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53)
53화에계속 –
53화 재회
“히힝! 푸르륵!”
“제발, 말 좀, 들어! 이러다가 잘못하면 떨어지게 생겼다고!”
바로 옆 낭떠러지로 후두둑 돌멩이가 떨어지는 둥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되자, 스테치는 말고삐를 조이며 낮게 윽박질렀다. 그러나 이 멍청한 말은 당장 등에 타고 있는 인간을 떨궈놓는 데에 더 관심이 가는지, 이전보다 더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녀석은 처음엔 좀 말을 잘 따르는가 싶더니 보르덴의 영지에서 떨어진 이후부턴 이렇게 수시로 스테치의 지시에 저항했다.
“쉬잇…….”
그 뒤를 따라가던 엘레나가 말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조용히 몇 마디를 건네니,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주둥이를 다물었다.
아므리타를 들이킨 이후로 엘레나는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탓에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약 이틀 정도 후에는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히 아티팩트를 제어하긴 어려웠는지, 그녀는 위험한 길목을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과 귀를 붕대로 틀어막은 기묘한 상태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산지로 접어드니 좋네요.”
조곤조곤 들려오는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는 안장 옆 가방에서 다시 지도를 꺼내 펼쳐보았다.
수도의 옆에 위치한 ‘레지아 계곡’은 지형의 고저차가 심해 산과 절벽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렇다 보니 지리 구조상 군대도 마을도 들어서기 힘든 탓에, 관리받지 않는 던전과 몬스터가 많이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조건속에서 땅을 개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이 지역은 이따금 새 던전을 발굴하러 오는 사람들이나 일부 특별한 몬스터의 소재를 노리고 오는 전문 사냥꾼을 제외하곤 방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스테치는 안정적인 베네지아 외곽을 벗어나 중앙에 올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곳은 영 낯설기만 한 장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와 로프로 만들어진 아슬아슬한 공중 다리가 눈앞에 나타나자 스테치는 곤란스런운 표정으로 뒤통수만 긁어댔다. 혹시라도 붙을 추적을 뿌리치기엔 안성맞춤인 지역이라고 판단했지만, 설마 이렇게나 험준할 줄이야…….
‘말을 끌고 가는건 역시 여기까지인가…….’
한때는 베네지아 왕가의 주도로 이 지역을 개발할 겸 길을 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되었는지 관련 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거대한 산등성이 사이에 걸린 다리나 바위를 뚫고 들어가는 광산의 흔적들은 모두 그것의 잔재. 당연히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을 관리해줄 이도 없었으니, 다리고 광산이고 어느 하나 온전치 못했다.
먹이도 주기 힘든 판국에 도보로도 힘든 길을 말까지 몰면서 계속 나아갈 수는 없는 법.
말은 자신을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스테치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연신 앞발을 굴러댔다.
“잠깐만요.”
스테치가 뒤를 돌아보자, 귀와 눈가를 둘러싸고 있던 붕대를 막 풀어헤친 엘레나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의 오른팔을 수놓던 문신들은, 어느 틈엔가 귓가 근처에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요. 날갯짓 소리같은데…….”
아티팩트의 덕택에 지금의 엘레나는 《애니멀 인스팅트》보다도 강력한 감각 증강계 스킬이 항시 발동중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탐지기가 된 그녀에게 스테치가 감탄하는 사이, 안개가 낀 계곡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가 아니라면 낼 수 없는 소리였다.
“근처에서 희미하게 사람의 소리도 들립니다. 어쩌면 공격받고 있는 걸지도…….”
“젠장!”
병사가 이 계곡에 있을 가능성은 없으니, 아마도 몬스터와 대치 중인 이들은 십중팔구 모험가일 터. 서둘러 돕지 않으면 그들이 위험하다.
