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62)
161화에 계속 –
161화 그 여자
횃불. 그리고 그 빛을 받아 서슬 퍼렇게 번뜩이는 날붙이와 흑색의 갑옷들.
횡으로 길게 늘어선 병사들이 숲의 어둠을 가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본 토루빔은, 등골이 오싹한 나머지 스파이 글래스에서 눈을 뗄 수밖에 없었다.
“저 갑옷…… 베네지아 병사들인가?”
“왜 숲으로 오고 있는 거지?”
당황스럽기는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이 어둠의 숲 외곽 근처에서 기웃거렸던 적은 전에도 몇 번인가 있었지만, 저렇게나 대규모로 몰려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려는 노력은커녕, 보란 듯이 횃불까지 든 채 정면으로 다가오다니?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토루빔이었다.
그는 함께 있던 동료들을 쭈욱 돌아본 뒤, 발이 가장 빠른 사람 둘을 골라냈다.
“피트, 군토! 마을로 돌아가서 스트라이더들에게 통보해! 인간 병사 무리가 마을이 있는 쪽으로 접근 중이라고!”
탓!
망루에서 뛰어오른 두 사람은 이내 나뭇가지와 수풀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나머지 동료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며 물었다.
“우리들은 어쩌지?”
“함부로 공격하지 말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뒤로 빠진다. 지금 당장 우리가 지형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해서, 이 쪽수로 무작정 덤벼들었다간 개죽음당할 게 뻔해.”
“그래. 보기보단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나.”
오싹!
귓가를 간질거리며 파고드는 여성의 목소리.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감각에 소름이 돋은 토루빔은 본능적으로 망루 바깥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와 동시에 그가 서 있던 바닥으로부터 날카롭게 굳혀진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푸슉!
“으아악!”
반응하는 것이 한발 늦었던 다른 엘프들은 검은 그림자에 인정사정없이 꿰뚫렸다.
“윽!”
콰당탕!
붙잡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타박상을 입긴 했지만, 토루빔은 그럭저럭 지상으로 내려앉는 데에 성공했다. 위를 올려다보자, 시커먼 그림자가 폭발함과 동시에 망루가 완전히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폭발의 여파로 토막 나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육편과 피. 토루빔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넋을 잃어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동료들이, 이제는 다진 고깃덩이만도 못한 꼴이 되어 지면을 나뒹굴고 있었다.
“우웁!”
갑자기 밀려오는 구토감. 결국 토루빔은 그대로 땅에 엎드린 채 토악질을 해 댔다.
사박-. 사박-.
잡초를 지르밟는 발소리. 헐떡이는 토루빔에게 다가온 누군가는, 턱밑으로 레이피어를 들이밀어 강제로 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으윽, 냄새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차가운 인상의 여성, 이드릴 헨리에타는 토루빔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마을은 어디 있지?”
“…….”
펑!
매캐한 검은 연기가 토루빔의 손아귀 안에서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퍼져 나간 먼지구름이 그의 몸을 덮었고, 이드릴은 재빨리 레이피어를 찔러 넣었다.
잠시 후, 연기가 걷히고 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짜증스럽게 손을 저어 남은 먼지를 치워 낸 이드릴은, 레이피어 끝에 새빨간 피가 묻어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중얼거렸다.
“피 색깔은 인간하고 똑같네. 기분 나쁘게.”
“장군! 괜찮으십니까?”
뒤따라오던 부대의 지휘관이 그녀를 불렀다.
“당신이 걱정해야 하는 건 내 안위가 아니라 작전의 성공 여부야. 기름통은 준비됐어?”
“예.”
“좋아, 시작해.”
이드릴의 말을 들은 병사들은 세워 둔 수레에 실려 있던 커다란 배럴들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안에 담겨 있는 것은 타르처럼 까맣고 끈적이는 액체였다. 병사는 양동이를 담가 내용물을 한껏 퍼낸 뒤, 거대한 나무 기둥에 바르기 시작했다.
일련의 작업이 끝나자, 이드릴은 병사에게서 넘겨받은 횃불을 액체 바른 나무에 휙 던졌다.
화르륵!
나무 전체를 잡아먹을 기세로 집어삼키는 불길을 바라보며, 이드릴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아, 얼른얼른 튀어나와라…….”
* * *
훈련을 마치고 개운하게 목욕까지 끝낸 마르크는 창가에 앉아 사과를 씹어 먹던 도중,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비명 소리에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불?”
무시무시한 크기로 치솟아 오르는 검은 연기와, 그 밑에서 퍼져 나가는 화염.
‘나와 엘레나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이 마을을 지켜 줘.’
마침 스테치의 경고 겸 부탁도 있었겠다.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마르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패를 걸치고 방문을 열어 재꼈다.
“불이야!”
마을은 패닉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마르크는 불길이 번져 오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고, 이내 완전 무장 상태로 대기 중인 스트라이더 그룹을 발견했다.
“아, 당신이군.”
각반과 보호구를 장착 중이던 에이바가 마르크를 알아보곤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인가?”
“보면 몰라? 불이 났잖아.”
“불이 났는데 왜 무기를 챙기냐는 말이었다.”
마르크의 질문에 에이바가 말했다.
“이 숲의 나무들은 일반 수종에 비해 질기고 억세서 어지간해선 불이 붙지 않아. 그런데 저 정도로 심한 화재가 발생했다면…… 분명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저지른 일임에 틀림없어.”
