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16)
115화에 계속 –
115화 케일럼으로
그렇게 해서 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왕국, 케일럼으로 가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험한 길이 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 둔 스테치였지만, 남부에 비해 추운 북부인 데다 12월의 혹한 기후 문제까지 겹치는 바람에 이동 속도는 더뎌졌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큭!”
스테치는 안면으로 날아드는 눈발을 막기 위해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말들은 추위에 익숙해서 그런지 당장은 그럭저럭 버티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 상태론 얼마 못 가고 동사할 게 뻔했다.
“젠장! 이 정도로 세계수 근처에 가까워지면 날씨는 당연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동굴이라도 찾아볼까요?!”
“그래!”
바람 소리에 가려서 바로 옆에 있는 상대의 말소리조차 알아듣기 어려웠다. 스테치는 말에서 내린 다음 엘레나와 함께 근처에 쉬어 갈 만한 장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럴 필요 없을 텐데.』
“넌 또 갑자기 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야?”
스테치가 고삐를 잡아끌며 메멘토 모템에게 쏘아붙이자, 그는 콧방귀를 뀌어댔다. 길을 따라 10m 정도 나아간 스테치가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딛는 순간, 따뜻한 햇빛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
스테치는 구름 한 점 없이 말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늘로 향한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그는 현재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뭐…….”
그 많던 눈들은 어디로 갔지?
온 사방이 꽃과 푸르른 나무, 햇빛을 반사시키며 흘러가는 작은 시냇물. 숲속을 뛰어다니는 작은 산짐승들까지. 단 몇 걸음을 더 걸어갔을 뿐인데, 마치 동화 속 환상에 들어온 것처럼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렸다.
스테치가 검을 뽑아 들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긴장 좀 그만해, 바보야. 보는 내가 다 쪽팔리니까.』
“……나 지금 환각 마법 걸린 거 아니었어?”
『이게 환각이었으면 넌 뭐가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안 했을걸?』
그 말을 들은 스테치는 저 멀리 산 너머에 기다랗게,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를 확인했다. 눈과 먹구름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세계수는 그야말로 하늘조차 뚫어 버릴 정도의 엄청난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세계수가 보살피는 영역 안으로 들어온 거야. 이러니까 엘프들이 저 나무 하나만 보면 좋아 죽는 거고.』
뻘쭘해진 스테치가 검을 다시 집어넣는 사이, 스테치를 따라오던 엘레나도 확 달라진 분위기에 경악했다. 다만 그녀는 스테치처럼 무기부터 꺼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아…….”
눈앞의 광경에 잔뜩 취해 넋을 잃은 엘레나를 끌고, 스테치는 일단 길을 따라 세계수가 우뚝 선 쪽으로 향했다.
케일럼 왕국은 북부 대륙에 있는 그 어느 왕국보다도 긴 시간 동안 번영을 이뤄 왔다. 혹한의 땅인 북부에서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 평화롭고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엔 주변 나라 모두가 이 노른자위 땅을 노리고 덤벼들었지만, 그러한 시도는 하나같이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세계수는 자신을 수호하는 엘프들에게 힘을 부여하여 다가오는 적을 몇 번이고 격퇴했고, 결국 케일럼은 무사할 수 있었다.
‘조금 걱정되는데.’
『뭐가?』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의 자루를 매만졌다.
레이스와 같은 아스트랄체는 평범한 무기나 마법으로는 건드릴 수조차 없는 존재. 하물며 스테치조차 할로우 블레이드가 발하는 빛이 없었더라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케일럼의 엘프들이 강력하다곤 해도, 레이스들에 대한 대응 수단이 없다면 아무런 쓸모없는 것 아닌가?
그러자 메멘토 모템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스트랄체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틀림없이 있어. 그것도 물론 아무나 쓸 수 있는 수단은 아니지만.』
마력을 압축시키고 정련해 나갈수록,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대신 그 힘은 강력해진다. 보다 정련되고 순수해진 마력은 아스트랄 도메인에 숨어 있는 영체들조차 무시할 수 없는 ‘독’이 된다.
『너도 언젠가 한번 봤을 거 아냐? 저 엘프 여자가 썼던 황금빛 마력. 자연에서 황금색은 고순도의 마력만이 발산할 수 있는 빛이야. 제아무리 영체인 레이스도 그 정도의 마력을 무시할 순 없을걸.』
‘그럼 내 검에서 나오는 그것도?’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주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지. 어쨌든, 세계수와 부대끼며 지내는 엘프들쯤 되면 아스트랄체를 상대로 애먹을 일은 없다 이거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넌 네 일이나 신경 쓰면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치는 여전히 떨떠름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자면, 케일럼 왕국은 광신도들이 가장 피해야 할 장소인 건 확실하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 뭘 노리길래 제 발로 세계수까지 걸어간단 말인가?
