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20)
119화에 계속 –
119화 허상
며칠 뒤.
스테치는 마르크 맥도웰이란 이름의 의도치 않았던 짐짝을 달고, 세계수로 향하는 발길을 서두르게 되었다. 영 꺼림칙하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당장 쳐 내 버리기엔 아까운 인재였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스테치는 나중에 한 판 겨뤄 주는 것을 조건으로 그를 간단히 일행에 끌어들였다.
“그나저나 너도 참 이상한 인물이로군, 브라이언.”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마르크는 세계수가 바로 코앞까지 가까워지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남부 대륙에서의 복수가 실패한 이후로, 재기를 다짐하고 북부에 온 것 아니었나? 그런데 복수를 위한 힘을 키워도 바쁠 판에, 웬 엉뚱한 놈들과 엮여 다니는군. 조금 실망했다.”
“이 새끼 말하는 꼬라지 봐라?”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하는 마르크에게 스테치가 주먹을 위협적으로 휘저어 보였다.
마르크를 한편으로 만들어 부리게 된 이상, 스테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처음 꺼낸 말이 바로 저거다.
스테치는 영 불만스러운 듯 끙- 하고 신음하며, 시선을 다시 전방으로 돌렸다. 이제는 확연히 가까워진 세계수의 기둥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처음 눈에 들어왔을 때부터 크다고 생각은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보니까 정말 터무니없는 사이즈네.”
세계수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은 지도 벌써 2주를 넘겼다.
아직도 뿌리 부분에 도착하려면 거리가 좀 남아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수는 보는 사람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 정도로 거대했다. 어찌나 큰지, 농담이 아니라 그 둘레만 해도 어지간한 도시 면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였다.
“야. 너 원래 북부 출신이라며? 그럼 세계수에 대해서도 뭔가 알고 있냐?”
그의 질문에 마르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계수가 북부 대륙 생태계의 보전에 큰 축을 차지한다는 점 이외에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지키는 엘프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아주 잘 알고 있지.”
눈썰미 좋은 스테치는 그 순간 엘레나의 귀가 꿈틀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반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마르크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세계수의 뿌리에는 케일럼 왕국의 수도, 이그젤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능력이 출중하고 경험 많은 엘프들만이, 세계수를 수호하는 ‘셸로어’로 임명받게 되지.”
“……그럼 광신도들과 셸로어가 맞붙으면 어느 쪽이 더 우세할까?”
그러자 마르크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셸로어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뭐? 왜?”
스테치가 되물었다.
데스나이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광신도들이 안배해놓은 안전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메멘토 모템을 포함하여 각종 아티팩트들을 둘둘 말고 있는 자신조차, 그런 데스나이트를 상대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했다.
세계수로 향했을 본 세력의 힘은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할 터. 그걸 아는 마르크가 어째서 이토록 간단히 셸로어의 승리를 단언할 수 있는 걸까?
그러자 마르크는 피식 웃었다. 평상시엔 과묵하고 무표정하던 녀석이 저렇게 웃으니 괜스레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들이 셸로어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세계수는 자신을 지켜 주는 셸로어들에게 큰 힘을 부여한다고 하더군.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마법은 인간의 것과는 수준이 다르다. 이그젤타에 주둔 중인 셸로어의 숫자가 수천 명 이상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마르크는 코웃음을 쳤다.
“제아무리 광신도들이라도 상대가 안 되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사이, 세 사람은 세계수의 뿌리를 감싸고 둥글게 쳐진 장벽에 가까워져 갔다.
“저곳이 바로 이그젤타…….”
이그젤타를 둘러싼 웅장한 장벽은 수십 미터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인간의 축성 기술로는 흉내 내는 것조차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저 장벽은 먼 옛날 인간과 드워프, 엘프들이 힘을 합쳐 만든 작품이라고 들었다. 몇백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튼튼하지.”
수백 년 된 구조물치고는 눈에 띄는 흠집 하나 없다. 또한 남부의 쇠락한 엘프들과는 달리, 장벽 여기저기에는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마법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광신도 놈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그젤타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걸진 않으리라.
