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59)
158화에 계속 –
158화 오랜 벗
“아……. 그, 그게……,”
제라드는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 때문에 몸조차 제대로 가누기 힘들 지경이었다. 물론 당황스러운 건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프레드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고민하던 제라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신체루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심기를 거스르는 위험한 주제인 만큼 발언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그 말을 들은 제라드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끝났다.
아버지의 신뢰를 한번 잃어버린 이상 왕위에서 한참 멀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들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언제 무얼 빌미로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왕의 말은 제라드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아직은.”
제라드는 퍼뜩 고개를 들어 신체루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알프레드에게로 향해 있었다.
“‘아직’이라고요?”
왕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알프레드가 중얼거리자, 신체루스가 껄껄 웃어 댔다.
“고작 힐난하면서 벌이나 줄 것 같았다면 제라드에게 굳이 새 팔을 달아 줄 리가 없잖겠나?”
스윽.
그는 손가락을 들어 알프레드를 가리켰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서 짐이 가장 걱정되는 사람은, 제라드가 아닌 바로 너다.”
갑작스런 그의 말에 알프레드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젖어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행적을 되돌아보며, 혹시 스스로 잘못한 부분이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랍토레스? 어리석고 다혈질적이야. 제라드? 의지는 충만하지만 지혜롭지가 못하지. 하지만 이 둘은 너에게 없는 공통점이 있다. 그게 뭔지 아느냐?”
“……무엇입니까?”
“바로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신체루스가 말했다.
“왕이 될 재목으로써 필요한 재능은 탁상공론이나 숫자 놀음이 아니다. 그것도 중요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무엇보다 왕에게 필요한 덕목은, 스스로 변화를 주도하려는 의지다.”
왕의 재목이라는 말이 두 사람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다만 그 대목에서 알프레드는 불안을, 제라드는 호기심을 느꼈다는 차이가 있었다.
“랍토레스도 제라드도 본인들이 세운 목표를 이루는 데에 실패했지. 그래도 그것들은 최소한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는 것보단 낫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너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정도로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알프레드는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국정을 배우고, 베네지아를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왕국으로 한층 더 높이 격상시키기 위해 지금껏 노력해 왔다. 그런데 그 결과에 대한 대우가 고작 이런 홀대라고?
신체루스는 쐐기를 박아 넣듯 단언했다.
“좋은 위정자는 될 수 있겠지. 잘 쳐줘 봐야 재상이나 될까. 하지만 왕은 아니야. 왕을 보좌하는 것이 네 역할이다.”
“크윽!”
“자, 잠깐!”
알프레드는 화가 터져 나오기 전에 승강기로 되돌아갔고, 제라드는 깜짝 놀라 그런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렇게 아버지를 뒤에 남겨 둔 채 멋대로 승강기 레버를 작동시킨 알프레드는, 제라드와 함께 그대로 올라가 버렸다.
아무도 없는 지하실 안에서 홀로 남게 된 신체루스는, 검은 구체들을 손으로 훑었다.
‘……조금 무리를 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잘 넘어갔군.’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냉기가 손가락 끝을 타고 그의 체내로 흘러 들어왔다.
* * *
콰당탕!
“진정하세요, 왕자님!”
“아이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원…….”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겨도 알프레드가 도통 회의실에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관료들은 그를 찾아 왕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막 찾아낸 왕자는 자신의 방에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고 있었다. 다른 왕자들이라면 모를까, 침착함의 상징과도 같은 알프레드가 이성을 잃고 날뛰는 비현실적인 모습에 관료들은 덜컥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다들 나가! 어서!”
그를 붙잡고 있던 제라드가 손짓을 하며 소리를 질러 댔고, 관료들은 곧장 방을 나섰다. 방해꾼이 사라지자마자, 알프레드는 한층 더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크아악!”
제 분에 못 이겨 급기야는 괴성까지 내지르는 알프레드. 제라드는 이를 악물고는 알프레드의 멱살을 붙잡아 벽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쾅!
“형님, 정신 차리세요!”
“건방지긴! 훈수까지 둬야 할 정도로 내가 한심해 보이더냐?”
“실패나 좌절은 저도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형님만 힘든 게 아니에요!”
그 말을 들은 알프레드가 찢어 죽일 기세로 제라드를 노려보았고, 그는 보란 듯이 아티팩트로 대체된 자신의 오른팔을 들이밀며 말했다.
“제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는 어느 누구보다도 형님께서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러자 막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알프레드는 입을 콱 다물어 버렸다. 하기사 제라드가 다시 재기하기까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를 옆에서 전부 봐 왔던 그가, 이제 와서 화를 내면 그게 어린애 투정이 아니고 뭐겠는가.
“…….”
머리가 차게 식은 알프레드는 들고 있던 의자를 내려놓았다. 상대가 진정된 모습을 보이자 제라드도 옷깃을 쥐고 있던 손을 떼어놓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왕께서 내가 직접 나서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줘야지.”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라드는 진심을 담아 알프레드에게 경고했다. 과거 감비니 요새에서 맞닥뜨린 스테치 아텔리어의 힘은, 당시의 제라드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알프레드가 상대할 수 있을까? 게다가 지금은 동방장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알프레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괴물이랑 일대일로 싸우는 미친 짓은 하지 않는다.”
