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26)
125화에 계속 –
125화 공평함
“선수는 양보해 주마. 이거 간만에 재미있는 싸움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군.”
거구의 광신도 사내는 기지개를 크게 켠 뒤 스테치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나 첫 일격으로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직감한 스테치는 섣불리 발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말했다.
“지나치게 경계하느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가 본데, 자네를 위해 동기 부여를 해 주지.”
사내가 옆으로 비켜서자, 지금껏 그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이상한 물체 하나가 드러났다. 검은 액체를 담은 대량의 앰플과, 지면에 박힌 채로 앰플의 내용물들을 주입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기계 장치.
“이게 너희들의 찾고 있던 목표다. 어때, 이 정도면 조금은 조바심이 생기나?”
“……젠장!”
탓!
최고 속도로 빨라진 그의 움직임은 아므리타로 인해 감각이 강화된 엘레나조차 놓칠 정도로 재빨랐다. 순식간에 사내의 배후까지 돌아간 스테치는 장치를 먼저 파괴하기 위해 검을 찔러 넣었고, 사내는 팔로 검을 옆으로 쳐 냈다.
캉!
“히익!”
바로 옆에 서 있던 실베스틴은 겁을 잔뜩 집어 먹고는 뒷걸음질 치며 뒤로 빠졌다. 어차피 지금 상대해야 할 적은 눈앞의 광신도 사내였으므로, 스테치는 실베스틴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속 보이는군. 바로 앞에 나는 거들떠도 안 보니 원.”
스테치는 사내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장치를 부숴! 이걸 제때 파괴하지 못하면……!”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스테치가 입을 열기도 전부터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마르크는 방패를 앞에 내세운 채 돌진해 오고 있었고, 엘레나는 화살을 시위에 올려놓고 장치의 앰플을 겨냥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장치를 파괴하려고 움직인 그때, 사내는 두르고 있던 로브를 크게 휘둘렀다.
강력한 돌풍이 세계수 꼭대기를 휩쓸었다. 스테치가 옆으로 쓰러졌다. 엘레나가 쏜 화살은 바람의 영향으로 미세하게 조준이 엇나가는 바람에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거칠던 바람이 잦아들 무렵, 장치의 위에는 전에 없던 검은 막이 덮어씌워져 있었다.
콰앙!
“으윽!”
달려오던 마르크가 그대로 장치를 뒤덮은 막과 충돌했으나,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에 의해 마르크는 달려오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튕겨 나갔다.
“썅!”
그것을 본 스테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선 다음 주문을 시전했다.
《액티브 스킬 : 써멀 비트. 시전자의 주위를 항시 배회하며, 자동으로 일정 거리 내에 들어온 적을 추격 및 공격하는 결정체를 소환합니다.》
수정처럼 맑은 결정체 세 개가 스테치의 머리 위로 떠오르더니, 광신도 사내에게 초고열의 광선을 발사했다.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맨몸으로 그것을 받아 내며 스테치에게 팔을 뻗었고, 스테치는 몸을 옆으로 비틀어 피한 뒤 사내의 어깨 깊숙이 왼손을 박아 넣었다.
“《코어 블라스트》!”
퍼엉!
체내에서 터진 마력 폭발에 의해, 손끝이 박혀들어 간 사내의 오른쪽 어깨 부위가 기괴한 형태로 마구 부풀어 올랐다.
『가드가 뚫렸다! 이제…….』
그러나 사내는 온전한 반대쪽 팔로 기어이 스테치를 붙잡은 채 수 미터가량을 나아갔다. 사내와의 체급 차이가 큰 탓에, 스테치는 뒤쪽으로 속절없이 밀려날 뿐이었다.
“흐하, 흐하하하!”
사내의 등짝은 《써멀 비트》가 뿜어내는 초고열파를 받아 뼈가 드러나도록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일말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광소를 터뜨리며 스테치와 두 눈을 마주쳤다.
“하려면 할 수 있지 않나, 대적자여!”
“닥쳐어어어어!”
스테치는 미리 장전해 둔 너클로 다시 한번 사내의 턱에 어퍼컷을 먹였다. 살라맨더 더스트의 특제탄을 장전한 너클이 격발되자, 하늘로 치솟은 플라즈마 제트가 그의 안면 전체를 뒤덮었다.
뻐걱!
턱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스테치의 귀에 들려왔다. 그 순간, 사내는 그대로 스테치를 끌어당겨 정수리로 그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퍽!
“으극!?”
갑작스런 충격에 스테치의 시야가 하얘졌다. 난데없이 날아온 박치기에 스테치의 상반신이 뒤로 넘어갔고, 사내는 그런 그에게 발길질을 날리고자 다리를 뒤로 뺐다.
“흐읍!”
때마침 나타난 마르크가 방패를 휘두르자, 모서리에 얻어맞은 사내가 비틀거렸다. 거리를 벌리려는 사내에게 방패를 들이밀며 끝까지 따라붙은 마르크가 맞부딪쳤다.
“조금만 더…….”
방패를 사이에 둔 두 거한이 한창 힘겨루기를 하느라 멈춰 있는 동안, 엘레나는 사내에게 겨누고 있던 화살을 쏴 날렸다. 관자놀이를 정확히 관통당한 사내의 몸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고, 마르크는 사내의 복부와 안면으로 주먹과 발을 연달아 욱여넣었다.
퓩! 퓩!