장벽 너머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는 커다랗게 뚫린 정문 하나뿐이었는데, 입구를 포함한 도시 전체의 경비는 엘프뿐만 아니라, 인간이나 드워프 등 다양한 인종과 성별로 구성되어 있어 보였다.
“이제 와서 새삼 하는 말이지만, 북부 엘프들은 희한할 정도로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없는 것 같아. 사실상 엘프들이 분단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인간이 벌인 인종 청소 전쟁 때문일 텐데.”
엘레나의 귀 끝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본 스테치는 뒤늦게 아차 싶어 입을 틀어막았고, 메멘토 모템의 핀잔이 잇따랐다.
『잘하는 짓이다, 이놈아.』
“불만이 없진 않았다.”
창 대신 스태프를 든 경비병에게 막 신분증을 검사받은 마르크가 말했다.
“하지만 원로급 지도자들이 몇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것을 잠재워 왔지. 덕분에 지금은 그런 감정이 제법 가라앉은 상태다. 세계수를 지킨다는 입장으로서 자신들이 따르는 신의 가르침만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무슨 가르침인데?”
마르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이좋게 지내라’더군.”
* * *
무사히 이그젤타의 영역으로 들어온 스테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자신들보다 앞서서 이그젤타에 도착했을 광신도들의 흔적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겠죠.”
“아니면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고 장벽 바깥을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각자 다른 의견을 낸 엘레나와 마르크는 서로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구도만 놓고 보자면 흡사 사이 나쁜 부녀 지간 같다. 스테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광신도들이 이곳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으니, 어디에 숨어 있을지도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
“하는 수 없지.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경고라도 하러 가자.”
아무리 셸로어의 힘이 막강하더라도, 광신도들을 마냥 얕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생각 외로 쉽게 무너질 가능성도 있었다. 스테치의 말을 들은 마르크가 말했다.
“경고라면…… 원로원의 엘프들을 만나 볼 생각인가?”
형식상으로 케일럼은 왕국의 형태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 지휘 체계는 인간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한 명의 왕이 아닌, 다수의 지도자들이 의견을 나눠 가면서 향후의 정책을 수립하는 것. 작게는 어둠의 숲에서 보았던 장로들의 모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마르크의 반응을 보아하니, 최고책임자들과 미팅을 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닌 듯했다.
“무엇보다도 증거가 없어요.”
엘레나가 잔뜩 침울해진 얼굴로 말했다.
“광신도들이 얼마나 위험한 집단인지, 또 그들이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할 계획인지……. 이 모든 것들을 증명해 줄 증거가 우리 수중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급하게 움직인 나머지 와서 막아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품고 있었을 뿐,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었다. 그러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래, 나도 동감이야.”
“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스테치의 모습에 엘레나가 의아해하자, 스테치가 설명했다.
“정 안 되면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거야. 내가 어둠의 숲에 갔을 때도 언제 그쪽 사람들 허락 구하고 돌아다녔나? 정 방법이 마땅찮으면 우리는 뒤에서 조용히 우리 일만 잘 해내면 되는 거라고.”
“……어둠의 숲……?”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뇌는 마르크.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은 엘레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요.”
이그젤타의 중심부로 향한 스테치는 땅속으로 파고든 세계수의 뿌리 앞에 다다랐다. 특이하게도 주요 시설이나 거주지 대부분은 뿌리와 기둥을 따라 안팎으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는데, 대의원들이 기거하면서 회담을 가지는 대회의소의 위치는 다름 아닌 세계수 기둥 정중앙이었다.
“잠깐.”
뿌리에 설치된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한 엘프 여성이 길을 가로막았다. 이그젤타의 외부 장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일반 경비병들과는 달리, 그녀가 걸친 복장은 우중충한 갑옷이 아닌 밝은 색감의 로브였다.
“셸로어다. 예의를 차려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스테치에게 마르크가 슬며시 경고했다.
