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23)
122화에 계속 –
122화 버림말
아직, 아직이다. 결정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스테치의 눈이 부릅떠졌지만 남자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무슨…… 난 네 얼굴 따위 본 적도 없어.”
침착하게 대답하는 스테치. 그러자 사내가 물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괜히 나오진 않았을 테지. 누구냐?”
“글쎄, 말 안 해 주고 싶은데.”
지금까지 어딘지 모르게 죽어 있던 그의 눈빛이, 새로운 흥밋거리를 발견한 직후부터 이채를 띄고 있었다. 스테치는 엘레나와 마르크의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할로우 블레이드를 들어 올렸다.
우웅-.
약간의 진동과 함께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다가오던 남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자신의 왼쪽 눈을 한 손으로 덮고선 눈살을 찌푸렸다.
‘저 검은 대체 뭐지?’
그의 환상에 걸린 자는 외부의 자극으로는 절대 깨어날 수 없는 트랜스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강력한 능력도 상대가 펼친 광막에 지워지자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레이 스컬쉽의 선장, 도린은 스테치를 쳐다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먼저 올라간 놈들이 저놈을 왜 그토록 경계하라고 신신당부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지…….’
육지에서는 산적, 해상에서는 해적으로 활동하는 도린. 그러나 그 이면으로는 자신의 아티팩트들을 십분 활용하여 각종 요인 암살이나 납치 의뢰를 받고 있었다. 그레이 스컬쉽의 이미지는 그저 이를 감추기 위한 위장 중 하나에 불과했다.
어느 날, 도린은 후드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집단으로부터 카시아 하덴브록의 납치를 의뢰받았다. 평소처럼 단순하고 쉬운 일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어째서인지 대실패. 덕분에 나름 업계 전문가라 자부하던 도린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받았던 돈을 전부 되돌려 줘야 할 처지가 되었다.
리더로서 의뢰 실패의 책임을 지기 위해 광신도들을 따라 케일럼까지 온 도린. 하지만 그들이 상식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땐, 이미 발을 빼기 한참 늦은 뒤였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을 때 그냥 관뒀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3 대 1이 뭐야? 돈 더 줘야 하는 거 아냐?’
설마 환상마저 지워 버리는 놈을 적으로 두고 싸우게 될 줄이야. 도린은 자기도 모르게 이빨이 절로 갈렸다. 어쨌든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싶으니, 도린에게 있어 도망치지 않고 싸울 이유는 차고 넘치는 셈이었다.
도린이 손을 앞으로 뻗자, 그의 앞에 육각형의 방어장벽이 다시금 전개되었다. 기다란 막대 형태로 줄지어 생성된 육각기둥의 방벽들을 허공에 띄운 그는, 스테치 일행이 있는 쪽으로 그것들을 날려 보냈다.
콰과광!
단단한 방벽기둥들이 옆으로 몸을 날린 스테치와 엘레나가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가며 세계수의 단단한 내피벽을 부수고 들어갔다. 메멘토 모템의 마법으로도 쉽게 뚫을 수 없었던 방벽이, 무시무시한 무기로 돌변한 순간이었다.
“크으윽!”
마르크는 피하는 대신 막아 내는 쪽을 택했는지, 제자리에 우뚝 선 채 방패로 도린의 방벽 기둥을 막고 있었다. 아무리 방패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그 물리력을 고스란히 받아 내다니 놀라운 신체 능력이었다.
투쾅!
흡수한 충격 에너지를 즉시 되돌려 보내는 마르크. 그러자 도린은 얇은 방벽을 여러 장 겹쳐 충격파를 정면으로 막아 냈다. 아쉽게도 수십 장을 깨부순 충격파는 도린에게 채 닿기 전에 소멸되고 말았다.
‘카운터 타입인가.’
살짝 놀라긴 했지만, 덕분에 도린은 마르크가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도린이 마르크가 있는 쪽으로 손짓하자, 각기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방벽 기둥이 그의 등과 어깨를 찍어 쓰러뜨렸다.
“!”
마르크의 카운터 능력은 결국 그가 가진 방패로부터 기인하는 것. 사각에서의 공격에는 별수 없었다. 방벽에 짓눌린 마르크는 온 힘을 쥐어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힘겨루기에서 약간 뒤처지는 듯 보였다.
그렇게 도린이 한창 마르크에게 한눈을 판 사이, 스테치와 엘레나는 측면으로 우회하여 제각각 마법과 화살을 준비했다.
“《아이스 웨이브》!”
지면으로 흩뿌려진 얼음 결정이 넓게 퍼지면서 도린의 다리를 봉인하자마자, 타이밍에 맞춰 엘레나의 화살이 날아왔다.
팡!
도린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방벽에 가로막혀 부러지는 화살. 그러나 첫 공격이 실패했다고 해서 멈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스테치가 도린에게 달려 나가는 동안, 엘레나는 다음 화살을 준비했다.
“《테슬라》!”
스테치는 공중으로 《테슬라》의 오브들을 던져 놓았다. 도린의 주변을 에워싸듯 자리 잡은 오브들은 그의 머리 위로 무지막지한 전격을 퍼부었지만, 모조리 방벽에 가로막혀 뚫리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로우 블레이드를 휘둘러 보았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썅!’
스테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환상 능력을 봉인했으니 조금은 편해질 줄 알았는데, 상대의 방어가 그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하기사 바다에서 마주쳤을 때조차 격퇴하기는커녕 후퇴하는 게 고작이었으니, 어느 정도는 예견된 사태였지만…….
