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90)
89화에계속 –
89화 바다의 불청객들
출렁이는 바다. 소금기 가득 밴 짭짤한 바람.
역풍을 맞이한 거대한 범선 하나가 돛을 이리저리 꺾어 가며 나아가느라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정신없이 갑판 위를 뛰어다니며 돛대들을 조정하던 선원들은, 난간에 몸을 걸치고 있던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아, 방해되니까 얌전히 아래 내려가 있으쇼!”
“우웨에에엑!”
스테치가 배 바깥으로 거하게 쏟아 내는 모습을 본 선원은 얼굴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클라우디아의 배 ‘찰리’는 대부분의 공간이 수화물 보관고로 쓰였고, 객실이라곤 남자와 여자 전용의 단 두 개만이 준비되어 있었다.
좁아터진 방 하나에 남자들끼리 부대끼고 있는 것이 싫었던 스테치는 도망치듯 갑판 위로 올라왔지만, 그 결과는 보다시피 성대한 토악질이었다.
배가 출항을 시작한 지도 이틀째.
스테치는 인생에서 최초로 겪는 뱃멀미 때문에 쉴 틈 없이 고생하는 중이었지만, 불행하게도 항해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죽겠군…….’
얼굴이 새파래진 스테치가 끙끙대며 몸을 일으키자, 갑판 아래에서 올라온 엘레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너 ……너는 어떻게 그렇게 멀쩡한 거야?”
평생을 숲에서 지내 왔을 그녀가 어째서 스테치보다도 멀미에 둔감한 것인가. 그러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선장님 말씀이 맞았네요. 체질적으로 배가 안 맞는 사람이 있나 봐요.”
엘레나는 스테치를 끌고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야, 이거 어떻게 안 되냐? 나 진짜 너무 힘든데…….’
『미안, 나도 멀미는 도저히 어떻게 못 해 주겠다. 《리커버리》를 쓰면 나아지기야 하겠지만, 배가 이렇게 흔들려서야 어차피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야.』
선실 앞까지 돌아온 스테치에게 엘레나는 약병을 하나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선장님이 주신 약이에요. 마시면 멀미가 좀 덜할 거라는데요.”
그렇다면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스테치는 단숨에 병 안의 내용물을 들이켰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끈적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 간지 고작 몇 분 후, 정말로 멀미 증상이 완화되는 듯 싶자 스테치는 늘어지는 한숨과 함께 벽에 기대었다.
선상에서 보내는 일과는 스테치에게 있어 최악의 경험이었다.
배 안에서 승객의 신분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한정적인 데다, 바깥은 사방이 끝도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다. 사실상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엔 신기해하던 엘레나도 고작 이틀이 지나자 바깥 내다보길 꺼려하는 눈치였으니 말 다했다.
“큰일이네요. 선장님 말씀으로는 앞으로도 항해 일정이 13일 정도 남아 있다고 그러시던데요.”
대륙을 남과 북으로 분단시키고 있는 거대한 마력 폭풍.
그 범위는 육지를 넘어 해상까지 뒤덮을 정도로 넓기 때문에, 남북을 오가는 배들은 항상 폭풍의 영향권에 들어가지 않도록 우회하느라 일정을 길게 잡아야만 했다.
『이거 잘못하다간 목적지는 구경도 못 하고 죽겠군 그래.』
엘레나를 방으로 돌려보낸 스테치는 몸이 좀 괜찮아지자마자 다시 갑판 위로 올라갔다.
역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배의 움직임도 안정된 덕분에, 그는 느긋하게 쉴 수 있었다.
“안녕. 몸은 좀 어때?”
어느새 선장실에서 나온 클라우디아가 스테치를 발견하곤 물었다.
“덕분에 괜찮습니다. 주신 약이 효과가 아주 좋아서요.”
“가끔 승객 중에 정말 못 버티겠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주곤 했지. 한동안은 꺼낼 일이 없었는데 네가 요긴하게 써먹는구나.”
그녀는 잠시 스테치와 함께 망망대해를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 배에 탄 사람들은 전부 북부로 가려는 밀항자들이니까, 지나치게 눈치 볼 필요는 없어. 하지만 멍청한 생각을 품는 놈이 없으리란 보장은 못 하니까,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는 마.”
크로마토스 제국이 베네지아를 적성국가로 지정한 만큼, 베네지아의 추격도 북부에서는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뭐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리고 네 뱃멀미 말인데…… 미안하지만, 마력 폭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진 지금 이상으로 힘든 뱃길이 이어질 거야. 오늘은 아마 저녁때 즈음에 비가 올걸? 그러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있으라고.”
스테치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맑은데 무슨 비? 그러나 그날 밤, 클라우디아가 예언한 대로 서서히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결국 가느다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루 종일 갑판 위를 어슬렁거리던 스테치는 하는 수 없이 계단을 내려가 방으로 돌아갔고, 마침 그를 찾고 있던 엘레나와 마주쳤다.
“지금 식사 시간이래요. 가시죠.”
스테치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선원들은 업무 복귀를 위해 이미 식사를 마친 뒤였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죄다 승객들이었다.
현재 식당에 있는 사람의 수는 스테치 일행을 제외하고 전부 다섯 명.
보란 듯이 자신들의 무기를 테이블 옆에 세워 두고 식사 중인 2남 1녀의 혼성 용병 그룹과 나이 차가 많아 보이는 두 남녀 그룹이었다.
남자 쪽은 가죽 갑옷과 손도끼 등의 무장을 하고 있었고, 여자 쪽은 움직이기 편한 얇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특히 여자 쪽은 눈처럼 하얗고 끝이 파랗게 물든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흠. 첫날에 저런 사람은 못 본 것 같은데.’
