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24)
123화에 계속 –
123화 싱크로
풀썩!
잿빛 액체로 녹아내려 폭삭 주저앉은 도린의 몸뚱이. 주인을 잃은 그의 옷가지들도 이내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스테치와 엘레나는 물론이고, 심지어 마르크까지도 이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광경에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뭐……?!”
『저 자식…….』
이미 본래의 모습은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끈적하게 검은 덩어리로 뭉쳐 버린 도린은, 아니 도린이었던 무언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스테치는 천천히 덩어리에 다가가 검 끝으로 덩어리를 쿡쿡 쑤셔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방금까지 급박했던 순간이 모두 거짓말로 느껴질 정도로 허무한 최후였다.
“죽었나?”
스테치가 중얼거리는 순간, 덩어리가 희미하게 흔들거렸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스테치는 움직임을 감지하자마자 번개처럼 뒤로 물러섰고, 덩어리는 그 자리에서 서서히 솟아올라 어떠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섀도우 핀드…….』
메멘토 모템이 중얼거렸다. 얼핏 보기엔 갑옷을 걸치지 않은 데스나이트와 비슷해 보였지만, 훨씬 더 불안정하면서도 위협적인 생김새였다.
원본이 인간이었다고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변이된 모습. 큼지막하게 부풀어 오른 팔뚝과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변한 손가락들. 안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저 심연의 어둠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해……. 나도 저런 타입의 몬스터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이 상대를 인간이 아닌 몬스터로 규정짓는 것을 알아채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스르륵-!
다리 대신 슬라임처럼 끈적이는 하반신으로 미끄러지며 접근해 온 핀드는, 거대한 손을 스테치에게 휘둘렀다. 스테치는 검을 들어 올려 막으려 했지만, 핀드의 손가락은 할로우 블레이드의 날에 베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재생하기 시작했다.
“어?!”
촤아악!
검을 거의 그대로 관통한 손가락이 기어이 스테치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새빨간 선혈을 흩뿌리며 목을 뒤로 제끼는 스테치. 까딱 잘못했다면 목이 베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빠지세요!”
엘레나가 화살을 쏴 보았지만, 핀드는 날아드는 모든 화살을 그대로 통과시켜 버렸다. 검격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스테치는 마법 공격에 집중하기로 마음먹고는, 《테슬라》 오브들을 띄웠다.
“《아이스 웨이브》!”
하다못해 더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스테치가 뿌린 냉기가 바닥에 두꺼운 얼음 장판을 만들었지만, 핀드는 얼음과 엉겨 붙으면서 역으로 냉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공중을 부유 중이던 오브에서도 수많은 전격이 쏟아져 내렸지만, 핀드에게는 아무런 대미지도 없어 보였다.
“저리 꺼져!”
손아귀 안에 공기와 바람을 압축시킨 스테치는 《에어 버스트》의 투사체를 발사했다. 난기류 폭탄이 핀드의 신체와 접촉한 순간, 공기의 풍압에 휩쓸리며 핀드의 몸이 찢겨 나갔다.
“됐…….”
스테치는 후속타를 먹이려던 손을 멈춰 세웠다. 저 멀리 날아가 버려야 할 핀드의 상반신이, 실처럼 얇고 가느다란 액체 형태로 연결되어 《에어 버스트》의 폭발력을 견뎌 내고 있었다. 얼마 뒤 바람이 완전히 잦아들자, 핀드는 그 즉시 몸뚱이를 재생시켜 스테치에게 손을 뻗었다.
콰직!
“으으읏!”
스테치의 앞을 가로막고 난입한 마르크의 몸이 뒤로 천천히 밀려났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끼어든 그가 성공적으로 충격에너지를 방패로 빨아들이자, 사자의 입에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핀드의 상반신이 다시 한번 형태를 잃고 찌그러졌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사자후에 짓눌리던 핀드와 방패 사이에, 흐릿한 푸른 빛이 아른거렸다. 화살을 겨누고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느라 찡그리고 있던 엘레나는, 그것이 뭔지 깨닫자마자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설마?”
캉!
맑은 금속음과 함께, 푸른 빛무리가 비로소 실체화되었다. 반투명한 유리 같은 질감에, 특유의 육각형 형태. 그것은 다름 아닌 도린의 아티팩트로 발현되던 방어 장벽이었다.
“어, 어떻게?!”
당황한 스테치가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한번 방벽을 생성하는 데에 성공한 핀드는 방벽을 굵은 기둥으로 만들어 마르크의 옆구리를 찍었다. 뿌득-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저 멀리 날아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
멀리 떨어진 그를 뒤로 하고 이번엔 스테치가 달려들었다.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의 능력도 그대로 흡수해서 사용한다고?’
『스테치, 뒤다!』
메멘토 모템의 목소리와 동시에 발동된 《오토매틱 리플렉스》. 그러나 느려진 시간 감각과 《아크로바트》 스킬의 보조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방벽의 공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등을 얻어맞고 앞으로 날아간 스테치는, 예리한 흑수를 들이밀고 있는 핀드의 모습을 보곤 기겁했다.
『《에어 불렛》!』
투쾅!
메멘토 모템이 발동한 마법에 의해 형태를 잃고 일시적이나마 무너져 내린 핀드. 그런 녀석을 그대로 넘어 반대편에 착지한 스테치는 《리커버리》 주문으로 부러진 뼈를 회복시켰다.
“헉…… 헉…….”
핀드는 분명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괴물이었지만, 아티팩트를 활용하는 방식은 완숙된 경험에서 우러나온 산물인 게 틀림없었다.
