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and Artifacts RAW novel - chapter (93)
92화에계속 –
92화 저지
손안에서 생성된 《아크》의 전기 에너지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기세로 끓어올랐다.
승객들로부터 장신구나 무기를 떼어 내느라 여념이 없던 스컬쉽의 선원들도 뒤늦게 이상을 감지하고는, 불빛에 끌린 나방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스테치를 쳐다보았다.
“야, 저 자식 저거 뭐 하는 거야?”
그 순간, 프렉탈 구조를 그리며 튀어나온 한 줄기 빛이 스컬쉽 선원 하나를 강타했다.
“으아아악!”
짜릿한 전류가 그 불쌍한 사내의 체내를 휘적이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빛과 소리가 동반되었다.
이윽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에서 짤막한 불똥을 피워 올린 그는 새까맣게 타 버린 채 고꾸라졌다. 살가죽이 바스러질 정도로 바싹 구워진 그는 원래의 형상을 알아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아이작!”
새된 목소리로 외치는 동료들 앞에 스테치가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뿌연 연기만 피워 올리는 시체를 건너, 양 손가락을 우두둑거린 그는 선원들에게서 잠시 시선을 떼고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던 바닥은 어느새 딱딱하게 메말라 있었다.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사납게 배를 흔들어 대던 바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했다.
바람이 조금 세차게 불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항해 첫날을 떠올릴 정도로 사방이 평온함 그 자체였다.
그레이 스컬쉽의 웅장함도 환상이 걷히면서 사라졌긴 마찬가지였다. 뼈로 된 골조와 특유의 웅장함은 온데간데없고, 150m 가량 떨어진 곳에 평범한 범선 한 척이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클라우디아의 배는 닻까지 내린 채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래서…… 이쪽 배엔 무슨 용건이신지?”
메멘토 모템의 도움을 받은 스테치는 환각상태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처음엔 막 깨어난 상태라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백발 여성을 납치해가려는 듯한 구도를 보면 누가 봐도 아군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사내들은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외쳤다.
“이 자식이!”
“그만 둬! 지금 저 녀석을 상대할 시간 없다!”
상황 판단이 빠르다고 해야 할까. 여성을 들쳐 메고 있던 사내는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다른 승객을 붙잡았다. 사실상 인간 방패이자 인질인 셈이었다.
그의 턱짓에 우물쭈물하던 다른 이들도 저마다 승객과 선원을 끌어당겼다.
“야,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저놈이 수면 마법이라도 쓰면 어떻게 해?”
“시끄러워.”
동료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물었지만 사내는 의기양양했다.
온갖 종류의 마법 계통들이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그것을 사용한 마법사는 일생에 걸쳐 한 종류만을 연구하고 수련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두 개 이상의 분야를 통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데다, 어설프게 문어발로 이것저것 익혀 봤자 이도 저도 안 되기 때문이다. 스테치가 사용한 전격계 마법의 위력을 봤을 때, 수면 마법 같은 걸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놈들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겠지, 마법사?”
교묘하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스테치로부터 거리를 벌려가는 스컬쉽의 선원들. 섣불리 공격 마법을 사용했다간 인질이나 다른 사람들까지 그 여파에 휘말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잘 모르겠는데, 시발 새끼야?”
그러나 스테치는 그들의 기대와 달리 잔뜩 열이 받은 상태였다.
전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여자를 데리고 있던 남자와 그의 동료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스테치가 거듭된 협박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다가오자, 사내가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마라! 그 이상 우릴 도발하면……!”
“『미안, 이미 끝났어.』”
푹!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인 선원들 중 하나가 다른 동료의 등허리 깊숙이 손에 든 검을 꽂아 넣었다. 갑작스레 돌변해 버린 아군의 모습에 당황한 그들은 붙잡고 있던 인질을 놓아 버릴 정도로 놀라 우왕좌왕했다. 당연히 메멘토 모템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몸과 몸을 넘나들며 눈 깜짝할 사이에 스컬쉽의 선원들을 쓰러뜨린 메멘토 모템은, 바닥을 기는 마지막 남자의 앞에 서서 검을 겨눴다.
