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51)
150화에 계속 –
150화 고향
카델트 대사막의 마력 폭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스테치는, 붉은 산을 떠나기 전 시무스에게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들과 향후 계획들을 편지로 날려 보냈다.
시무스의 의뢰는 이덴 마을 사람들의 행방을 파악한 시점에서 끝난 거나 다름없었기에, 편지는 사실상 임무 종료를 통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처 지급 받지 못한 의뢰비가 일부 남아 있긴 했지만, 애초에 지갑 사정이 나빴던 것도 아니라서 스테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어둠의 숲으로 향한 지 약 1개월이 지난 어느 날.
“북부 전선이다.”
휘영청한 달이 떠오른 밤.
남부 땅을 딛기까지 이제 고작 몇백 미터를 앞둔 스테치 일행은, 몸을 바짝 낮춘 채로 베네지아 병사들의 전선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끝을 모르고 이어진 방책과 망루들, 그리고 병사들이 쉬고 있는 막사들까지.
“내가 기억하던 때에 비해 경계가 훨씬 더 강화되어 있군.”
스파이 글래스에서 눈을 뗀 마르크가 중얼거렸다.
물론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감비니 요새의 문제와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 온 마력 폭풍의 소멸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겹치면서, 북부 전선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그러나 스테치의 얼굴에는 오직 피곤함만이 가득했다. 보급도 없이 서둘러 사막을 건너오느라 식량과 물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에 보이는 적을 전부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간신히 그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이다.”
스테치가 신호를 내리자, 메멘토 모템에서 나온 프레야가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의 몸을 강탈했다.
“우욱-.”
헛구역질을 할 것처럼 살짝 고개를 숙인 병사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퍼억!
그(프레야)는 바로 옆에 서 있던 동료를 주먹 한 방으로 깔끔하게 쓰러뜨린 뒤, 땅바닥에 머리를 박아 자기 자신도 기절시켰다.
“수고했어.”
아무리 경계가 삼엄해도, 기나긴 북부 전선 전체를 빈틈 하나 없이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덕분에 멀찍이서 그것을 보고 있던 스테치와 나머지 두 사람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빠르게 방책을 넘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턴 말을 타고 가자.”
전선 기지의 구조를 훤히 꿰고 있던 마르크 덕분에, 스테치와 엘레나는 길을 헤매거나 들키는 일 없이 곧장 마구간을 찾아냈다.
“긴장돼?”
스테치는 말안장에 짐을 올려놓으며 엘레나에게 물었다. 어둠의 숲으로 가겠냐는 제안에 동의한 뒤로, 엘레나는 꽤 오랫동안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뭐, 그런 것도 있고요.”
사실 엘레나는 긴장보다도 걱정이 더 앞서고 있었다.
어둠의 숲을 떠나던 그 날, 가족들은 은혜를 갚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여 스테치와의 동행을 허가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스테치가 베네지아 왕가를 상대로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을 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쉽게 그녀를 보내 줬을까?
‘집으로 돌아가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텐데.’
대답을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추궁받을 거고, 하면 하는 대로 걱정할 게 뻔하다.
‘아빠한테는 뭐라고 변명하지…….’
* * *
어둠의 숲의 외곽 지역.
나무 위 가지에 걸터앉은 한 엘프 남성이 가방에 들어 있던 무언가를 꺼내 허벅지 위에 펼쳐 놓았다. 잎사귀와 끈으로 잘 포장된 그것은 두툼한 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샌드위치. 한 입 크게 베어 물려는 순간, 뒤에서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크레일, 교대 전까지 식사는 금지일 텐데?”
“어차피 요즘엔 이 근처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더만, 이 정도는 괜찮잖아? 난 배고프다고.”
크레일은 동료인 토루빔의 말을 무시하고선 맛있게 샌드위치를 씹어 먹었다. 그러자 토루빔은 크레일의 옆에 앉아서는 말했다.
“바깥에 정찰 나갔던 애들 말 못 들었어? 요즘 인간들 동향이 심상찮아 보인다던데.”
엘레나의 호위 역이었던 크레일과 토루빔은, 그녀가 떠난 이후 숲 외곽 쪽의 감시를 담당하게 되었다. 자연히 두 사람은 숲 바깥으로 외부 물자를 조달하러 나가는 엘프들과 말을 섞을 기회가 많아졌는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내용투성이였다.
인접국인 베네지아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툭 하면 사형대에 걸어 둔다는 소문. 거기다 병사들의 대규모 이동까지.
다행히도 베네지아 왕가는 엘프들이 자신들의 문제와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둠의 숲으로는 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명분과 여력만 충분하다면, 베네지아가 평소 눈엣가시였던 어둠의 숲 엘프들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넌 잘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찰싹!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겼지만, 크레일은 아랑곳 않고 샌드위치를 끝까지 먹어 치웠다.
“하여튼, 너란 녀석은…… 응?”
토루빔의 기다란 귀가 쫑긋거렸다. 막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 내던 크레일도 이상을 감지했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로 돌려 멨던 활을 천천히 끌러 내렸다.
“누군가 온다.”
잠깐 동안 평온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심장이 펌핑 하면서 전신으로 흘려보내는 혈기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크레일과 토루빔은 각자 다른 나무로 위치를 옮긴 다음, 적당한 포인트를 잡아 몸을 숨겼다.
‘셋?’
‘말을 타고 있다.’
수신호로 정보를 주고받은 두 사람.
토루빔이 품에서 단안경을 꺼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살펴보고 있는 동안, 크레일은 화살 하나를 꺼내 활시위가 팽팽해지도록 당겼다.