여하튼 일반인이라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톡 튀는 외모인건 확실하다. 고깃국과 빵을 받아 온 스테치가 엘레나의 맞은편에 앉자, 빵을 뜯어 먹던 엘레나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죠? 북부는 아텔리어 씨도 처음이라면서요.”
스테치는 그녀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스카이의 말을 듣고 크로마토스 제국에 갈 결심을 하긴 했지만, 그곳에는 일면식의 사람조차 없는 이국의 땅이었다.
지리도, 몬스터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전부 다르다. 흡사 탐험가로서 첫걸음을 내딛던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스테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길드에 가서 탐험가 라이센스를 새로 발급받아야 하는지 확인해 볼 거야. 그게 없으면 어느 던전을 들어가도 불법으로 처리되거든. 기껏 북부까지 가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시작부터 그르치고 싶지는 않아.”
스테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엘레나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저는 그동안 북부 문화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있을게요.”
공부한다니 어떻게? 스테치가 막 물어보려던 차에, 엘레나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쉿.”
“음?”
식당에 있던 승객들 중 그것을 눈치챈 이는 많지 않았다.
가장 먼저 눈치챈 이는 엘레나, 그리고 백발녀와 함께 동석한 남자. 두 사람의 시선에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선체의 제일 밑바닥이었다.
철벅-. 철벅-.
축축하고 끈적한 무언가가 달라붙는 듯한 소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희미했지만,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그 소리는 이윽고 스테치와 다른 사람들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마치 선체 외벽을 무언가가 기어 올라오는 것처럼-
“……켁, 오늘은 더 일찍 납셨군 그래.”
어느새 주방에서 걸어 나온 주방장이 집중하고 있던 승객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뭉툭한 그의 손에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검이 쥐어져 있었다.
“식사는 그만 끝내시고 다들 방으로 들어가요! 문 걸어 잠그고 절대 밖에 나오지 마쇼!”
갑작스런 지시에 용병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군말 없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백발녀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더니 빠른 속도로 식당을 나섰고, 스테치와 엘레나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무슨 일이지?”
“모르겠어……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지.”
엘레나와 헤어지고 남자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스테치를 반겨 준 것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랜턴의 불빛이었다.
백발녀와 함께하던 남자는 아예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은지 등까지 돌린 채 해먹에 누워 있었고, 다른 두 용병 남자는 영 불안한지 안 그래도 좁은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왔냐, 브라이언.”
하도 가명을 많이 쓰다 보니 이제는 브라이언이 본명이 될 지경이다.
스테치가 손을 들어 답하자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의미 없는 문답을 시작했다.
“조금 전의 그건 뭐였을까? 몬스터인가?”
“아마 그렇겠지? 안 그러면 주방장까지 무기를 들고 우릴 방에 처넣어 둘 이유가 없잖아.”
“우리도 나가서 싸워야 하는 거 아냐?”
두 사람은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바짝 귀를 가져다 붙였고, 스테치는 사다리를 올라가 해먹 위에 몸을 던지며 둘의 대화를 딱 잘랐다.
“승객들한테까지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나중에라도 우릴 부르겠죠. 이상한 짓 그만하시고 잠이나 자세요.”
“……그런가?”
머쓱해진 두 용병이 불을 끄고 각자 자리에 누웠지만, 정작 스테치 본인은 멀쩡하게 깨어 있었다.
천장, 그러니까 갑판 쪽을 쳐다보던 그는 조용히 스킬을 사용했다.
‘《애니멀 인스팅트》.’
두꺼운 나무벽을 뚫고 들려오는 빗소리와 선원들이 고함.
식당에서 들었던 이상한 소리와 더불어 갑판 위에서 벌어지고 있을 긴박한 상황이 스테치에게로 생생히 전달되었다. 정말 지금 몬스터랑 선원들이 백병전을 벌이고 있는 건가?
그러나 소란스러웠던 것도 아주 잠시.
스테치의 고막을 때리던 소음이 말끔히 사라지고, 선원들이 복도를 지나가며 상황 종료를 알렸다. 스테치 마냥 이번이 배를 타고 가는 초행길이었던만큼, 궁금증이 넘쳐나던 용병들은 문을 벌컥 열고 위로 구경하러 올라갔다.
‘확실히 나도 조금 궁금하긴 한데.’
스테치가 갑판 위로 올라오자 거세진 빗줄기가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빗물로 번들거리는 바닥위에는 보랏빛의 액체가 넓게 번져 있었고, 희끄무레한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건…… 아퀸이잖아.”
비늘이 돋아난 피부와, 그 위를 얇게 덮고 있는 미끈한 점액질. 손가락이나 발가락 틈을 채운 피막과 등위의 지느러미까지, 그것들은 인간과 닮았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오늘 밤은 많이도 왔군. 맨날 죽어 나가면서 질리지도 않나?”
뒤를 돌아보자, 부츠 끝으로 아퀸의 시체를 밀어서 막 바다 밑으로 떨어뜨린 클라우디아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 든 펄션에 아퀸의 피가 묻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도 싸움에 직접 참여한 모양이었다.
“‘오늘 밤은’이라니…… 항상 이렇게 배 위로 올라오나요?”
“아아, 물론이지. 이 해역에 들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게 아퀸이야. 이쯤 되면 우리한테는 거의 식후 운동이 될 지경이라니까.”
손수건을 꺼내 검에 묻은 피를 말끔하게 닦아 낸 뒤 바다로 던져 버린 클라우디아는, 과장되면서도 우아한 포즈로 모자를 벗어 스테치에게 인사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바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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