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22)
121화에 계속 –
121화 기시감
“의장님!”
스테치 일행이 세계수에 오르기 위해 떠나 버린 직후, 다른 곳에서 볼일을 보던 의원들 몇몇이 허둥지둥 원로원의 의장에게로 뛰어왔다. 스테치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해 주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민간인들의 격리는?”
“셸로어들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원이 땀을 훔쳐 내며 말했다.
“……도시 경비대는 사실상 완전히 무력화됐습니다. 일부 구역은 이미 레이스들과의 전투로 아수라장이 된 모양입니다. 하지만 셸로어들이 손쉽게 사태를 진압하여 피해의 확산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그젤타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 마력이 거의 없는 일반 시민이나 경비병들이 죄다 레이스로 변해 버린 탓에,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거기다 하필 영체인 그들에게는 일반 무기나 어설픈 마법은 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대처가 상당히 늦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셸로어들은 스테치 일행이 전해 준 대처법을 응용하여, 느리지만 착실하게 레이스들을 제거해 나가는 중이었다. 불이나 전기가 아닌 순수한 마력만을 사용하라는 그들의 조언은 레이스들을 상대로 제법 준수한 효과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새까맣군.”
하늘을 올려다본 의장이 중얼거렸다. 엘프로서 인간과는 조금 다른 눈을 가진 그의 시야에는, 실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더더욱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건이 터진 직후로, 대기 중에 떠다니기 시작한 검은 입자들.
마력을 볼 수 있는 엘프들의 눈에만 보이는, 마력도 아닌 정체불명의 무언가. 세계수의 상층부에서 쏟아져 내린 것으로 추측되는 이 이상한 물질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화산재처럼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간의 정황을 지켜보고 추측해 보건대, 일반인들이 몬스터로 돌변한 것은 체내로 흡입된 검은 입자의 영향 탓이리라. 세계수를 가리고 있던 환영을 누군가가 제때 지워 주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피해가 더 심각하게 커졌으리라.
‘시간이 얼마 없어…….’
원로원의 사람들이나 셸로어들은 체내에 차고 넘치는 마력을 순환시켜 검은 입자를 밀어낼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하물며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레이스들을 상대하면서 소모될 마력까지 생각해 보면…….
“여력이 되는 한 우리도 세계수 위로 지원 병력을 보내야 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사고 현장은 어디지?”
“서쪽 시가지 구역입니다.”
“좋다, 가자!”
의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나선 의장의 뒤를 따랐다.
* * *
세계수 내부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거대한 영양공급로. 땅 밑에서 빨아올린 양분과 마력은 모두 이곳을 통과하며, 종래에는 세계수의 가지와 잎이 있는 자리까지 퍼져 나간다.
세계수를 오르는 가장 빠른 루트라고 듣긴 했지만, 스테치는 그게 어느 정도로 빠르다는 소리인지 전혀 감이 없었다. 덕분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관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던 그는, 중력과는 정반대로 작용하는 상승기류에 휩쓸려 그대로 날아가고 말았다.
어빌리티 시져를 사용한 반동으로 아직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속수무책으로 허공에서 빙빙 돌았다.
“으아아아!”
이대로 천장이나 장애물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떤 꼴이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다. 상층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가던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뒤따라온 엘레나가 스테치의 옆에 붙어서 물었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그와 달리, 엘레나는 엘프 특유의 유연한 몸을 이용하여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한 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실망이다, 브라이언.”
뒤에서 함께 날아오던 마르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스테치에 비해 무게가 배 이상 나가는 그는, 덕분에 오히려 바람의 영향에서 조금이나마 더 자유로운 듯 보였다.
탁!
스테치가 무심코 뻗은 손을 단단히 낚아챈 엘레나는, 더 이상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끌어안았다.
“……?!”
“이거면 괜찮을 겁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 짓는 엘레나. 그러나 정작 스테치는 그런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30cm도 안 되는 거리까지 바짝 붙은 엘레나의 얼굴을 보곤 심장이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방금까지 혼란스럽던 정신이 전투에 임할 때처럼 선명하고 날카로워졌다.
평소엔 아무 느낌 없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아……. 꽃향기다.’
『야! 헛소리 그만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멍 때리고 있던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급박한 상황에서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엘레나의 어깨를 붙잡고 슬며시 밀어낸 스테치가 고맙다는 말을 웅얼거린 뒤 고개를 돌렸다.
그때의 엘레나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결국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상층부로 올라가던 스테치 일행은 거미줄처럼 얇고 촘촘한 그물망에 걸려서야 멈춰 섰다. 장장 30분이 넘도록 올라온 탓에, 마르크를 제외하고 남은 두 사람의 낯빛은 좋지 않아 보였다.
“헉…… 헉……. 벌써 다 도착한 건가?”
그물망 옆으로 난 통로를 지나가자, 흡사 던전의 대공동처럼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스테치의 말을 들은 엘레나는 비틀거리면서 외벽에 창문처럼 뚫린 자그마한 구멍으로 걸어갔다. 바깥을 위아래로 살펴본 그녀가 말했다.
“아뇨, 아직도 한참 남았습니다.”
“뭐?”
『괜히 이름이 세계수겠냐. 우린 이제 막 출발했을 뿐이라고.』
스테치가 달려가서 엘레나처럼 바깥을 내다보니, 이제는 까마득히 멀어져서 희미해진 이그젤타가 보였다. 그러나 스테치가 고개를 돌려 위쪽을 올려다보자, 여전히 끝을 모르고 뻗어져 나간 나무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할 수 없지. 빨리 다른 통로를 찾아서 움직이자.”
