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45)
144화에 계속 –
144화 아바타
한창 스테치 아텔리어를 찍어 누르고 있던 거인은, 잠시 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상대가 그의 손에 짓눌리기는커녕, 되레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건……?”
스테치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정작 그 자신은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지 오래. 거인의 손바닥을 밀어내고 있는 것은 엘레나나 마르크, 그리고 스테치도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
타오르는 불꽃같이 빨갛고 기다란 머리카락과, 고양이같이 날카로운 눈매. 대륙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이국적인 복장과 적당히 근육이 잡힌 건강미 넘치는 육체.
다리를 지면에 박아 넣고 고정시킨 채, 두 손으로 거인의 손바닥을 떠받치고 있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후우우우-.”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스테치가 무어라 말을 걸기 직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그녀가 중얼거렸다.
“새끼……. 지금까지 잘도 날뛰었겠다.”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면서도 여유 있게 한쪽 손을 뺀 그녀는, 그대로 주먹을 쥐어 거인의 손바닥에 어퍼컷을 날렸다.
퍼어어억!
강력한 일격에 손이 번쩍 들린 거인. 녀석은 예상치 못한 충격 탓에 중심을 다잡느라 수 발자국 이상 뒤로 물러섰다. 그런 거인을 향해 찢어 죽일 듯한 시선을 쏘아 보내며, 여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일어나. 언제까지 앉아서 쉬고 있을 건데?”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깨달은 스테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 누구세요?”
여성이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에 억눌린 스테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예쁜 얼굴이 무색하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스테치에게 대꾸했다.
“또 무슨 헛소리를……. 아.”
손가락을 튕긴 그녀가 목을 살짝 가다듬더니,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듯한 굵고 거친 목소리로 스테치에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내가 누군지 짐작이 가나?』”
“엥?”
할 말을 잃은 스테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제야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보던 그는, 비로소 자신이 했던 행동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빌리티 ‘아바타’.
그것은 말 그대로, 반지의 영혼이 현신할 수 있는 육체를 만들어 주는 어빌리티였다.
“마, 말도 안 돼! 네가 성깔 더럽던 그……?!”
스테치는 기겁하다 못해 경악에 찬 시선으로 눈앞의 여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자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의 뺨을 가볍게 한 대 갈기며 핀잔을 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정신 차려! 눈앞의 상대에 집중하라고!”
“어, 어어…….”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스테치는, 검을 뽑아 들면서 두 번째로 놀라고 말았다.
비교적 평범한 디자인의 할로우 블레이드가, 이전보다 훨씬 더 날렵한 형태로 뒤바뀌어 있었다. 재질마저 일부 바뀌었는지 풀러를 제외한 날 부분 전체가 새까맣게 물들어져 있었다. 거기에 검신을 휘감고 올라가는 붉은 물결무늬가 제법 인상적이었다.
이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싶은 그때, 거인이 괴성을 터뜨렸다.
“크아아아악!”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짐승의 목소리. 귀를 틀어막고 있던 스테치는, 막 앞으로 나서는 메멘토 모템을 다급히 불러 세웠다.
“야, 잠깐! 네가 밖으로 나와 있으면 내가 반지를 못 쓰는 거 아냐?”
“몇몇 어빌리티를 제외하면 사용하는 데에 전혀 지장 없어! 먼저 간다!”
탓!
준비 동작도 없이 공중으로 훌쩍 뛰어오른 메멘토 모템은, 순식간에 거인의 손과 팔뚝을 타고 머리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엘레나와 마르크가 그에게 달려오더니 물었다.
“아텔리어 씨! 저…….”
“저 여자는 누구냐?”
궁금한 내용은 둘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스테치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어 대며 설명했다.
“나도 사실 잘 모르겠는데, 저게…… 이거래.”
“?”
반지를 톡톡 두들겨 보이는 그의 제스쳐에, 두 사람이 보인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메멘토 모템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마르크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엘레나조차도 선뜻 믿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싸움이 끝나면 본인 입으로 자세히 설명해 주겠지. 어쨌든 두 사람은 뒤로 물러나 있어!”
스테치는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후 뒤늦게 메멘토 모템의 뒤를 따랐다. 검을 강하게 움켜쥐자,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기운과 함께 검붉은 사기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거인에게 접근한 그는, 검을 역수로 돌려 잡은 뒤 그대로 거인의 엄지발가락 옆에 쑤셔 박았다. 마법으로 강화시켰을 때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던 날이, 이제는 웬일인지 거인의 피부를 너무나도 간단히 파고들었다.
“으랴아아!”
그대로 발뒤꿈치까지 달려가며 거인에게 긴 상처를 남긴 스테치. 거인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사이, 먼저 거인의 어깨까지 올라간 메멘토 모템이 머리통을 향해 달려들며 주먹을 날렸다.
“흥!”
퍼억! 퍼억!
메멘토 모템이 날리는 주먹에 맞춰 거인의 머리가 좌우로 휙휙 돌아갔다. 거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자그마한 신체로, 어떻게 그런 가공할 괴력을 낼 수 있는 걸까.
“엄청나네…….”
쿠구궁!
진짜 이러다 이기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쯤, 지면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지진과 함께, 거인은 결국 그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창 거인을 두들겨 패던 메멘토 모템은 거인의 무릎에 착지한 다음, 다시 거인의 안면으로 뛰어들었다.
찰싹!