사내의 심장과 폐, 그리고 목에 연달아 꽂히는 엘레나의 화살들. 하나같이 일반인이라면 일격으로도 절명할 수 있는 부위들이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닌 존재. 엘레나는 사내가 고슴도치처럼 수많은 화살에 꿰이고서도 여전히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마르크!”
마르크가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자, 일직선으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스테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어 불렛》!”
싱크로의 힘으로 강화된 《에어 불렛》의 위력은 막강했다. 마르크는 온 힘을 다하여 자신에게 날아드는 공기탄을 막아 냈고, 방패는 그 충격을 모조리 흡수했다. 하지만 스테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힘과 속도를 실어 몸을 회전시킨 스테치가 회전베기로 마르크의 방패를 강하게 후들기자, 마르크의 레오니다스 방패가 밝은 빛을 뿜어냈다.
“쏴 버려!”
스테치의 의도를 알아챈 마르크는 즉시 방패를 사내에게로 돌려 충격파를 발사했다.
투쾅!
안 그래도 화살 때문에 넝마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진 사내는 저 멀리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멀리서 지켜보던 실베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젠장! 실컷 비웃었는데 이제 보니까 이 녀석들 장난 아니게 강하잖아? 설마 선지자님이 지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런 그의 걱정과 불안을 종식시키듯, 사내는 기어이 좀비처럼 땅을 짚으며 다시 일어섰다. 전신에 박힌 화살들을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뽑아내는 그의 모습은 거의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아, 개운하군.”
화살이 꽂혀 있던 자리에서는 벌써부터 새 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되먹은 몸뚱이냐, 썩을.』
《코어 블라스트》는 상대의 내부에 마력을 때려 박아 방어 능력을 강제로 감소시키는 기술. 맞히기가 어려울 뿐, 그 효과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사내는 《코어 블라스트》를 포함한 다른 모든 공격들을 전부 받아 내고도 여유롭다 못해 느긋했다.
“미안하게 됐다.”
사내가 로브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상처로 가득해야 할 그의 몸은, 남아 있는 핏자국만 제외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끈했다.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만족스러웠어. 세상이 평화롭다 보니 때로는 이런 따끔한 통각조차도 그리워지더라고. 내 말 이해하지?”
“하겠냐?”
스테치가 말했다.
“어금니 꽉 깨물어라. 지금까지가 워밍업이었다면, 이다음부터는 본게임이니까.”
손가락을 타고 전해져 오는 미세한 진동 덕분에 스테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리퍼와의 싸움에서 발현했던 검의 능력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어빌리티 싱크로와 할로우 블레이드, 양쪽 모두의 리스크를 한꺼번에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것만큼은 당사자인 스테치 본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것 때문에 전력을 내지 않았던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어.』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안 그러면 북부 전체가 초토화되고 말 테니까.』
‘……아아, 그렇지. 애초부터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어.’
스테치가 할로우 블레이드를 쥔 손에 힘을 주자, 검이 그것에 답하듯 떨려 왔다. 뿜어져 나오던 빛도 그에 맞춰 한층 더 강해졌다.
“후우우-.”
천천히 심호흡을 하자, 검으로부터 흘러나온 황금빛 기운이 스테치의 몸을 휘감았다. 그것은 엘레나와 마르크는 물론, 적인 실베스틴조차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사내의 반응만큼은 달랐다.
“…….”
꺼림직한 물건이라도 본 듯한 표정. 희미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스테치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그래.”
스테치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턴 장난이 아니지.”
바라크의 전기가 할로우 블레이드를 완전히 감싸자마자 스테치는 사내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그야말로 한 줄기의 벼락과도 같은 스피드. 모두의 시야에서 벗어난 스테치가 사내의 뒤에서 다시 나타났을 때, 깔끔하게 잘려 나간 그의 왼팔이 땅에 떨어졌다.
툭.
“?!”
사내는 바싹 태워진 탓에 피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는 팔의 단면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뒤를 돌아보려는 사내의 행동을 비웃으려는 것처럼, 스테치는 다시 한번 모습을 감췄다.
촤아악-!
거장의 손에 깎여 나가는 대리석 덩어리처럼, 사내는 빗발처럼 쏟아지는 스테치의 검격에 속수무책으로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팔과 어깨, 그리고 결국엔 정강이와 허벅지까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내의 재생력 때문에 고생하던 스테치가, 이제는 사내를 장난감 다루듯 일방적으로 도륙 내고 있었다.
“오오옷!”
베이는 것과 동시에 상처 부분이 지져지면서 지혈됐다. 양팔이 제거된 것도 모자라, 기어이 한쪽 다리마저 떨어져 나간 사내는 외발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절단면에서는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열심히 재생을 시도했지만, 그 속도는 몹시 더뎠다.
“흥!”
써걱!
하늘 높이 날아오른 사내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자,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던 실베스틴이 비명을 질렀다. 사내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던 그로서는, 정말이지 최악의 결과였다.
“아,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결국 목마저도 잃어버린 사내. 그러나 실베스틴의 절규와는 관계없이, 스테치는 아직 검을 소드벨트에 걸지 않았다.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부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꿈틀.
그리고 그런 스테치의 예상대로, 토막 난 사내의 육편들이 움찔거렸다. 덜덜 떨리던 그의 몸뚱이들은 모두 검은 액체로 변하며 녹아내리더니, 한곳에 모여 점차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 스테치가 위를 흘끗 올려다보니, 어느새 그곳에는 그를 내려다보는 검은 몬스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껍질이나 다름없던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튀어나온, 사내의 본체였다.
“드디어 서로 공평해졌군.”
스테치가 중얼거리자, 사내였던 몬스터가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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