그들이 지나왔던 영양공급관의 그물망 너머는 한 사람이 통과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지름이 줄어들어 있었다.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선 다른 공급관을 찾아야만 했다.
슈우욱-.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관을 갈아타면서 이동하는 것도 벌써 몇 시간째. 스테치는 한도 끝도 없이 고도가 올라가는 바람에 내심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로 올라가는 걸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턱!
이제는 그물망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워진 세 사람. 그러나 이전과 달리, 대공동 한가운데에는 누군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왔다.”
드문드문 새치가 돋아난 머리카락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스테치가 지금껏 봐 왔던 광신도들과 달리, 눈앞의 남자는 다리에 딱 맞는 부츠와 재킷을 착용하고 있었다. 광신도와 마주칠 거라 생각했던 스테치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복장에 살짝 어리둥절했지만, 경계심을 풀지는 않았다.
“너는…… 누구지?”
스테치의 말을 들은 남자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남자가 남는 손으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의 폼멜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맞혀 봐.”
“……어째 제대로 대답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스테치는 투덜거리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지금 이 장소에 먼저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아군은 아니란 뜻이다. 남자는 싸울 준비 만반인 스테치를 보더니 휘파람을 불어 대며 감탄했다.
“단도직입적이군. 아주 마음에 들어.”
어딘지 어색함이 느껴지는 남자의 왼쪽 눈이 번뜩이자, 잠자코 상황을 관망하던 메멘토 모템이 외쳤다.
『스테치! 검을 들어라!』
“?!”
캉!
슬쩍 들어 올린 검을 단단한 무언가가 훑고 지나가면서 불똥이 튀었다. 당황한 스테치와 다른 두 사람이 백스텝을 밟아 뒤로 한참 더 거리를 벌렸지만, 남자는 제 자리에 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뭔가를 하긴 했는데…… 그게 뭐지?’
『저놈이다.』
메멘토 모템이 으르렁거렸다.
『세계수를 환영으로 가리고 있던 건 저 녀석이 꾸민 짓거리임에 틀림없어. 녀석의 왼쪽 눈을 봐.』
“……아.”
이상할 정도로 매끈해 보이는 데다, 유리구슬처럼 생기 없는 눈알. 스테치는 그제야 남자의 눈이 의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티팩트?’
그렇다면 조금 전의 일격은 환상을 적용한 암수(暗數)였단 말인가?
『그렇지. 그런데…… 아무래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남자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스테치의 귀로 들어왔다.
“요즘 운수가 안 좋은가? 이제는 개나 소나 내 환상을 꿰뚫어 보네.”
그는 스테치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 냈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테치는 반지를 남자에게로 겨눈 다음 말했다.
“《에어 불렛》!”
투쾅!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에어 불렛》이 일직선으로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상대의 복부를 관통할 거란 예상과는 달리, 공기의 탄환은 그의 바로 코앞에서 터져 버렸다.
퍼엉!
“어?!”
육각기둥 형태의 얇은 막.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그것은, 벌집처럼 빈틈 하나 없이 빼곡하게 모여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만들고 있었다. 관통력이 뛰어난 《에어 불렛》으로도 흠집 하나 내지 못하다니? 스테치가 손을 거둬들이자, 마르크가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남자가 턱끝을 까딱였다.
“크억!”
마르크의 거체가 붕 떠오르더니, 뒤쪽의 벽으로 날아가 깊숙이 파묻혔다. 피를 토하며 축 늘어지는 그의 모습에 놀란 스테치가 뭔가 해 보기도 전에, 남자는 다음으로 엘레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엘레나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바닥을 나뒹굴었다.
“!”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차례로 나가떨어지는 동료들.
스테치는 검을 뽑아 든 채 뒤로 조금씩 물러섰고, 남자는 멀어진 만큼 다시 거리를 좁혀 왔다. 뭐지? 마법인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스테치는, 이럴 때 가장 시끄러워야 할 자신의 파트너가 침묵하고 있다는 점을 눈치챘다.
“…….”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진정하자.
눈앞의 남자는 환각 능력을 발휘하는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이쪽을 공격해 올지 예측하는 건 오히려 쉬운 일 아닌가? 스테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 순간, 메멘토 모템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잘했어!』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스스로 환각을 깰 수 있을 정도가 되었군. 훌륭해!』
남자는 지금껏 자기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아티팩트가 투사하는 환상으로 스테치 일행을 기만했을 뿐. 엘레나와 마르크는 환상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던 탓인지, 동공에 힘이 풀려 있었다.
“흡!”
스테치가 기합을 넣자, 세계수의 허울을 지워 버린 그때처럼 할로우 블레이드로부터 빛의 장막이 전개되었다. 마르크와 엘레나의 몸을 장막이 한번 휘감고 지나가자, 제정신이 돌아온 둘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뭐…….”
“어떻게 된 거지?”
두 사람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스테치는 남자를 흘끔 쳐다보았다. 심혈을 기울여 건 환각이 다시 한번 더 파훼되자, 그는 이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스테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스테치는 문득 기시감이 들어 눈을 껌뻑였다.
‘잠깐, 이거 어디서 본 듯한…….’
세계수를 가릴 정도로 강력한 환상. 그리고 어지간한 마법을 막아 낼 정도로 튼튼한 방어 장벽까지. 어쩐지 낯설지가 않은 조합이다. 반신반의하던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중얼거렸다.
“혹시, 그레이 스컬쉽의?”
듣고도 흘려 넘길 정도로 정말 작은 목소리였지만, 남자는 멀리서도 용케 그것을 알아들었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뭐야, 너 나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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