“이 계단 이후부터는 외부인 통행금지란다. 뒤로 물러나렴.”
부드럽게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질할 뻔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엘프 여성에게 말했다.
“급하게 원로원으로 전해야 될 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무 의원이라도 좋으니 만나 뵐 순 없을까요?”
그러자 여성이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속이라도 잡아 뒀다면 모르겠지만, 누굴 함부로 들여보내 줄 수는 없어. 혹시 위험하거나 나쁜 소식이니?”
“어쩌면요.”
“그렇다면 여기보다는 이그젤타 경비대에 가서 이야기해 보는 건 어떨까? 의원님들은 지금 한창 회의 중이라 손님을 받을 틈도 없으실 텐데……”
그러자 스테치는 반지 낀 왼손 주먹을 슬며시 내밀며 말했다.
“죄송해요.”
“응?”
핏!
반지로부터 뿜어져 나온 가느다란 황금색 광선이 여성의 이마에 꽂혔다. 상반신을 뒤로 넘기며 쓰러질 뻔한 그녀가 다시 일어섰을 땐, 둥글던 눈매가 날카롭게 뒤바뀐 뒤였다.
“『대회의소는 저쪽이군. 안내할 테니까 따라와.』”
목소리는 물론 확연히 달라진 여성의 분위기에 마르크는 눈썹 끝을 꿈틀거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엘레나는 걱정스레 스테치에게 물었다.
“아깝지 않으세요?”
“어차피 시져는 광신도 놈들에게 통하는 기술이 아냐. 그런 거 일일이 아끼고 있을 틈도 없고.”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던 마르크는 묻고 싶은 게 많은지 눈알만 굴리고 있었고,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의 뒤를 따라 나무로 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응?』”
30분이 넘도록 이어지는 기나긴 계단을 오르는 차에, 메멘토 모템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뒤따르던 스테치 일행도 걸음을 멈췄고, 그사이 메멘토 모템은 갑자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왜 그래?”
“『……과연. 이런 식으로 족적을 훔치고 있었단 말이지?』”
“뭐? 무슨 말이야?”
“『설명은 나중에. 조금만 서두르자.』”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주절대던 메멘토 모템은, 더욱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라갔다. 하는 수 없이 그를 쫓아간 스테치 일행은 잠시 후 굳게 닫힌 대회의소의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귀를 기울여보니 누군가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크게 심호흡을 한 스테치는 문에 갖다 댄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던전의 대공동만큼이나 넓은 대회의소의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위쪽으로는 천장 없이 세계수의 텅 빈 기둥 내부가 보였고, 중앙에는 족히 10명은 넘는 엘프들이 원형 테이블 주위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 한창 회의 중이던 의원들이 시선은 난데없이 끼어든 불청객들에게 꽂힌 지 오래였다.
“무슨 일이지?”
의원 하나가 넓은 회의소 안에서도 선명히 들릴 만큼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중요한 회의 중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보겠나?”
의원들은 스테치 일행을 인도하여 데리고 온 여성, 그러니까 메멘토 모템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자 메멘토 모템은 정중하게 그 자리에 부복하며 말했다.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지금 꼭 봐 주셔야 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스테치는 생각치도 않은 메멘토 모템의 정중한 태도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메멘토 모템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스테치에게 말했다.
“『검을 뽑아.』”
“음? 여기서?”
스테치는 그제야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할로우 블레이드의 검을 뽑아 보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검집에 들어가 있던 할로우 블레이드의 풀러에서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현상을 목도하게 된 의원들의 눈도 덩달아 휘둥그레졌고,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 검, 눈치가 아주 좋아. 나하고 거의 동시에 이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으니 말야.』”
스테치가 검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할로우 블레이드를 감싼 빛이 거대한 장막처럼 펼쳐지며 대회의소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퍼졌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파릇파릇한 세계수의 내피로 만들어진 회의소를 가리고 있던 허상이 빛으로 지워지면서, 불길한 검은 액체로 뒤덮인 채 썩어들어 가던 진짜 대회의소의 모습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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