‘썅, 왜 하필 그 타이밍에 몬스터가 되어서 이 고생을 시키는 건데?!’
원본인 도린에 비해 핀드는 훨씬 더 거칠고 공격적이다. 핀드의 자체적인 재생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탓에 방어에 신경 쓸 필요가 적으며, 모든 방벽을 공격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이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스테치!』
“왜?!”
검을 납작하게 세워서 날아오는 방벽 기둥을 막아 낸 스테치는 다급한 나머지 육성으로 외쳤다. 허리를 숙이자마자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핀드의 손톱이 훑고 지나갔다.
『시간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끝장내자! 지금 여기서 더 늦었다간…….』
빠악!
공중으로 붕 떠오른 스테치는 몸을 빙글 돌려서 지면으로 무사히 착지했다.
반지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세계수의 상태는 계속해서 악화하는 중이었고, 올라가야 할 길은 여전히 많이 남은 상태였다. 손에 쥔 패를 써 보지도 못하고 실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테치가 심호흡하며 일어섰다.
지면을 미끄러지며 접근해 온 핀드의 얼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주둥이가 악어의 그것처럼 쩍 벌어지면서 어둠으로 가득 찬 목구멍이 드러났다.
탓!
반지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빛이 황금색으로 변화하자, 더 이상 머뭇거릴 틈이 없다고 판단한 스테치는 핀드에게 정면으로 돌진했다.
“싱크로!”
순간, 머리카락을 포함한 전신의 체모가 쭈뼛 곤두섰다. 피부와 피하의 근육을 억지로 분리해 내는 듯한 고통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번개처럼 타고 내렸다.
0.00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메멘토 모템에 저장되어 있던 모든 마법들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으랴아아앗!”
노호성을 토해 낸 스테치가 황금색 마력으로 번뜩이는 왼손을 갈퀴처럼 벌려 핀드의 몸에 깊숙이 쑤셔 넣었다.
푸욱!
그러자 지금껏 모든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내던 핀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스테치의 손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핀드의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스테치는 그대로 손끝에서 주문을 시전했다.
《액티브 스킬: 코어 블라스트. 상대의 정수, 본질, 핵이 되는 요소를 마력으로 자극하여 공격합니다.》
퍼어엉!
핀드의 체내에서 발생한 대폭발.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핀드의 경이로운 재생 능력은 일순 기세가 꺾였다. 폭심지로부터 터진 핀드의 신체 조각들이 비처럼 지면으로 쏟아져 내렸고, 스테치는 뻗었던 왼손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손에 머물러 있던 황금빛 기운이 전신을 뒤덮었다.
“크윽!”
따끔한 감각에 스테치는 이를 악물었다. 능력을 사용하면서 소모되는 마력양도 장난이 아니거니와, 신체적 부담도 무시 못 할 수준이다. 한번 시작한 이상 빠른 시간 안에 결판을 봐야만 했다.
한편, 폭발로부터 멀찍이 날아가 지면에 떨어진 핀드의 본체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제대로 들어간 데미지 덕분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액티브 스킬: 라이트닝 스피드. 신체를 정해진 한계를 넘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실시간으로 대미지가 축적됩니다.》
“으아아아아!”
지면을 박차고 달려든 스테치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포탄과도 같았다. 뽑아 들었던 할로우 블레이드도 이에 호응하듯, 리치와 싸웠을 때처럼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검이 목표에 닿았다.
할로우 블레이드의 예리한 날이 핀드의 끈적한 육신을 빛으로 깎아내렸다. 재생력을 넘어, 절대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먼지가 되어 파괴되는 자신의 몸을 보곤 핀드가 발악했다.
“그…… 으어어어……!”
촤아악!
기어이 핀드의 몸을 베고 지나간 스테치는,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회전베기를 가했다. 이어지는 무수한 참격에 핀드는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조각조각 갈려 나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얌전히 죽어라아아!”
써컹!
깔끔하게 양분된 핀드의 상반신이 하반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나 스테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완전히 끝을 보기 위해, 유성처럼 뛰어올라 한 번 더 검으로 상대를 올려 베었다.
털썩!
잠시 후, 땅으로 떨어진 핀드의 파편과 스테치.
스테치가 고개를 돌려 남아 있는 핀드의 몸뚱이를 쳐다보자, 잿가루처럼 산산히 분해된 핀드가 대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핀드의 정수에는 더 이상 몸을 회복시킬 일말의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마르크와 엘레나는 그제야 스테치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직접 본 그들조차 눈 깜짝할 사이에 전투가 끝나 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으헉!”
스테치는 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아텔리어 씨!”
엘레나는 스테치를 붙잡았다. 아주 잠깐 어빌리티를 발동했을 뿐인데, 메멘토 모템에 축적시켜 두었던 마력의 1/4가량이 날아가 버렸다. 핀드가 저 정도로 끝나 주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마르크가 욱신거리는 갈비를 부여잡은 채 고통으로 신음하며 스테치에게 물었다.
“……그렇게 강력한 능력이 있었다면, 왜 흑기사 놈과 싸울 때는 선보이지 않았나?”
그의 말에 스테치는 고통으로 부들거리는 와중에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고작 1분 정도 능력을 써 놓고도 몸이 이 꼴이 되고 만다. 마르크가 적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스테치는 엘레나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린의 예상치 못한 반격이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쥐어짜 내서 싸울 일도 애초에 없었을 것을. 내심 투덜거린 스테치는 세계수 위로 올라가는 도관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문득 바닥에 떨어진 물건에 시선이 돌아갔다.
“저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