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89)
88화에계속 –
88화 북부로
“이런.”
하수로를 앞장서서 걷던 스카이가 벽에 바짝 몸을 붙이자, 따라오던 엘레나와 스테치가 멈춰 섰다.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횃불을 든 병사들이 지나쳐가는 모습에 스카이는 나지막이 말했다.
“갔군.”
“젠장……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스테치는 벽을 짚고 비틀거리다 쭉 미끄러졌고, 엘레나는 그런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추격을 떨궈 내느라 며칠을 고생해서 마침내 버든베어까지 돌아온 스테치 일행. 그러나 버든베어는 그들이 막 감비니 요새로 출발하던 때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의욕 없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병사들은 눈에 불을 켠 채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있었다. 하수로, 폐건물, 골목같이 평소엔 들어오지도 않던 구역까지 발을 들여놓는 병사들의 모습은 버든베어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까지 험악해져 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크게 한 건 터뜨렸으니 뭔가 일이 터졌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스테치가 스카이를 만나기 위해 버든베어를 방문했을 당시 마주쳤던 렉페이스는, 이미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버든베어의 뒷세계 안내역인 렉페이스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끼이익.
비밀문을 열고 도착한 아지트는 떠나갈 때의 모습 그대로 텅텅 비어 있었다.
널찍한 소파에 몸을 파묻은 스카이는 이내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딜 가더라도 역시 편안한 내 집이 최고라니까.”
반대편에 앉은 스테치는 끙- 하고 신음하더니 스카이에게 쏘아붙였다.
“속 편한 자식. 지금 웃음이 나와?”
“그만 좀 징징거려. 내 덕분에 요새에서 탈출할 틈이 생긴 건 사실이잖아.”
스테치는 영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설마 최후의 수단이랍시고 달아준 물건이 폭탄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스카이의 몸을 조종하던 메멘토 모템이 눈치 빠르게 그를 낚아챘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쯤 스테치 본인도 한 줌 먼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스카이를 무조건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날은 빠지고, 꽉 조여 놓은 부분은 헐거워지고. 마르크와 싸우기도 전부터 검의 상태는 제라드와의 일전으로 엉망진창이었으니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누가?”
끼이익—.
잠시 후, 아지트의 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짐을 한아름 든 두 남자가 들어왔다.
아지트 안에 누가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무방비 상태로 들어온 그들은 스카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보스! 살아계셨군요!”
바닥에 떨어진 보따리 짐 안에서 감자 몇 알이 굴러 나왔다.
스카이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그들은 자신들의 보스를 뼈가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잔뜩 긴장하여 화살을 겨누고 있던 엘레나는 그 모습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들은 스카이가 부재중일 때에도 계속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버든베어에 남겨 놓은 부하들이었다.
스카이는 낄낄거리며 물었다.
“역시 무사했군. 다른 놈들은 어떻게 됐지?”
“보스가 여기 제일 먼저 도착하셨어요. 나머지는 아직…….”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과연 그 요새에서부터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러나 스카이는 그것에 대해선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지 고개를 주억거린 뒤 물었다.
“그럼 어디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볼까. 지금까지 내가 놓친 소식은 뭐지?”
감비니 요새를 탈출한 스테치 일행은 흔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을이나 도시를 피해서 곧장 버든베어로 이동했다. 때문에 그들은 현재까지의 상황을 종합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그게…….”
정보원들은 그동안 버든베어에서 그들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감비니 요새 습격 사건에 대한 소식이 왕가의 귀로 흘러들어가자, 그들은 제일 먼저 왕국의 귀족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반란을 꾸미고 세력을 결집시킬 만한 힘 있는 귀족 가문들이 왕가의 타겟이 되었고, 이는 현 왕가에 대한 수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또한 왕가는 조사의 범위를 넓혀 산적이나 암살자, 혹은 도시의 범법자들도 함께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버든베어에서 안 좋은 쪽으로 잘 나가던 스카이는 경비대의 타겟 1순위였다.
“돌로호브 아시죠? 바로 며칠 전에 붙잡혀 갔습니다.”
“뭐? 진짜?”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에 스카이는 깜짝 놀랐다.
돌로호브는 규모만으로는 버든베어에서 1위를 다투는 세력, ‘파이톤‘의 수장이었다. 고작 경비대에게 잡히기엔 만만찮은 상대였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이드릴이 직접 나섰거든요.”
“와, 이 새끼들 진짜 제대로 빡쳤나 보네.”
버든베어를 다스리는 서방장군, 이드릴 헨리에타.
동방의 마르크와 함께 첫째 왕자인 랍토레스의 심복. 마르크 맥도웰이 철벽과도 같은 방어 능력으로 유명하다면, 이쪽은 반대로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공격 능력이었다.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그녀답게 일이 한 번 제대로 터지고 나니까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스카이는 스테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어쨌든, 이걸로 확실히 알았겠지?”
“뭐가?”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스테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스카이의 말은 질책이 아니라 친구로서 해 주는 충고였다.
베네지아의 행보가 지속되는 한 전국의 모든 암시장들은 음지에서 활동하는 자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지 못할 것이다.
이는 당연히 스테치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쪽 얼굴은 아직 생각만큼 많이 팔리지 않았어요.”