하지만 어떻게? 메멘토 모템의 마법을 제외하면 스테치에게 대공 수단은 전무하다. 거기다 안개가 낀 상황에서 공중의 적을 대상으로 상대로 마법을 적중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
잔뜩 긴장한 스테치가 반지만 매만지며 안개 속을 노려보는 반면, 엘레나는 사정이 달랐다.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그녀에겐 노린 타겟을 정확히 조준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아티팩트와 마도구가 있었다.
“…….”
울음소리가 계곡 전체에 메아리치는 바람에 적의 방향을 정확히 특정짓기 힘들법도 하건만, 조용히 화살과 활을 뽑아든 그녀는 지면에 발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안개의 어느 한 지점을 조준했다.
귓가의 문양이 눈꼬리 근처로 스멀스멀 기어가더니, 눈의 흰자위 부분을 가득 채우며 까맣게 물들였다.
퓩!
발사된 화살은 눈으로 쫓기도 힘든 스피드로 안개 너머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스테치가 멍하니 엘레나와 안개를 차례로 돌아보던 그때, 길게 울려 퍼지던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뚝 하고 멎었다. 명중했나?
“직선으로 날아와서 조준은 쉽더군요. 화살이 목을 관통했으니 곧 떨어질 겁니다.”
잠시 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크게 울렸는데, 소리와 방향을 보아하니 이 몬스터는 아무래도 바로 앞의 다리 건너 어딘가에 추락한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피로감에 절은 한숨을 내쉬며 활을 거뒀지만, 두 눈은 여전히 다리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 전 사람들이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부상자도 좀 있고…… 떨어진 몬스터를 확인할 생각인가 본데요.”
“병사들은 아니지?”
“그건 아닌 것 같…… 윽.”
엘레나는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얼굴에 붕대를 감았고, 검은 성분은 다시 팔뚝으로 옮겨와 문신으로 자리 잡았다.
적응도 되지 않은 그녀가 아티팩트를 이 이상 오래 사용하는 것은 무리겠지.
스테치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엘레나의 어깨를 살짝 두들겨주고 말했다.
“수고 많이 했어. 가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자.”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널 수는 없었기에 스테치는 녀석의 줄을 근처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묶어둔 뒤, 엘레나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인도하며 다리를 건넜다.
다리 끝에 다다를수록, 여럿이서 함께 떠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스테치가 안개를 뚫고 다리를 완전히 건너 반대편 봉우리의 땅을 딛자, 비로소 다른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거의 작살나서 끙끙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쓴 이도 보였다.
땅에는 스테치가 모르는 종류의 거대한 새 형태 몬스터가 널브러져 있었다. 안개 속을 날아다닐 때는 몰랐지만, 녀석의 몸뚱이에는 엘레나의 것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쏴댄 화살들이 박혀있었다. 그 수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스테치 일행이 오기도 꽤 한참 전부터 싸움을 벌인듯 했다.
“뭐야, 이 화살은 우리 것이 아닌데? 누가 쏜 거지?”
“괜찮나요?”
스테치가 먼저 손을 들고 말을 걸자, 화살을 몬스터의 시체에서 하나하나 뽑아내던 사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지나가던 탐험가입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진 않나 해서…….”
“어라, 네가 왜 여기 있어?”
갑자기 묘하게 스테치의 신경을 긁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천천히 주변 사람들의 입을 살폈다.
어떤 놈이 날 아는척 하는거야? 그러자 그들의 뒤에서 낯익은 디자인의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나오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 너였냐.”
“생각했던 것보단 더 빨리 재회하게 되었는데, 브라이언?”
훤칠한 키, 아무렇게나 자라난 짧은 흑발의 남자.
한쪽 팔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기다란 별자리 무늬의 망토. 걸음걸이에서부터 자신감이 느껴지는 그의 정체는 바로 자칭 의적단의 리더, 가렛이었다.
* * *
“꺼져! 이번엔 또 무슨 수작질을 부리려고 뜬금없이 이런 곳에서 등장하는 거야, 넌!”
스테치는 빽 소리를 질렀다가 안 그래도 귀가 민감한 엘레나를 떠올리곤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렛은 호쾌하게 웃어 재끼더니 스테치의 등짝을 소리 나도록 쳐댔다.