휘이익-!
화살비와 《테슬라》, 거기에 검격까지 동시에 막아 내던 도린은 자신을 보호해 주던 방벽을 빠른 속도로 회전시켰다. 방벽들이 도린의 주위를 공전하면서 일으키는 풍압에 스테치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러서자, 도린은 역으로 스테치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방벽에 얻어맞고 튕겨 나간 스테치는 물수제비처럼 바닥을 튀며 굴러갔다. 간신히 지면을 긁으며 멈춰선 그는 하나의 작은 태풍처럼 몰아치며 달려오는 도린의 모습에 기겁했다.
“사기잖아, 저건!”
타이밍 좋게 나선 엘레나가 적극적으로 화살을 쏴 도른을 견제하는 동안 스테치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다급한 스테치와 달리, 상황을 관망하던 메멘토 모템의 반응은 미묘했다.
『……조금 이상한데.』
‘너무 강력하다.’라는 것이 메멘토 모템의 생각이었다.
북부행 밀항선을 타고 가다 마주쳤을 때도 만만찮은 능력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파괴적이고 동적이진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만큼이나 강해진 걸까?
『계속 버텨 봐, 스테치. 상대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공중에 또 한 번 《테슬라》 오브를 띄웠다. 검을 집어넣고 양손에 마력을 끌어올린 그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주문을 도린에게 발사했다. 스테치는 외쳤다.
“세레나! 멈추지 말고 계속 공격해!”
그 말에 엘레나는 활을 거둬들인 뒤 스피라투스의 구경을 키웠다. 건틀릿 사이즈에서 런처급으로 거대해진 스피라투스의 포구에서, 거대한 탄이 형성되었다. 반동이 심해서 다루기 힘든 만큼 그 위력은 상당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한풀 꺾인 도린의 기세. 공격을 멈춘 그는 방벽으로 자신의 몸을 둥글게 덮어 방어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콰장창!
“으오오옷!”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누군가의 괴성이 들려왔다. 스테치와 엘레나, 도린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돌아갔고, 그곳에서는 때마침 마르크가 등에 건 방패의 충격파를 추진력으로 이용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궤도를 꺾어 공중으로 솟아오른 마르크는 등 쪽의 방패를 팔에 두른 뒤, 그대로 유성처럼 도린의 방벽 위로 낙하했다. 그 정도에 깨질 만큼 호락호락한 방벽이 아니었지만, 덕분에 마르크는 반격에 쓰기 충분한 충격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었다.
콰아아앙!
영거리에서 발사된 충격파. 그러자 도린의 방벽은 허무할 만치 금이 가면서, 결국 박살 나고 말았다.
“어걱!”
방벽이 파괴될 때의 여파로 구슬처럼 튕겨 나간 도린. 스테치만큼 먼 거리를 날아간 그는 꼬리처럼 기다란 먼지구름을 남기며 바닥을 미끄러져야만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스테치가 물었다. 도린에 의해 움직임이 봉인되어 있어야 할 마르크가 빠져나온 것도 신기한데, 파괴 불가능으로 보이던 도린의 방벽을 충격파로 부수는 데에 성공하다니?
“나도 모르겠군. 갑자기 방벽이 약해졌길래 빠져나왔는데…….”
마르크는 도린을 쳐다보았다. 한쪽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문득 뜨뜻한 느낌이 들어 손가락 끝으로 코밑을 훔쳤다.
‘뭐……?’
코피라고 생각하고 닦아 낸 것은 피가 아니라 검은 액체였다. 그것을 본 도린은 현기증이라도 난 것처럼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스테치와 엘레나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도린의 상태는 안 좋아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급격하게 힘이 약해진 것 같군.』
“으윽……. 빌어먹을.”
도린이 중얼거렸다.
세계수로의 접근,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이변을 모두 감추기 위해선 강력한 환상 계열 능력자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도린은 해당 작업을 수행할 적임자로서 가장 근접한 인물이긴 했지만, 아쉽게도 세계수의 모습을 왜곡시키기엔 힘이 부족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광신도들은 도린에게 꼭 필요한 경우에만 쓰라며 검은빛깔의 액체가 가득 든 앰플을 건넸고, 그것을 마신 도린은 덕분에 몇 주일이 넘는 기간 내내 이그젤타의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후두둑.
도린은 목구멍 너머로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그대로 입 밖에 게워 냈다. 시고 따끔거리는 위액이 아닌, 코에서 흘러나온 것과 같은 검은 액체였다. 스테치 일행은 그것이 무슨 증상인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도린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버텨 왔지만, 스테치 일행과 맞서 싸우느라 능력을 마구 사용한 탓에 몸에 부담이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만큼 약을 사용한 대가는 컸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도린은 옆으로 둘러매고 있던 작은 포켓에서 작은 앰플을 꺼냈다. 마지막을 위해 아껴 둔 약이었지만, 지금 쓰지 않으면 상황을 역전시키긴 어려워 보였다.
벌컥- 벌컥-
안에 든 내용물을 말끔히 비운 도린. 줄 끊어진 인형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던 사지에서, 거짓말처럼 힘이 샘솟는 게 느껴졌다. 도린은 팔뚝으로 얼굴을 대충 닦아 낸 뒤, 다시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때였다.
툭.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도린의 시선이 돌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손. 마치 불에 달궈져 녹아내린 촛농처럼, 끈적하게 흘러내린 그의 손이 손목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있었다.
“어……?”
도린의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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