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204)
203화 8년 뒤 (3)
촤악!
검이 깔끔하게 프라이멀의 모가지를 베어 넘기자,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손놀림에 감탄했다.
검도 마법도 8년 전에 모두 내려놓은 지 오래.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검을 쥐었는데, 몸은 아직도 어떤 식으로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무기의 차이라는 건 역시 어마어마한 거구나.’
할로우 블레이드와 같은 명검 중의 명검을 쓸 때는 그냥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알아서 적들이 픽픽 쓰러졌지만, 이 강철검은 다르다. 어디를 베어야 뼈에 걸리지 않는지, 어디를 찔러야 한 방에 절명 시킬 수 있는지를 감안해야만 한다.
스테치는 그간 몸에 익혀 온 감각, 그리고 던전 탐험가로서 몬스터를 썰어 온 경험을 모두 동원하여 싸우고 있었다.
“하앗!”
프레야의 손아귀가 프라이멀의 안면을 덮는 순간, 퍼석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사과처럼 으깨졌다. 그녀는 그대로 프라이멀을 풍차처럼 빙빙 돌리더니 호시탐탐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던 그레이트 울프 무리 한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콰광!
마법을 봉인한 스테치가 조금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프레야와 그는 함께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훌륭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되레 밀어내고 있었다.
‘스트라이더가 아닌데도 저 정도면 꽤…….’
‘잘 싸우는군. 정말로.’
제스터와 에이다는 스테치가 본격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8년 전 그가 처음 숲으로 찾아왔을 때에나 조금 본 것이 전부. 하지만 엘프들은 모두 그가 대륙을 구한 영웅이라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야기는 듣기만 해서는 모르는 법.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은근히 스테치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있었다. 프레야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인 걸 감안하면 그는 아주 잘 싸우는 축에 속했다.
벽을 연상케 하는 마르크 맥도웰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경험의 차이를 고려해 보면 스테치 쪽이 오히려 더 압도적으로 강하다. 아마 시간이 더 흐르면 마르크 ‘정도’는 그냥 이겨 먹지 않을까.
‘본래의 힘을 회복하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지는데.’
제스터는 프라이멀의 가슴팍을 발로 쳐 밀어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파지직!
“크아아악!”
《테슬라》 오브에 감전된 프라이멀이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그건 그렇고 이 마법, 적이 다가오기만 하면 알아서 쓰러뜨려 주니까 엄청나게 편하다. 덕분에 그들은 뒤나 옆을 신경 쓰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적만 처리할 수 있었다.
“와 볼 테면 더 와 봐라! ……아니, 생각해 보니까 오지 마라!”
호기롭게 외치던 스테치는 프레야의 미묘한 눈빛에 움찔하며 말을 바꾸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 그의 몸 상태는 위험한 수준에 임박해 있었다.
마력 고갈은 즉,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
안 그래도 총 마력량이 적어져서 허덕이고 있는데 마법까지 펑펑 써 대니, 스테치로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빠.’
그런 그의 등을, 딸인 알레시아가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스테치와 프레야가 합류한 직후부터 싸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비록 상황이 좋지 않긴 했지만, 처음으로 아빠가 자신이 보는 눈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쓰는 모습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앗…….”
스테치의 팔뚝과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마력을 아끼기 위해 가벼운 상처를 그냥 내버려 둔 것에 불과했지만, 알레시아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알레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만약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건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숲까지 나온 자신의 잘못이다.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나오려던 그때, 스테치는 고개를 돌려 알레시아와 눈을 마주치더니 말했다.
“우리 딸.”
“……에?”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울지 마.”
몬스터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살아 숨 쉬는 통제 불가능의 자연재해다. 알고 그랬다면 모를까, 이 세상에 자연재해에 얽혔다고 해서 탓할 사람은 없다.
“아빠는 아직 힘낼 수 있어.”
죽을 생각 따위 할 턱이 없다. 스테치는 손에 쥔 검을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프레야는 코끝을 쓱 문지르더니 말했다.
“여얼, 간만에 부모 같은 말 좀 한다 너?”
짜악!
“아오!”
