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178)
177화에 계속 –
177화 성전
“음.”
왕좌에 앉아 있던 신체루스가 고개를 까딱이자,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걸어 들어왔다.
끼이익-.
서방장군, 이드릴 헨리에타였다.
앞에서 무릎을 조아린 그녀가 막 무어라 말을 꺼내기 직전, 왕이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실패했나?”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어둠의 숲 정벌에 대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드릴은 그저 이를 앙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심과 실책. 두 가지가 겹치면서 만들어 낸 완벽한 패배였다. 왕은 지금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그녀는 밀려오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결과로군.”
주어진 병력의 수도, 무장의 질도 충분했다. 게다가 이드릴 헨리에타는 장군 클래스의 아티팩트 유저. 고작 어둠의 숲 엘프들을 처리 못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유를 설명해 보아라.”
변명의 기회가 주어지자, 이드릴은 그제야 말했다.
“동방장군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동방장군, 마르크 맥도웰. 실종되었다던 그가 엘프들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호.”
이건 신체루스조차도 예기치 못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드릴의 말을 듣고 나니 비로소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마르크 맥도웰은 이드릴 헨리에타의 약점을 정확히 찌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게다가 그의 무력은 일개 병사들 따위가 어떻게 대처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또한 거기에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엘프들까지 가세했으니, 이드릴이 밀리는 것도 이해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군. 동방장군의 배신이라…….”
사실 신체루스는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첫째 왕자에게 동방장군을 붙여 준 것도 그의 판단이었고, 그의 사상이나 성격에 대한 것 또한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왕가의 품에 묶어 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떨어져 나가는군.”
“예?”
“아니, 이쪽의 이야기다.”
신체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현시점을 기해 마르크 맥도웰의 장군 직책, 그리고 귀족 작위를 박탈시키겠다. 그는 이제부터 나라를 등진 적이자 배신자다.”
“예.”
“수고했네, 헨리에타 장군.”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온전하게 수습해서 돌아온 것. 그리고 마르크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돌아온 것이 왕의 기분을 풀어지도록 만드는 데에 크게 한몫한 모양이었다.
이야기가 나쁘지 않게 흘러가자, 들릴락 말락 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좋아라 하던 이드릴은 잠시 후 알현실을 나왔다. 입구 쪽에서 기다리던 부관이 그녀를 맞이했고, 두 사람은 왕성의 복도를 걸어갔다.
문득 이드릴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폐하께서는 스테치 아텔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시지 않는 거지?”
정신이 없어서 깜빡하고 말았지만, 가만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어둠의 숲으로 간 진짜 목적은, 베네지아 왕국의 범죄자인 스테치 아텔리어를 색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신체루스는 그에 대한 질문은 단 하나도 하지 않고 대면을 끝내 버렸다.
어째서지?
그러자 옆에서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부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군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요, 그게 실은 며칠 전에…….”
“음?”
부관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더니 간신히 그녀에게 소곤거렸다.
“계곡에서 병사들이 돌아왔는데, 그게…….”
잠시 후, 녹터널의 능력으로 왕성의 연병장까지 단숨에 도약한 이드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부관의 말대로 텅 비어 있어야 할 공터가 새하얀 천막들로 가득한 것이었다.
“이게 정말로……?”
이드릴은 레지아 계곡에서 돌아온 병사가 고작 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 비하면 둘째 왕자는 훨씬 더 많은 병사들과 마법사, 심지어는 마법포까지 동원해서 계곡을 기습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드릴과 정반대였다.
“으으…… 팔…… 팔 아파…….”
이드릴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막 안에 드러누운 병사들이 있지도 않은 팔과 다리의 환상통(幻想痛)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아무리 회복 물약의 효과가 강력해도, 통째로 결손 된 신체 부위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저들은 평생을 저렇게 살아가야겠지.
“……시발.”
급기야 이드릴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부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레지아 계곡으로부터 돌아온 패잔병들은 둘째 왕자와 부관의 목이 든 목함을 셋째 왕자에게 건네주었다고 한다.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셋째 왕자가 무슨 반응을 보였을지는 뻔했다.
이 정도로 대형 사고를 칠 만한 놈은 이 나라에 한 놈뿐이다.
스테치 아텔리어.
이드릴은 그제야 비로소 왜 왕이 자신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악마가 따로 없군.’
어둠의 숲에서 왕성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차라리 마르크가 아닌 스테치 아텔리어와 싸웠다면 자신이 이겼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녀는 지금,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여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드릴은 조금 전에 만나 뵈었던 왕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현실을 떠나기 직전에 본 신체루스의 표정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평온했었다.
‘왜지?’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 * *
“『그런데 너희 둘은 정말 연인이 맞느냐?』”
다음 날.
엘레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스테치는, 뜬금없는 제삼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접시로 향해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수프를 떠먹던 엘레나의 머리카락은 파랗게 물들여져 있었다. 곧 눈앞의 상대가 데스트라임을 눈치챈 스테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이야기를 누구한테서 들었나요?”
