워 냈더군.”
『이번에……?』
상황에 맞지 않는 이상한 표현에 메멘토 모템이 중얼거리자, 리퍼는 말했다.
“못 알아들었어도 상관없다. 너와 네 파트너는 어차피 이대로 내 손에 봉인될 테니까.”
『……뭐?』
리퍼가 말했다.
“봉인은 그분께서 이 세상에 재래하실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어차피 지금 내가 여기서 손을 쓴다 한들, 넌 이 자리를 탈출해서 또다시 새로운 대적자를 데려올 테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난생처음으로, 메멘토 모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리퍼는 말없이 반지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슬프게 들린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나는 너를 동정한다. 주어진 임무를 달성할 그 날까지 몇 번이고 같은 짓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기억조차 온전히 유지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이란 말인가.”
“으으윽.”
굴러다니던 검을 남은 팔로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스테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모습이 측은했는지 리퍼는 스테치에게 말했다.
“걱정 말게. 봉인될 때는 너도 함께일 테니, 둘이서 심심하진 않겠군.”
“《리커버리》!”
스테치는 이를 악물었다. 팔이 잘려 나간 단면으로부터 피거품이 일더니, 말끔한 왼팔이 다시 자라났다. 그와 동시에 반지는 리퍼의 손으로부터 사라져 스테치의 손가락에 재생성되었다.
떨어져 있던 폰두스 완갑까지 다시 착용한 그는 리퍼에게 무기를 겨눴다. 그러나 할로우 블레이드의 빛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시끄러워. 쓰잘데기없는 남 걱정은 그만두는 게 어때?”
스테치는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젠장, 어떻게 하면 좋지?’
마법도, 검격도 통하지 않는다. 단순한 신체 스펙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리퍼의 움직임에는 스테치가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노련미가 녹아들어 있었다.
검을 겨눈 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스테치였지만,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전에 리퍼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목을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낫을 피하느라 바닥을 구른 스테치는, 일어서자마자 《파이어볼》을 날려 반격했다.
“고작 그 정도로…….”
그러나 리퍼는 그것을 가볍게 회피한 뒤, 냅다 스테치의 복부에 영체화 된 자신의 손을 쑤셔 넣었다.
푹!
“허억!”
아스트랄체 특유의 차가운 냉기가 스테치의 몸을 내부에서부터 잠식하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굳어 가는 사지를 애써 휘저어 가며 저항하는 스테치였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듯 리퍼는 손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테…… 슬라》!”
공중에 떠오른 에너지 구체가 리퍼에게 전격을 쏴 날리자, 리퍼는 코웃음을 치며 영체화로 그것을 피했다.
『스테치, 빛이다!』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스테치의 머릿속으로, 그에게만 들리는 메멘토 모템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빛이 통하지 않았던 게 아냐! 녀석을 그걸로 밀어내!』
눈이 감기려는 것을 간신히 견뎌 낸 스테치는, 남은 한 손을 뻗어 할로우 블레이드의 자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꺼져가려던 빛이 다시 밝게 피어오르는 것을 본 리퍼는, 황급히 스테치의 몸에서 손을 뺐다.
“음!”
『좋았어, 예상대로야!』
영체화라는 강력한 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리퍼가 무기를 사용한 까닭은 간단했다. 영체화 상태에서는 역으로 할로우 블레이드의 빛에 취약해지기 때문이었다.
『멜키오르의 말을 떠올려라!』
잠깐의 시간을 번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에게 말했다.
『그 검의 본질은 사용자의 의지를 받드는 것! 네가 염원하면 검도 거기에 호응할 거다!』
“으으윽……!”
우우웅-.
무엇을 원하냐고 묻는 것처럼, 잠잠하던 검은 어느새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스테치가 두 눈을 번쩍 뜬 순간, 밝기를 더해 가던 할로우 블레이드로부터 섬광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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