“허?”
아래쪽을 살피던 토루빔은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남자가 둘, 여자가 하나. 그중에서 여자는 토루빔과 정확히 눈을 마주친 채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 위치가 들켰나~ 하는 생각을 품기도 전에, 낯익은 얼굴을 먼저 확인한 토루빔은 크레일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야! 크레일!”
“어? 우왓!”
갑작스런 부름에 집중이 흐트러진 크레일은 놓치려던 시위를 황급히 다잡았다.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고 고개를 돌려 보니, 토루빔은 이미 나무 아래로 훌쩍 내려간 상태였다.
“엘레나 님!”
말을 탄 여성 앞에 부복한 토루빔. 그는 엘레나가 숲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고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기나긴 여정으로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해지고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틀림없는 엘레나 드레이노어였다.
“헉!”
뒤늦게 그녀를 알아본 크레일도 마찬가지로 머리를 숙였다.
“오래간만이네. 두 사람 모두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고향 사람을 만난 게 그녀도 내심 기뻤는지 밝게 웃으며 답했다. 뒤에서 멀뚱멀뚱 쳐다보던 스테치를 발견한 두 사람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엘레나 님을 무사히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아텔리어 님!”
“어…… 응, 그래.”
엘프들 입장에서 이런 대우는 당연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스테치에겐 영 어색하고 낯간지럽기만 할 뿐이었다.
“저쪽은 누굽니까?”
토루빔과 크레일의 시선이 마르크에게로 향했다. 척 보기에도 범상찮은 풍채에, 안대까지 찬 우락부락한 스카 페이스까지……. 엘레나가 적당한 핑계를 대지 못하고 어버버 하는 사이, 스테치가 재빨리 나서서 대신 답했다.
“그, 이 사람은 내 친구야. 용병 일을 하고 있는데 나랑 아주 친해!”
“?”
마르크가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지만, 스테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인종 차별이 쩔어 주는 국가인 베네지아에서 장군을 해 먹었다든가 하는 소리를 꺼냈다간, 엘프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습니까…….”
그럭저럭 납득했는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이 보시면 정말 기뻐하실 겁니다.”
“엘레나 님은 이제 완전히 마을로 돌아오시는 건가요?”
크레일의 질문에 엘레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는 건 아니니까.”
크레일이 남아서 경비를 계속 서는 동안,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려 토루빔을 따라 마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의 분위기는 토루빔과 크레일이 보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엘레나와 스테치를 알아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 머리를 조아렸고, 그들의 방문 소식은 빠르게 장로의 귀까지 전해졌다.
“엘레나!”
케인이 엘레나를 부르며 걸어오자, 엘레나는 짐을 전부 내팽개치고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스테치는 그가 목발이나 다른 사람의 보조 없이 혼자 힘으로 걷고 있음을 눈치채곤 미소를 지었고, 케인도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돌아왔다.”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엘레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하하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좀 씻어야겠구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엘레나는 케인을 두 손으로 확 밀쳐냈다. 여정이 길어지면서 제대로 씻질 못했는데, 하필이면 그 상태로 케인이랑 마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두 시간 정도 지나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세 사람은 전신에서 뜨끈한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장로가 거주하는 곳으로 올라갔다.
“편히들 앉아라. 조금만 기다리면 식사도 준비될 거다.”
스테치와 마르크, 그리고 엘레나와 케인이 각각 접객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앉았다.
“할머니는요?”
엘레나는 장로나 장로의 후계자임을 증명하는 유물 목걸이가 케인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곤 물었다.
“일은 이제 그만두고 자택에서 편히 쉬고 계시지.”
앞서 장로직을 맡고 있던 엘레나의 할머니, 올리비아는 자리를 케인에게 넘겼다고 한다. 본디 엘레나가 이어받아야 할 직책이었지만, 케인이 버젓이 살아 있으니 이는 당연한 절차였다.
“그런데…… 제법 거창한 무장들을 하고 있더구나.”
그 말을 들은 엘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움츠렸다. 실제로 케인이 본 세 사람의 장비는 일반적인 모험가보단 거의 역전의 용사에 가까웠다.
“……많은 일들이 있었죠.”
스테치의 말을 들은 케인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지금껏 바깥에서 뭘 하고 지냈니? 숲을 떠나고서 이제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잖아. 네 할머니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셨는지 원…….”
“잘! 잘 지냈죠, 네.”
평소답지 않게 어색하게 말하는 엘레나. 케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엘레나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기 딸이 목숨을 위험에 빠뜨려 가면서까지 남의 뒤를 따라다니는 걸 두고 볼까?
“흐음…….”
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깥세상에 나간 이상, 네가 100퍼센트 안전한 생활을 하고 다닐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아. 원하지 않는다면 말 안 해 줘도 상관없다. 하지만 항상 조심, 또 조심해라. 내 말 잘 알아들었지?”
“네.”
대충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엘레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집에 완전히 돌아올 생각…… 인 것 같지는 않고. 잠깐 쉬었다 가려고 들른 거니?”
“예. 엘레나가 한 번쯤 돌아오고 싶어 했거든요. 며칠 정도 여기서 좀 지내도 될까요?”
스테치는 그동안 남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당분간 안전한 장소를 거점으로 삼고 정보 수집에 주력할 생각이었다.
“그래. 원하는 만큼 머무르거라.”
스테치는 어쩐지 케인이 뭔가를 눈치챘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맛있는 요리가 줄지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한동안 식사를 즐기느라 방금까지의 이야기를 잠시 접어 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스테치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시죠?”
“나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는 다름 아닌 케인의 것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