“『엘레나한테.』”
데스트라는 그렇게 답하며 싱긋 웃었다.
눈을 감기 직전의 그녀에게 말을 걸어 주었던 한 청년, 엘나릴 폰드 드레이노어. 엘레나가 그의 먼 후손이라는 걸 알게 된 덕분인지, 데스트라는 짬이 날 때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시는데요?”
데스트라의 시선에서 모성애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인지한 스테치는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아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처음에는 즐거웠다. 요즘 날의 인간과 엘프들은 사이가 무척 좋지 못하다고 들었는데, 설마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사랑이 싹트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거든. 그래서 하루 종일 둘이서 뭘 하나 지켜보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그럴싸한 행위는 단 한 번도 하질 않더구나. 끽해 봐야 잠자기 전에 키ㅅ-』”
“아이고! 제발 프라이버시 좀!”
스테치는 온몸을 비틀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 프레야조차도 이런 식의 참견은 안 한다.
“『정 그렇다면야, 알겠다.』”
즐거운 아침 식사 시간이 불편한 순간으로 돌변해 버리자, 스테치는 접시 위에 남은 음식들을 싹싹 긁어 먹은 뒤 방을 나가 버렸다. 막 아지트로 되돌아온 가렛이 그와 마주치더니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어때?”
“쥐 죽은 듯이 조용해. 젠장.”
둘째 왕자를 격퇴하고 데스트라를 깨운 이후로 벌써 2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렛은 한동안 적의 보복이 올까 두려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도의 움직임을 주시했지만, 예상외로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자 곧 포기해 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도 이렇게 조용한 건 처음 봐. 정말 베네지아의 왕은 피도 눈물도 없는 건가?”
“그냥 그 왕이 특이한 거라니까.”
스테치의 말에 가렛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는 동안, 작업실에서 한창 일하고 있던 스카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바깥에 뭐가 그렇게 소란이야?”
“아무것도 아냐. 그건 그렇고, 슬슬 우리도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무슨 일인데?”
가렛은 말없이 스테치와 스카이를 데리고 커다란 남부 대륙 지도가 펼쳐진 방에 들어갔다. 가렛은 손가락으로 계곡 서쪽에 위치한 베네지아 왕국의 수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왕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려고 패잔병한테 선물까지 쥐여 줘서 돌려보냈는데, 현명한 건지 또라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단 말이지. 병사들까지 수도에 집중시켜서 왕성의 경계 수위는 그야말로 철벽이고. 그 틈바구니로 파고들려면, 어거지로라도 빈틈을 만들어 내야만 해. 좋은 아이디어 있어?”
스테치는 잠시 고민하더니 가렛에게 손짓했다.
“내가 저번에 북부하고의 연락망을 유지 중이라고 이야기했던가?”
“응? 아아, 그랬었지.”
스테치는 아직도 배낭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는 수정 구슬을 떠올렸다. 북부 대상인 가문의 후계자, 카시아가 건네주었던 통신용 수정구였다. 사용 가능 횟수가 많이 남아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관 중이었다.
“그걸 사용해서 북부에 도움을 요청하자.”
스테치가 말했다.
“남부 전체가 적으로 돌아선 지금, 우릴 위해 움직여 줄 수 있는 곳은 북부뿐이야.”
“그 먼 사막을 건너서 여기까지 도와주러 올 미친놈들이 대체 누군데?”
스카이가 물었다.
“엘프들.”
“……아.”
스테치의 대답에 스카이는 반박조차 못 하고 납득해 버렸다.
케일럼의 엘프들은 충분히 베네지아의 이목을 끌고도 남을 만큼, 북부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력한 세력. 전력으로서는 차고 넘치는 데다, 특기인 마법을 사용하면 사막 정도는 비교적 쉽게 건너올 수 있다.
게다가 아무리 북부와 남부의 간극이 넓다 한들, 이쪽은 충분히 그들을 남부까지 불러들일 만한 재료들을 가지고 있었다.
“여신님을 이용할 생각인가?”
“어감이 어째 좀 그렇다? 차라리 마왕을 물리치는 성전을 벌일 계획이라고 말해 주라.”
스테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신 데스트라의 부활.
케일럼의 엘프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아치발의 신자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시무스 의장이 그들의 진짜 계획마저 알게 된다면?
“단순히 누굴 이용해 먹고 말고의 문제가 아냐. 어차피 우리가 베네지아의 왕을 막지 못하면, 언젠가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거라고. 이제 와서 수단이나 방법을 가릴 여력은 없어.”
스테치의 말에 사뭇 진중해진 가렛과 스카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바로 움직이자.”
짝!
스테치가 손뼉을 쳤다.
“스카이, 놈들한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물건 하나 준비해 줘. 가렛, 너는 계속해서 수도에서의 동향을 살펴보고 있어. 나는 엘레나랑 같이 북쪽으로 연락을 취해 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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