‘야, 그러고 보니 그런 방법이 있다면 왜 진작 말 안 해 줬어? 엘레나는 그것도 모르고 리퍼한테 쩔쩔맸단 말야.’
그러자 메멘토 모템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쟤는 세계수고 뭐고 접해 본 적이 없는 ‘그냥’ 엘프잖아. 일반인에겐 마력을 체내에서 고순도로 바꾸는 과정 자체가 힘들고 벅찬 일이라고. 하물며 그걸 지속적으로 몸에서 뽑아 쓴다? 그건 그냥 자살 행위야. 알려 줘 봤자 제대로 써먹기도 힘든 방법을 내가 왜 말해 줘야 하지?』
‘너어는 진짜 그 주둥이 좀…….’
스테치가 한숨을 내쉬며 앞을 돌아보았다. 어쨌든 일단 세계수의 영역 안에 들어온 이상, 차가운 눈밭을 헤매고 다닐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그렇게 몇 시간 정도 이동한 두 사람은, 해 질 무렵이 될 때쯤 어느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타국에서 온 이들이 자주 왕래하는 마을이어서 그런가, 거리는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
시장에서 수많은 엘프가 자유롭게 인간들과 교류하는 모습을 본 엘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페이스 페인팅 위장을 풀어 버렸다. 그러나 스테치는 그걸 가지고 차마 뭐라고 지적할 수 없었다.
“죄, 죄송해요.”
잠시 후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스테치는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가끔은 여유를 가지는 것도 나쁠 거 없지.”
그들이 머무르게 된 곳은 복층으로 된 커다란 여행자 숙소. 스테치는 방세를 지불한 뒤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
『왜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기쁘지 않아?』
뭔가 석연찮은 표정인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물었다.
“아니, 그냥…… 너무 많은 일이 동시에 터지니까 헷갈려서.”
분명 일은 카시아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뒤돌아보니 제일 깊게 관여되어 있던 건 스테치 자신과 메멘토 모템이었다. 그들은 왜 상인들을 공격했던 걸까? 세계수에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가는 거지?
모르는 건 많은데 생각할 여유는 좀처럼 없다.
그날 밤 스테치는 식사를 하며 메멘토 모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엘레나에게 들려주었다. 레이스들과 홀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최소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쉬운 방법은 아니지만……. 모르는 것보단 훨씬 낫겠죠.”
엘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기 위해선, 기절했던 스테치를 회복시킬 때 쏟아부었던 것보다 훨씬 더 순도 높은 마력이 필요했다.
“음, 그나저나…… 어때?”
스테치가 슬쩍 물어보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생각했던 대로야. 광신도 놈들은 이 마을을 지나쳤어. 그리고…… 부하들도 남겨 놓고 간 모양이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스테치는 소리를 잔뜩 낮추고, 엘레나에게 자신이 들은 내용을 실시간으로 전달해 주었다.
“목적은 역시 우리인가?”
『정확히는 뒤따라오는 방해꾼을 저지하기 위해서겠지. 이번엔 쪽수가 제법 많아 보여.』
“여기서 싸움을 벌일 수는 없어요.”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이쪽이 녀석들을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저쪽도 우리의 존재를 느낄 수 있어.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마을을 떠나 세계수로 향하면, 놈들이 먼저 우리에게 접촉해 올 거야.”
상대는 타인의 몸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몬스터. 녀석들이 마을 사람들을 이용하여 혼전을 유도한다면, 스테치로서도 싸우기 힘들어질 게 뻔했다.
결국 스테치는 하루 쉬고 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마을을 떠났다.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 전에 마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상했던 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 * *
“이런, 설마 진짜 나타날 줄이야.”
누군가가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길을 걸어가던 스테치의 등 너머에서 나타났다. 《애니멀 인스팅트》나 아므리타의 감각에도 포착되지 않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뒤를 돌아보는 스테치의 얼굴은 짜증으로 가득했다.
“이 자식들이 진짜…… 오우.”
어째 리퍼의 던전에서 봤던 것보다도 그 수가 훨씬 더 많아 보인다. 자기도 모르게 당황한 스테치에게, 후드를 쓴 광신도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와 마주친 걸 보아하니 우연히 여기까지 온 건 아닌 것 같지만……. 뭐 상관없나.”
“그거 알아?”