“하하! 여전히 내 동료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모양이군. 그 고집도 마음에 든다! 아참, 거기 아가씨도 건강하신가?”
가렛이 엘레나를 쳐다보며 넉살 좋게 묻자 그녀는 말없이 입술을 삐죽였다. 팔의 문신은 이미 그녀의 안면으로 옮겨가, 인식 장애 효과를 일으킨다던 페이스 페인팅 패턴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런 식으로도 사용하면 일일이 손으로 그려줄 필요도 없겠군. 재능이 굉장한데?’
“자자, 여기서 이러기도 뭐하니까 아지트로 가자고!”
그러거나 말거나 막무가내로 스테치를 잡아끄는 가렛의 행동에 스테치가 으르렁거리자, 가렛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를 뒤에서 툭툭 밀어댔다.
스테치가 왕가의 편만큼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탓인지, 그의 행동은 전반적으로 친근함이 과하다 못해 넘쳐나고 있었다.
“야, 저쪽에 내 말이…….”
때마침 스테치가 입을 열자, 가렛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그쪽은 부하들을 시켜서 잘 돌보라고 전해놓을게. 그나저나 덕분에 살았어! 안 그래도 이쪽은 저 새 때문에 고생깨나 하고 있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를 돌아본 가렛은 그녀의 이상한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살통은 보이는데 활이 안 보인다던가, 눈과 귀를 몽땅 틀어막았는데도 능숙하게 걸어가는 모습이라던가.
온갖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길을 안내했다.
놀랍게도, 그의 안내를 따라 건너게 된 공중 다리들은 하나같이 새것처럼 튼튼하게 수리된 상태였다.
아까전에 건넜던 후줄근한 다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정적인 다리를 가리키며 가렛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훌륭하지? 우리 애들이 작업한 거야. 지금껏 찾아놓았던 아지트로 쓰기엔 이곳이 최적의 장소였거든. 제대로 활용하려면 먼저 길을 정리해놔야지.”
“…… 뭐…… 나쁘진 않네. 아까 몬스터를 잡은 것도 길 정리의 일환인가?”
“그렇지. 여긴 몬스터가 많아서 식량 조달도 편하거든.”
가렛의 말을 듣고 있던 엘레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엘프인 그녀에게 몬스터를 먹는다는 것은 생리적으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소리였지만, 사실 인간인 스테치나 가렛에겐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아지트가 나올 거야…… 그나저나 너희들은 여기 무슨 일이지?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우리랑은 다른 방향으로 간 줄 알았는데.”
“내 행선지나 목적을 네가 알아서 뭐하게?”
스테치가 민감하게 반응하자, 가렛은 끙-하고 짧게 신음하더니 말했다.
“내가 그런걸 묻는게 달갑지 않다는 건 알겠지만, 일단 들어봐. 어디로 갈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거들랑 먼저 우리한테 협조해야 될걸.”
“뭐? 왜?”
스테치의 물음에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있지, 너도 봐서 알겠지만 레지아 계곡을 돌아다니는 유일한 방법은 이런 공중 다리나 오래된 폐광의 터널들을 이용하는 것 뿐이야. 그런데 최근 몇몇 다리들은 노후 돼서 망가지고, 몬스터 때문에 터널이 폐쇄되었거든.”
“그럼 뭐야, 이 지역을 오가려면 다리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된다는 소리야?”
가렛의 말에 스테치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다리 건설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수십 일이 걸리는 대형 작업이 될 가능성이 컸고, 발이 묶이게 될 것은 안 봐도 뻔했다. 그러자 가렛이 얼른 말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완전히 망가진 다리만 있는 건 아니야. 조금이라도 형태가 남아있다면 우리들이 금방 수리할 수 있어.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건 다른 쪽이라고.”
저쪽이 뭘 부탁할지는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스테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가렛을 따라 위험천만한 다리를 하나 더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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