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58)
157화에 계속 –
157화 감춰진 역사
“헉…… 헉…….”
털썩!
연병장을 돌다 지친 병사들이 차례로 하나둘씩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금속 갑옷으로 완전 무장을 한 상태임을 감안하자면, 그래도 꽤 선전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선두를 유지하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제라드 메서였다.
“일어서라! 베네지아의 수도를 지킨다는 병사들의 체력이 고작 이 정도인가!”
제라드의 일갈이 들려왔지만, 한번 바닥에 주저앉은 병사들은 거친 숨만 몰아쉬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나마 그의 거침없는 페이스를 조금이나마 따라잡는 사람은 발스톡과 캐슬 브랜든의 경비대장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쭉쭉 앞으로 나아가던 제라드는 기어이 다른 사람들보다 한 바퀴 정도 거리를 더 벌리고 나서야 멈췄다.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쫓아오던 발스톡과 경비대장도 서서히 속도를 낮췄다.
‘이건 말도 안 돼.’
발스톡은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새 팔을 얻고 재활 훈련을 하기 전까지의 제라드는,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탓에 근육이 몽땅 빠져 체력이 일반인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해 버렸었다.
그러나 고작 1개월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지금의 제라드는 오히려 팔을 달기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만약 병사들이 보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경비대장과 발스톡도 진작 바닥에 드러누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젠장!”
바닥에 깔린 모래를 거칠게 발로 차 버리는 제라드. 그가 하릴없이 연병장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그는 북방장군직에 재임명되자마자 북부 전선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그러나 카델트 대사막을 둘러싼 마력 폭풍의 소멸, 그리고 첫째 왕자의 행방불명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연달아 터지면서 대기하라는 왕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제라드는, 그것을 훈련이라는 명분으로 한껏 풀어내는 중이었다.
“성질 한번 더럽네.”
“좀이 쑤시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우리들을 들들 볶을 필요는 없잖아.”
잔뜩 목소리를 낮춘 병사들의 투덜거림이 발스톡의 귓가를 맴돌았다. 순간 욱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뭐라 할 수도 없는 것이, 실제로 그들이 방금 끝낸 체력 훈련의 강도는 통상의 배 이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저들처럼 지쳐 쓰러지는 게 당연한 것이다.
‘이건 역시 왕자님께 나중에 한마디 해 두는 편이…….’
발스톡이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갑자기 연병장 바깥에서부터 사람 하나가 뛰어왔다.
“왕자님!”
미리 차가운 물에 적셔 두었던 수건으로 몸을 닦아 내던 제라드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제라드는 수건을 의자 위에 거의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선, 왕을 알현하기에 앞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훈련했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몸을 깨끗이 씻은 제라드는 병사의 안내를 받아 왕성의 어디론가 향했다.
“……응?”
여기는 알현실로 가는 길이 아닌데? 평소와는 전혀 다른 쪽으로 꺾여 들어가게 된 제라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성 내부의 복잡한 길목을 지나, 그는 이윽고 왕의 개인 집무실에 다다르게 되었다.
“셋째 왕자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와라.”
방문을 열자, 마침 창밖을 내다보던 신체루스가 그를 맞이했다.
“여기는…….”
제라드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왕의 개인 집무실에 들어와 본 적은 왕자인 그조차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인 집무실이라니. 우리 삼형제 중에서는 알프레드 정도나 몇 번 와 봤으려나? 아니, 그것보다도 애초에 아버지가 굳이 여기로 날 부른 이유는…….’
이곳은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소수의 방들 중 하나.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나 초대받은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접근 불가능이다.
즉, 왕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제라드밖에 없으며, 그만큼 지금부터 나올 이야기가 남의 귀에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뜻.
똑똑-.
“들어와라.”
병사들이 비켜서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외눈 안경을 쓴 알프레드가 들어왔다. 그는 방 안에 먼저 와 있는 제라드를 보더니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고, 제라드는 약간 허탈한 감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알프레드도 제라드처럼 갑작스럽게 불려 나왔긴 마찬가지였는지,
“무슨 일로 저희들을…….”
“지금 네놈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확실히 알려 주마.”
한낱 노인에 불과했던 왕의 입에서, 날카롭고 묵직한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두 왕자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목소리가 바뀐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갑작스럽게 반전된 방 안의 분위기에 알프레드와 제라드는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만 같았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아버지가 저런 모습을 내비치시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알 수 없는 압박감에 두 사람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제라드.”
“예, 예!”
갑작스런 호명에 제라드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깐이라도 잘못 입을 놀렸다간 큰일 날 것이라고, 자신의 본능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너는 지금 네가 상대하고 있는 적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질문. 순간 제라드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스테치 아텔리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녀석이 가진 아티팩트 말이다.”
신체루스의 말에 제라드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알프레드는 처음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선뜻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해했지만, 제라드의 반응을 보고서야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식은땀을 흘렸다.
“그걸, 어떻게 알고……?”
스테치 아텔리어와의 기나긴 악연을 시작하게 된 계기. 그 아티팩트의 존재는 오직 제라드 본인과, 그를 따라나섰던 발스톡, 그리고 제라드에게 정보를 알려 주었던 알프레드 일당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아티팩트와 관련된 미래시는 왕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처음부터 손을 써 두었을 텐데?