“혹시 잊었을까 봐 다시 말해 두지만, 저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수도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바람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건 신체루스의 지시가 떨어진 이상 제라드가 스테치를 찾아나서는 건 불가능했다.
“……네 도움을 받을 생각 따윈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어.”
알프레드가 말했다.
* * *
“아 힘들다. 너무 힘들어.”
그로부터 2주가 흘렀다. 클로드 마을을 떠난 스테치와 엘레나는, 수도 동쪽에 위치한 레지아 계곡의 험준한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블랙 마켓의 도움을 받아 스카이 걸킨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스테치는, 그 대신 자신 이외에도 누군가가 스카이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이 ‘누군가’가 전국 곳곳의 모든 블랙 마켓 지부들을 복잡하게 경유해서 의뢰를 걸어 둔 탓에, 달튼으로서도 이자의 위치나 목적을 가늠하기 매우 힘들었다는 것.
그러던 와중에, 메시지 하나가 블랙 마켓 연락망을 통해 스테치에게로 전해졌다. 자신의 행적이 추적당하고 있음을 알아챈 상대가 먼저 스테치를 레지아 계곡에서의 접선을 제안한 것이었다.
스카이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이상, 스테치가 손에 넣은 유일한 연결 고리는 그 메시지 하나뿐이었다.
“굳이 이런 장소로 불러낸 걸 보니 함정이 틀림없겠죠?”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던 엘레나가 물었다.
“그렇겠지. 응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끝인 거고, 응한다면 우리가 누군지 파악한 다음에 잡아 족쳐도 늦지 않을 거란 생각인가 보지. 그나저나 이거 어째 느낌이 영 이상하단 말야.”
스테치가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레지아 계곡은 가렛 일당이 아지트화 하겠다고 벼르던 장소. 혹시 그쪽하고 무슨 연관이 있으려나?
‘아니면 그냥 생판 모르는 놈들일 수도 있고.’
접선 장소는 레지아 계곡의 가장 깊은 곳. 지리적으로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은 장소다. 스테치는 이를 갈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비교적 말끔했는데, 지금은 웃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려 불쾌함의 극치였다.
‘이제 와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 봐라……. 보이는 놈이 누구건 싹 다 잡아 족쳐 버리겠어.’
『거참.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무임 승차자는 입 다물어라.’
그 말에 딱히 반박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던 프레야는 결국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음?”
수통의 물을 조금씩 들이켜던 엘레나가 귀를 쫑긋거렸다. 지쳐서 헐떡이는 와중에도 그것을 놓치지 않은 스테치가 넌지시 그녀에게 물었다.
“몇 명이야?”
“다섯…… 아니, 여섯이요.”
엘레나가 능선 위쪽을 올려다보자, 자그마한 인영 여섯이 다급히 머리를 낮췄다. 딴에는 나름 모습을 잘 감추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엘레나의 초인적인 감각을 속이기엔 턱없이 부족한 은신 능력이었다. 스테치는 태연하게 수통을 건네받아 물을 조금 들이마신 뒤, 검을 뽑아 들어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뭘 하려고 저러나 싶어 쳐다보는 프레야의 귀로, 스테치의 고함 소리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야아!! 되도 않는 기습 걸 생각 말고 빨리 덤벼라아아!”
온 계곡에 메아리치며 울려 퍼지는 목소리. 스테치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숨어 있던 여섯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아무런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슬슬 기다리는 것도 지쳐 가던 차에, 갑자기 후드를 쓴 누군가가 경사진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듯 타고 오기 시작했다. 돌부리에 걸려 굴러 내릴 뻔하면서도 재주껏 스테치와 엘레나의 앞까지 내려온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스테치에게 말했다.
“이런 세상에. 북부로 간 줄로 알고 있었는데, 여긴 또 언제 돌아온 거야?”
“……너 나 알아?”
스테치의 물음에 상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내가 누군지 기억 못 하는 거냐?”
“누군데?”
“셰일이다, 셰일! 피딩라인에서 한 번 봤었잖아!”
셰일이 누구더라? 스테치가 열심히 머릿속 기억을 헤집느라 눈살을 찌푸리자, 보다 못한 프레야가 대신 말해 주었다.
“그 왜, 가렛의 부하 중에 마법 쓰던 놈 있잖아.”
“아, 그 친구?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네.”
심한 말을 당사자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인 스테치는 그제야 반갑게 인사하며 물었다.
“오래간만이네. 설마 계곡에서 만나자고 한 놈이 너였냐?”
“어? 그럼 뭐야? 요 근래 우리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던 녀석이 너였어?”
스테치가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올려보니, 숨어 있던 이들 중 하나가 천천히 일어나며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쪽 눈에서 입술까지 이어지는 긴 흉터를 한 남자의 얼굴.
스테치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그에게 중지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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