프레야의 손바닥이 스테치의 등짝을 후드리면서 일으키는 청명한 소리에 에이다와 제스터도 피식피식 웃었다. 덕분에 우울해져만 가던 분위기가 조금은 환기가 되었다.
‘하지만…….’
파스스-.
공중에 떠 있던 여러 개의 《테슬라》 오브들 중 하나가 마력을 전부 소진하고 사라지자, 알레시아는 흠칫 놀랐다. 그레이트 울프들과 프라이멀도 뭔가 눈치챈 바가 있는지 섣불리 덤벼들지 않고 포위망을 굳히고 있었다.
만약 저 오브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숨 막히는 적의 공세가 다시 시작될 터. 알레시아는 절망적인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곳으로 가려던, 그리고 이미 갔던 몬스터들까지도 이 소란을 눈치채고 모여드는 판국.
아무리 스테치와 프레야가 강하다고 한들 이 모든 몬스터들까지 전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퍽!
에이다는 슬금슬금 다가오던 프라이멀의 관자놀이를 검 자루로 후려친 뒤, 목젖을 베어 넘기며 외쳤다.
“근데 대체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제법 오래 싸운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질 않는다. 엘프들이 신호 화살의 그 빛과 소음을 듣지 못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저쪽도 여기까지 오면서 싸우고 있나 보지!”
제스터의 말에 에이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기사 흩어진 병력을 한데 모으고, 이 많은 몬스터 떼를 돌파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과연 아군이 제때 맞춰서 올 수 있을까?
“이 자식들이 눈치만 빨라 가지고…….”
한편, 주먹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 낸 프레야가 투덜거렸다.
몬스터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테슬라》 오브의 마력이 소진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적이 오지 않으면 공격할 수 없고, 마력도 다시 흡수할 수 없다. 《테슬라》 오브의 보호마저 사라지면 적들은 한꺼번에 몰아칠 테고, 그럼 스테치에게도 빈틈이 생길 것이다.
파스스.
결국, 마지막 오브마저 사라져 버렸다.
“캬아악!”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 드는 몬스터 무리. 스테치는 연속적인 마법 사용으로 더 이상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고, 그나마 월등히 강한 프레야도 힘의 근원인 스테치가 저래서야 마음껏 싸울 수가 없다.
“이 미친놈들이! 이만큼 죽었으면 포기해라, 좀!”
제스터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검을 휘둘러 댔지만, 하나를 죽이면 셋이 머리를 들이미는 판국.
적의 수에 압도당한다.
최후의 방어선이 돌파당한다.
‘움직여!’
스테치가 스스로에게 외쳤다.
‘움직여, 빌어먹을 새끼야!’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스테치. 이제 그에게 사자를 되살리는 능력은 없다. 죽으면 거기서 끝. 그러니까 결코 멈출 수 없다. 아무리 팔다리가 무거워도, 상처가 찢어져도 멈춰선 안 된다.
그의 뒤에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으니까.
“《아크》…… 커흑!”
손에서 뿜어져 나온 스파크가 몬스터 몇몇을 휩쓰는 사이, 스테치는 숨 막히는 고통에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이런, 하필 이런 때에……!
“캬오!”
“으아아아아!”
쩍 벌린 그레이트 울프의 주둥이가 스테치의 시야를 한가득 메웠다. 그리고 스테치는 그런 놈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기합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늦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콰과광!
하늘에서 난데없이 뚝 떨어진 무언가에 의해, 스테치에게 덤벼들던 그레이트 울프의 몸뚱이가 말 그대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산 조각나 버렸다.
충격에 의해 튀어오른 돌멩이나 파편 따위가 비산하고, 흙먼지는 안개처럼 자욱하게 일어났다. 갑작스런 해프닝에 깜짝 놀란 제스터와 에이다는 한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번엔 또 뭐야?”
마법? 아니, 그런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에이다는 가장 먼저 알레시아의 상태를 살폈다.
‘무사해.’
그렇다면 스테치는? 에이다는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이윽고 먼지구름이 서서히 걷히면서 스테치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스테치보다도 그녀의 눈길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저건……?”