그러나 갑작스럽게 날아든 거인의 손바닥에 얻어맞은 메멘토 모템은 저 멀리 날아가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스테치가 후다닥 달려와서 메멘토 모템을 살펴보았지만, 얼굴에 남은 자그마한 생채기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메멘토 모템은 끙- 하고 신음하며 말했다.
“젠장, 역시 이 정도로는 부족해.”
“네 주먹 한 방이 내 열광선검이랑 위력이 거의 동급이던데,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스테치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메멘토 모템은 손을 휘휘 내젓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까짓 솜방망이 주먹으로 백날 후려쳐 봤자 저 덩치한테는 택도 없어. 근데…….”
메멘토 모템이 뒤를 슬쩍 돌아보자, 천천히 땅을 짚고 일어서려는 거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가 들고 있던 할로우 블레이드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 그거 언제 그렇게 바뀌었냐?”
“이거? 아까 깔려 죽을 뻔한 이후에 갑자기 변했어.”
물끄러미 검신을 살펴보던 메멘토 모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진작 그걸 봤더라면 굳이 내가 이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지금의 그 검이라면 저놈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을지도 몰라.”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를 들어 올렸다. 햇빛을 받은 흑색의 검날이 흑수정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메멘토 모템이 스테치에게 말했다.
“검의 외형이 변화한 이유는 그 녀석이랑 내 정수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야. 내가 강해진 만큼 검도 함께 성장하는 거지.”
“뭐?”
스테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메멘토 모템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아치발의 신자 놈들을 상대로 할 때에만 유독 강해지는 그 특성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검이 대장간에서 벼려지고 난 직후 네가 만졌을 때,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
스테치는 발타자르가 할로우 블레이드를 만들어 주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검을 만졌을 때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 설마 그게?
“네 검의 능력은 주인의 의지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그 드워프 놈이 말했잖아. 그래서 주변에서 도움이 될 만한 기운들을 죄다 빨아들이다가, 얼떨결에 내 사기와 정수도 일부 뽑아간 거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아니. 근데 생각해 보면 너무 뻔하잖아? 그 광신도 놈들은 나만 보면 대적자라고 하는데, 정작 거기에 어울리는 힘은 웬 엉뚱한 검이 가지고 있었으니……. 이 정도면 바보라도 눈치채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보가 되어 버린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거인 놈을 조지려면 내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어. 완전히 숨통을 끊어 놓으려면 그 검의 주인인 네가 직접 나서야만 해.”
뭔가 한 번에 알아듣기엔 어려운 이야기들이 우르르 튀어나왔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인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의 검극을 앞으로 겨눴다. 그러자 메멘토 모템이 그에게 경고했다.
“명심해. 반지 안에 내장된 마력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번 한 번으로 끝내야만 해. 알아들었지?”
“하나하나 말 안 해 줘도 되거든?”
스테치는 툴툴거리며 눈앞의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일어선 거인은 정말이지 토 나올 정도로 거대했다. 이런 놈을 이쑤시개만도 못한 사이즈의 검으로 이길 수 있을까?
‘하긴, 언제는 나한테 선택지가 있었나? 내 인생이 늘 이런 식이었는데.’
남아 있는 부스트의 효과마저도 사라져 버리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메멘토 모템은 살짝 초조해하는 스테치에게 말했다.
“녀석의 빈틈은 내가 만들게. 너는 기회를 노려서 저 덩치 큰 놈의 모가지를 쳐 버려.”
탓!
메멘토 모템은 말이 끝나자마자 앞으로 돌진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주먹을 가볍게 뛰어넘어 피한 뒤, 더블 엑스 핸들로 손등을 내려찍었다. 그 충격으로 거인은 다시 한번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콰아앙!
붉은 산 일대를 휩쓸 정도로 강한 풍압에, 멀찍이서 사태를 지켜보던 엘레나와 마르크가 얼굴을 가렸다. 이미 싸움은 그들이 개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판이 커진 상황. 두 사람은 그저 스테치가 잘 해내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작해라, 버러지 놈아!”
메멘토 모템의 노호성이 사막 전체에 울려 퍼졌다. 양측의 싸움은 일견 비등해 보였지만, 상대적으로 크기도 작은 데다 잽싸기까지 한 메멘토 모템에게 거인이 점점 밀리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윽고, 거인을 크게 밀어낸 메멘토 모템이 스테치에게 외쳤다.
“지금이야!”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의 보조를 받아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거인의 목이 바로 앞에 보이는 위치까지 올라간 그는, 검을 옆으로 돌려 잡은 다음 어빌리티를 사용했다.
“싱크로!”
그러자 지상에서 올려다보던 메멘토 모템이 스테치의 반지로 빨려 들어왔다. 전신을 충만하게 감싸고 도는 기운을 느끼며,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의 위로 마법을 시전했다.
“《인페르노》, 《써멀 비트》!”
《콤비네이션 스킬 : 레바테인. 업화와도 같이 작렬하는 불꽃을 검의 형상으로 빚어냅니다. 실시간으로 대량의 마력 소모하며, 사이즈와 위력에 따라 소모되는 마력량이 변합니다.》
두 개의 마법과 할로우 블레이드가 합쳐지면서 다시금 거대한 화염검이 만들어졌다. 다만 그 크기나 기세는 비교 자체를 불허할 정도였다.
“흐아아아앗!”
스테치는 있는 힘껏 몸을 비틀며 횡베기를 시전했고, 회전력을 최대로 받은 그의 검날이 거인의 목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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