스테치는 검을 뽑아 들며 중얼거렸다.
“너넨 말이 너무 많아!”
탓!
더 이상 헛소리를 들어 주고픈 생각도 없다. 스테치가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할로우 블레이드로 집중됐다.
밤의 어둠을 쫓아내는 빛이 검에서 흘러나오는 모습에 광신도들은 뒤로 주춤거렸다. 그러나 아직 영체화 되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아, 과연. 흥미로운 검이군.”
“하지만 우리들을 상대하려면 그것보단 더 노력해야 될 거다.”
나불대던 두 광신도를 중심으로, 허공에 안개처럼 녹아들어 간 나머지 광신도들이 빨려들어 갔다. 그러자 스테치의 눈앞에 각각 망치와 대검을 든 검은 사신이 둘 나타났다. 들고 있는 무기만 다를 뿐, 생긴 건 영락없는 리퍼였다.
‘리퍼가 둘?’
스테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힐트를 강하게 움켜쥐었지만, 할로우 블레이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역시 이전만큼의 힘을 발휘하는 건 무리인가? 뭔가 따로 조건이 있는 건가? 그는 하는 수 없이 검을 뽑아 들고 싸울 준비를 했다.
“하아아앗!”
탓!
먼저 돌진한 것은 스테치였다. 달려든 스테치는 검을 휘둘러 모여 있던 두 리퍼를 떨어뜨린 뒤, 남는 오른손을 뻗었다.
《액티브 스킬 : 아이스 니들. 지면으로부터 예리한 얼음 가시를 피어오르게 만듭니다.》
허공에 떠 있는 리퍼의 바로 아래에서, 흙더미를 밀어내고 6개의 얼음 가시가 튀어나왔다.
푸북!
할로우 블레이드의 영향으로 영체화 하기 힘들어진 리퍼의 몸을 찌르고 들어가는 얼음 가시들. 그러나 리퍼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그것들을 깨부수고 속박에서 벗어났다. 몸에 두른 리퍼의 로브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렸지만, 어느 것 하나 치명타는 되지 못했다.
“흡!”
망치와 대검이 동시에 스테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타이밍 좋게 날아온 엘레나의 화살이 망치 머리를 때려 옆으로 밀어냈고, 스테치는 대검의 측면을 오른 주먹으로 후려쳤다.
투쾅!
오른손등에서 불꽃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너클에 맞은 리퍼의 대검은 엉뚱한 방향으로 휘둘러졌다. 스테치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양손에 에너지 구체를 띄웠다.
“《테슬라》!”
끓어오르는 에너지 덩어리가 범위 내의 리퍼들에게 전격을 쏘려는 찰나, 리퍼는 검은 기운을 실은 대검을 휘둘렀다. 검기처럼 튀어 나간 파동에 적중당한 에너지 구체는 단번에 파괴되었고, 스테치에게는 다시금 망치가 날아왔다.
쾅!
피하기 힘들 정도로 깔끔한 궤도였지만, 스테치는 패시브 스킬인 《아크로바트》 덕분에 몸을 비틀어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힘들다.
‘이 새끼들……. 이전 리퍼만큼 잘 싸우진 않지만, 성가셔!’
개개인의 무력은 별로여도 호흡 맞추는 건 아주 환상적이다. 빈틈을 노리고 날아오는 엘레나의 화살이 무색하게, 그들은 느리지만 착실히 방어와 공격을 나눠서 하고 있었다.
“꺼져라, 엘프!”
갑자기 날아온 검은 파동을 피하기 위해 엘레나가 몸을 날린 순간, 막 대검을 휘둘렀던 리퍼는 그대로 원심력을 이용하여 스테치에게 공격을 가했다.
캉!
“우윽!?”
검으로 받아 내긴 했지만 위력이 장난 아니다. 부들부들 떠는 스테치를 다른 리퍼가 망치로 내리찍으려는 그때, 뒤쪽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보디 체크로 리퍼를 밀어냈다.
뻐억!
“?!”
망치 리퍼가 크게 밀려나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이 정체 모를 거대한 남자는 거대한 판자 같은 물체를 휘둘러 대검 리퍼도 몰아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풍압이 일어서, 가까이에 서 있던 스테치는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누구지? 가늘게 눈을 뜨고 상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스테치에게 남자가 말했다.
“오래간만이군.”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깨달았을 때, 스테치는 마치 누군가가 뒤통수를 한 대 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뒤를 돌아보는 애꾸눈의 사내와 눈이 마주친 스테치는, 입을 떡 벌리며 중얼거렸다.
“맥도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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