그러자 신체루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는가, 가 아니지. 내가 필요했으니까 묵인해 주었을 뿐이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제라드가 충격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신체루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지? 끌고 갔던 부대를 전부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서, 아티팩트마저 다른 인간의 손에 넘겨줘 버리고 말았잖나.”
“그것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숨기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제라드가 애써 입을 열어 스스로를 변호했다.
“아티팩트를 착용한 자는 저주의 영향으로 죽게 된다는 미래시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제가 그 상황에서 무슨 선택을 했어야 옳았겠습니까?”
“멍청한 놈.”
잔뜩 실망한 신체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제라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건 저주가 아니다.”
“예?”
“그 아티팩트는 착용자의 의지를 시험한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내보이는 삶에 대한 갈망, 그리고 어떠한 고통도 뛰어넘는 집념. 만일 그 시험에서 자격을 증명했을 경우엔, 육신을 한번 불태우고 다시 재생시킴으로써 사용자를 아티팩트에 최적화된 몸으로 재구성시켜 준단 말이다. 네가 저주라고 말했던 그것은, 그런 메커니즘이다.”
제라드는 신체루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그, 그럼 제가…….”
“그래. 저주니 뭐니 하면서 남한테 떠넘기지만 않았어도, 그 아티팩트는 고스란히 네 것이 되었을 테지.”
털썩!
결국 제라드는 무릎을 꿇었다. 미래시의 잘못된 해석이 나비효과를 타고, 결국엔 사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오게 되었다고?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발생한 수많은 결과들을 떠올리며, 제라드는 혼란에 휩싸였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프레드가 살짝 손을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첫째, 아버지는 어떻게 손에 넣지도 않은 아티팩트에 대해 이렇게나 자세히 알고 계신 거지?
둘째, 그걸 원하시는 이유는?
“그-”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고 있다. 그 전에…….”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딱 잘라 버리는 신체루스.
“잠깐 역사 공부를 해 보도록 하지.”
갑자기 웬 역사? 알프레드는 신체루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그 정도로 왕의 심중을 읽어 내기란 불가능했다.
“지금부터 내가 해 줄 이야기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역사의 뒤편에 묻힌, 오직 소수의 후손만이 기억하는 이 세상의 진실이다. 왕에게서 왕에게로만 전해지는, 그런 이야기지.”
신체루스가 말했다.
“먼 옛날, 타고난 성정이 불손한 엘프들은 인간과의 영역 분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급기야 금단의 마법까지 사용해 대륙에서 인간을 아예 지워 버릴 수 있는 고대 유물들을 탄생시켰지. 하지만 다행히도 유물들이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이전에, 인간이 먼저 승리를 이룩했다. 유물들은 한자리에 모이지 않는 이상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책상 위에 놓인 수정구 위에 손을 얹었다.
스으윽-.
그러자 갑자기 왕이 앉아 있던 의자 뒤쪽의 벽이 조용히 열리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통로가 드러났다. 대체 이게 다 뭐지? 알프레드와 제라드가 머뭇거리자, 왕은 조용히 손짓해서 두 사람을 통로 안으로 들였다.
철그럭.
왕이 레버를 당기자마자 아래로 급하강하는 플랫폼. 두 왕자는 그제야 자신들이 승강기에 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쟁이 종결되고, 엘프들은 대륙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다시 재기를 꿈꾸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한편으로, 유물이 다시 사용될 수 없게 한 자리에 봉인해 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베네지아의 시조다. 하지만 그분께서도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지.”
신체루스가 승강기 위에 걸린 랜턴을 만지작거리자 불이 들어왔다.
“첫째. 유물들은 인간의 손으로 파괴하기엔 너무나도 강력해서, 봉인해 두는 게 고작이었다는 점. 그리고 둘째…… 바로 유물들 중에 가장 강력한 마지막 하나는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이라는 점.”
“서…… 설마?”
제라드가 입을 연 순간, 감춰져 있던 지하실이 드러났다.
지하실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둥근 세 개의 구체. 제라드와 알프레드는 지하실 안에 가득 차 있던 한기에 몸을 떨었다. 두 자식들을 지하실로 안내한 신체루스는 보란 듯이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래. 네놈이 놓친 바로 그 아티팩트가, 마지막 유물이었다. 그것만 있었더라면, 유물의 힘끼리 맞부딪쳐 소멸시킴으로써 이 지긋지긋한 숙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제라드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작게 신음했다. 당장 믿기 어려운 소리였지만, 눈앞에 있는 검은 물체들을 보니 마냥 불신하기도 힘들었다. 그만큼 구체들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강렬했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었다면 베네지아의 군사력을 동원해서 빨리 찾으면 됐을 것을…….”
제라드의 물음에 신체루스가 이죽거렸다.
“미래시가 있으니까, 유물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그 유물에는 위협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모습을 감추는 방어 기제가 있다는 점이다. 사용자에 적합한 인물을 선별해서 접근하지 않는다면, 다시 모습을 감추고 말겠지.”
신체루스는 지하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왕자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제라드, 왜 굳이 네가 가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이제 감이 오나? 삼 형제 중에서 삶에 집착하고, 끊임없이 투쟁할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자는 너 하나뿐이다. 그 거친 북부 전선을 장군으로서 활약하며 견뎌 온 네놈이니까, 믿고 맡긴 거였는데…….”
알프레드가 문득 고개를 돌려 보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제라드의 팔이 보였다. 그를 쳐다보는 신체루스의 눈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빠드득.
이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상황은 대체 뭐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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