에이바는 화살통에 화살을 채워 넣었는데, 그 굵기나 길이가 거의 창대만 했다.
“나도 가겠다.”
“마음은 고마운데, 미안하지만 별로 할 일은 없을 거야. 어차피 불은 마법으로 꺼야 하는데 당신은 마법사도 아니잖아? 게다가 상대가 누구건 간에 이 숲에 들어온 이상 우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놈은 거의 드물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마르크에게, 에이바는 한숨지으며 말했다.
“이미 선발대까지 다섯 명 정도 보내 놨어. 어지간하면 그쪽 선에서 전부 다 해결하겠-”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마르크의 옷깃을 붙잡았다. 마르크가 뒤를 돌아보자 헐떡이고 있던 두 명의 엘프가 말을 꺼냈다.
“적습입니다. 베네지아 병사의 적습이요……!”
그의 말을 들은 에이바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너는…… 외곽 경계를 서던 경비 요원이군. 오는 도중에 선발대랑 마주치진 않았나?”
“예, 예. 일단 제가 본 건 전부 말해 두었습니다.”
“그나마 그건 다행이군. 베네지아 병사라고 했지?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많아요.”
“……이런.”
그 말을 들은 에이바의 표정이 처음으로 심각해졌다. 아니, 비단 에이바뿐만이 아닌 다른 스트라이더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어둠의 숲은 베네지아 왕국에 있어 계륵 같은 영역으로 존재해 왔다. 눈엣가시 같은 엘프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자니, 들어가는 수고나 그를 통해 얻게 될 성과를 따져 봤을 때 수지타산이 전혀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병사들은 그 숫자가 전례 없을 정도로 대규모인 데다, 잘 타지도 않는 나무에 구태여 불까지 붙여 엘프들을 압박해 왔다.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베네지아 왕가가 이번엔 작정하고 숲과 엘프들을 지워 버리려고 마음먹은 게 명백해 보였다.
“이거 설마 베네지아 왕국이 우리한테 전면전을 걸어온 건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추측성 발언이었다. 하지만 감히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자이드, 다른 마을로 메시지 보내 놨어?”
“진작에 했지. 그치만 과연 그쪽에서 지원이 오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어둠의 숲은 그 크기가 매우 넓은 데다 스트라이더들도 곳곳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마을까지 오는 데엔 최소 한나절 가량이 걸린다.
“진격을 얼마나 늦춰 놓는지가 관건인가…….”
개개인의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머릿수가 이만큼이나 차이 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스트라이더들이 고민하는 사이, 마르크는 소식을 전달해 준 엘프에게 물었다.
“뭔가 기억에 남는 건 없었나? 문장이라든가, 지휘관의 성별이나 특징 같은 것 말이다.”
“문장은 없었어. 갑옷도 까맣게 물들였고.”
엘프들을 상대로 지나치게 신중한 거 아닌가? 마르크는 혀를 찼다.
“지휘관이 누군지는 우리도 몰라. 그…….”
“여자다.”
난데없이 대화에 끼어든 이는 다름 아닌 토루빔이었다. 그는 크고 작은 생채기와 더불어 한쪽 어깨에 끔찍한 관통상의 흔적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를 알아본 스트라이더 하나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자네, 무사했군! 나머지 외곽 경비들은 어떻게 됐지? 선발대와 합류했나?”
“선발대는 잘 모르겠고, 여기로 보낸 이 두 사람을 빼면 남은 경비 요원은 저 하나뿐입니다. 모두가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해 보고 죽어 버렸죠.”
안 그래도 무겁던 분위기가 더더욱 무거워졌다. 잠시 후,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마르크가 입을 열었다.
“적은 지금 어디에 있지?”
“여기서 대략 15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마을 위치를 알아내는 게 쉽진 않은 데다, 방금 말한 선발대가 교란해 준다면 여기까지 금방 오진 못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너무 부족해.”
“마을 사람들은?”
“장로님의 지시로 최대한 빨리 다른 마을에 피신시키고 있는 중이야.”
마르크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마을 인구의 절반가량이 집을 비워 둔 상황이었다. 케인의 판단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일이 훨씬 더 골치 아파졌으리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우리도 빨리 가서 놈들을 쳐 죽여야지!”
옆에서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스터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자 마르크는 한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제지하고 나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정보는 하나도 남김없이 숙지해 둬야만 한다. 잠깐만 시간을 다오.”
그러더니 마르크는 토루빔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까, 적 지휘관은 여자라고 했지. 뭔가 다른 특징은 없었나? 사용하는 무기라든가, 말투라든가?”
마르크는 베네지아의 장군 출신으로서 어지간한 지휘관급 인물들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다.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자가 누군지만 알면, 놈의 성격이나 습관을 이용해서 허를 찌르는 것도 가능했다.
토루빔이 말했다.
“무기는 지금도 기억난다. 레이피어를 썼었지.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묘한 능력을 사용했다. 그것 때문에 내 동료들이 전멸당했어.”
레이피어?
마르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레이피어는 전쟁터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의 무기였다. 굳이 이런 곳에 그런 무기를 들고 올 이유가 있나?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마르크는 다음 말을 재촉했다.
“무슨 능력이었지?”
“새카만 기운…… 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군. 살짝 그림자 같기도 하고.”
거기까지 들은 마르크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여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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