정보원 중 하나가 스테치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대대적인 추적 명령이 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그 요새에서 스테치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제라드뿐이다.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이상, 곧 그가 눈에 불을 켜고 스테치의 행방을 쫓을 거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왜 이 지경이 된 거지?”
스테치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실패할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도록 무대를 설정하고, 타겟을 유인했다.
그런데 그걸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해서 방해할 확률은 대체 몇이나 될까.
스테치의 푸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스카이가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써 봤자 뭐 하겠어?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어. 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나 걱정하라고.”
“버든베어를 떠나 봤자 내가 어디로 가겠냐? 어차피 대륙 남부는 전부 베네지아의 영향 아래일 텐데…… 솔직히 이젠 제라드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어.”
나중에 엘레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제라드는 팔을, 마르크는 눈을 잃었다고 한다.
베네지아의 사방장군을 둘이나 상대해 낸 결과치고는 나쁘지 않았지만, 정작 스테치가 원하는 목표는 이뤄 내지 못한 셈이다.
“흠…….”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스카이가 툭 한 마디 건넸다.
“너, 차라리 이번 기회에 북부로 가보는 건 어떠냐?”
“북부라니…… 크로마토스 제국?”
크로마토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쪽 땅의 주인으로, 그 힘은 베네지아 왕국 이상이었다.
카델트 대사막이라는 천연의 장애물만 없었더라면, 남부 연합국은 진작 제국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란 이야기가 돌 정도로 제국의 힘은 강력했다.
스테치에게도 북부는 한 번쯤 발을 디뎌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장소이긴 했다. 낯선 환경, 발전된 기술력. 하지만 그만큼 평생을 남부에서 나고 자란 스테치에게 두려운 장소이기도 했다.
남부와 북부를 오갈 수단이 없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모험가나 탐험가가 한 곳에만 머물며 활동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기껏 구축해 놓은 인맥을 모조리 갈아엎고 새 출발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데다가, 기존에 쌓아 둔 지식들도 대부분 쓸모없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 번 생각해 봐. 지금의 너한테는 남부보다 살기 좋은 곳 아닐까? 시원하고, 인종 차별도 없고, 밥도 맛있거든.”
“요즘 같은 때에 배가 뜨긴 해?”
“검문, 검열이야 심하겠지. 하지만 일단 제국으로 넘어가면 베네지아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셈이잖아.”
스카이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너도 이제 알았지? 제라드만 처리하면 끝이라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너무 안이했어.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군대를 상대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야. 안전한 장소에서, 꾸준하게 힘을 키우고 다시 돌아와.”
* * *
그로부터 며칠 뒤.
검을 망가뜨린 대신이라며 북부행 배편을 구해 온 스카이는, 스테치 일행을 끌고 경비병밖에 남지 않은 새벽의 버든베어 항구로 나왔다.
수하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부둣가를 따라, 세 개의 인영이 경비병들의 시야를 피해 이동하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선적물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스테치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스카이에게 물었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선착장에 그럴싸한 배가 한 대도 안 보이는데?”
힘겹게 감시를 뚫고 왔지만, 정작 항구에 있던 배들은 하나같이 쇠사슬로 봉인되어 출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 스테치가 어처구니없어하며 스카이에게 따지자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밀항자들이 타는 배가 그렇게 쉽게 눈에 띄어서 쓰겠나? 좀 기다려 봐.”
스테치와 엘레나가 스카이를 따라 선착장에서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딛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눈앞에 난데없이 거대한 갤리온 선이 나타났다.
불가시화 마법? 아니면 텔레포트? 놀란 스테치가 당황스러워하자, 엘레나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인식장애 마법……?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물체를 숨길 수 있을 정도의 규모라니, 대체 누가?”
인식장애 마법으로 가려진 물체나 대상을 발견하기 위해선, 대상의 존재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어야만 한다.
스테치가 배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스카이에게 미리 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오, 왔구나.”
배에서 내려온 것은 보기만 해도 추울 정도로 느슨한 옷차림을 한 장신의 여성이었다.
키는 어찌나 큰지 같은 성인인 스테치보다도 머리 하나 크기 정도 더 컸다.
“이 녀석이야? 네 친구라고 그러길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허우대가 멀쩡하네.”
여성은 스테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클라우디아. 이쪽은 내 사랑스러운 배, 찰리라고 하지.”
“스테치 아텔리어입니다. 이쪽은 제 동료고요.”
무슨 배 이름이 그래? 하지만 그가 뭐라 하기도 전에 스카이는 재빨리 스테치의 입을 손으로 덮었다. 악수를 마친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잘도 제시간에 도착했구나. 슬슬 은신이 풀리려던 참이라서 아슬아슬하던 참이었거든.”
“위험한 시기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배 삯을 치르겠습니다.”
“이게 원래 내 일인데 뭘. 그리고 내가 언제 너한테 뭐 달라고 한 적 있니? 나중에 술이나 한턱 쏘면 충분해.”
스카이의 말에 클라우디아는 손 사레를 치더니, 스테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쪽은 북부에 처음 가보는 거라고 했던가? 배 멀미 겪어 본 적 있어?”
“어…… 아니요. 사실 배를 타 보는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인데요.”
스테치의 말에 클라우디아는 살짝 걱정되는지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험한 뱃길이 될 텐데 스타트가 좋지 않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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