스테치의 앞에, 그레이트 울프의 사체 조각을 대좌(臺座)로 삼아 꽂혀 있는 흑색의 검. 새까만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불꽃 형상의 무늬.
땡그랑!
몬스터들을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치는 피와 지방으로 무뎌진 강철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크르르……!”
몬스터들은 기세 좋게 달려들던 조금 전과는 달리 함부로 나서질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역으로 물러서기까지 한다. 그사이 스테치는 눈앞에 우뚝 선 검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프레야도 이 순간만큼은 그저 멍하니 스테치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헛웃음을 흘렸다.
할로우 블레이드.
북부 드워프들의 도시에 안치되어 있어야 할 그의 검이, 위기의 순간에 주인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면에 꽂힌 흑색검의 자루를 두 손으로 감싸쥔 스테치는 그것을 가볍게 뽑아 들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날아와 지면에 박혔는데도 이 하나 빠진 흔적조차 없다.
게다가.
콰아아-!
검을 잡은 스테치의 전신으로 충만한 기운이 흘러들어 온다. 중심에서 말단까지, 하나도 빼먹지 않고. 반지에게서 앗아 갔던 힘의 일부가 되돌아오면서, 스테치는 자연스레 몸 이곳저곳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마력을 피워 올렸다.
“이……!”
보고 있던 제스터와 에이다는 경악했다. 엘프인 그들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취해 버릴 만큼, 너무나도 진하고 정순한 마력이었다. 8년 전의 스테치를 기억하고 있는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저게 정말 한 개인이 낼 수 있는 힘이란 말인가?’
몬스터들이 겁을 집어먹는 것도 당연하다. 저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전율이 일어날 테니까.
“아, 아빠?”
알레시아의 부름에 스테치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야기 속 묘사와 한 치도 틀림이 없는 그 모습에 알레시아는 넋을 잃었다. 저 사람이 우리 아빠라고?
“어때, 멋있지?”
스테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할로우 블레이드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짜식, 올 거면 좀 더 빨리 오지 그랬냐.”
휘익!
우수에 쥔 검을 늘어뜨리고, 반지 낀 좌수를 휘두른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뜨거운 열기를 토해 내는 붉은색의 결정체들이 떠올랐다.
“다 덤벼.”
* * *
간신히 꾸려진 스트라이더 부대를 지휘하며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던 엘레나는,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하는 놈들의 움직임에 어리둥절했다.
잠시 후 그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상황이 종결되어 있었다. 제때 발을 빼지 못한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처참하게 몰살당해 있었고, 그 중심에는 스테치를 포함한 나머지들이 서 있었다.
엘레나가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반경 30m 내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썰려 있었다. 이건 혹시?
그녀는 그제야 스테치가 든 할로우 블레이드를 알아보았다.
“당신, 혹시…….”
“왜 이렇게 늦었어?”
“……끙.”
알레시아를 등에 업은 스테치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엘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나름 빨리 온건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뭐라 할 말이 없다.
“걱정하지 마.”
스테치는 엘레나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마치 잃어버린 조각을 되찾은 듯, 할로우 블레이드를 되찾은 그의 몸 상태는 이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
“옛날만큼 무리는 안 해. 그냥 아주 살~짝 힘 좀 써 봤어.”
한편, 에이다와 제스터는 방금 전 일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그저 손가락 튕기는 정도의 가벼운 동작으로, 그 많은 몬스터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했다.
그런데 본인 말에 의하면 이조차도 전력이 아니란다.
“……엄마.”
쭈뼛쭈뼛 걸어 나온 알레시아가 엘레나에게 걸어갔다.
“그…… 그게.”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오금이 저려 말이 안 나온다. 그러자 뒤에서 프레야가 나오더니 알레시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혼나야지! 아주 많이 혼내 줄 거야. 그니까 왜 이모 말을 안 들었어? 응?”
프레야의 말에 알레시아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하지만 스테치는 그런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말했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러자 엘레나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털썩 주저앉으며 스테치와 알레시아, 프레야를 함께 끌어안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
“죽긴 왜 죽어.”
마찬가지로 조용히 대꾸한 스테치는, 프레야와 엘레나, 그리고 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가족 놔두고 절대 그렇게는 못 하지.”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