다른 놈들에 비해 아는 게 많아 보여서 마지막까지 살려 놓은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 안 그러면 나도 모르게 어디 한두 군데 쑤셔 버릴지도 몰라.』”
“…….”
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스테치가 무슨 이상한 요술을 부려 동료들을 세뇌시켰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메멘토 모템은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스테치에게 물었다.
“『벌써부터 날 반지 바깥으로 끄집어내다니, 고작 졸개들을 상대로 귀중한 어빌리티를 막 쓰는 거 아냐?』”
스테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들이 굳이 직접 배에 오른 이유는 이 여자를 산 채로 납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여자가 배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절대 배를 공격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스테치가 여자를 한쪽으로 옮겨 놓은 뒤 떨고 있는 남자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발끝으로 안면을 걷어찼다. 피가 쏟아지는 코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진 그를 뒤로하고, 차지한 몸의 기억을 읽어 낸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이놈들은 죄다 말단 졸개에 불과해. 여자를 납치해야 한다는 임무에 대해선 제대로 알고 있는 내용이 아무 것도 없어. 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다면…….』”
메멘토 모템은 스컬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인 스테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벽이, 외곽을 따라 스컬쉽을 구 형태로 감싸고 있었다.
“『배에 막이 둘러져 있어. 저 정도로 수준 높은 방어벽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것뿐인데…… 어지간한 수단으로는 뚫리지도 않게 생겼군 그래.』”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건가?”
“『지금의 너로선 저 정도 방어 수준을 뚫고 배까지 박살 낼 수 있는 마법은 못 써. 그러니까 평소에 던전 좀 더 돌지 그랬냐?』”
《커스 디바우러》의 부스트로 강화된 주문을 수차례 때려 박지 않는 이상, 배를 둘러싼 방어막을 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제는 익숙해진 메멘토 모템의 핀잔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스테치가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엘레나부터 깨워 줘. 바보가 아닌 이상 저쪽 배에서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금방 눈치챌 테니까.”
특별한 내성이 있지 않은 이상 자력으로 환상을 깨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타인의 의식에 간섭할 수 있는 메멘토 모템의 존재는 매우 귀중했다. 또한 모든 정신 계열 스킬이나 마법이 그러하듯, 한 번 깨진 정신 조작을 다시 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최대한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스테치의 말을 들은 메멘토 모템은 엘레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갑판 위의 적을 정리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허상의 적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중이었다.
메멘토 모템은 자신이 조종하던 스컬쉽 선원의 몸에서 빠져나와, 엘레나의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초점 잃은 눈에 빛이 돌아올 때 즈음. 존재하지도 않는 수백의 적들을 홀로 상대하던 엘레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크게 휘청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체내에서 피어오른 열기를 다스리느라 전신에서는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 어라? 적…… 적은 어디에…….”
혼란스러워 할 만도 하다. 폭우와 바람, 그리고 적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가짜에 불과했으니까. 메멘토 모템이 다른 사람들을 깨우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사내가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끈으로 묶어 놓은 스테치가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텔리어 씨? 이건 대체…….”
가명을 부르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지친 엘레나. 스테치는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누군가가 배에 탄 사람들 전원에게 강력한 환각을 보게 만든 것과 어째서인지 이유는 몰라도 백발의 여성이 납치되고 있었다는 것.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엘레나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카시아를 납치하려 들었다고요?”
“그게 저 사람 이름이었어?”
엘레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정신을 잃은 카시아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많고 많은 사람 중 하필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이 납치될 뻔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걸까.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요?”
“몰라. 누구도 그 이유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 선장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줄래? 난 그동안 저쪽에 뭣 좀 물어볼 일이 있어서.”
때마침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깨운 메멘토 모템이 반지로 되돌아왔다.
막 일어났을 때의 엘레나하고 한결같이 똑같은 반응에 쓴웃음을 지은 스테치는 카시아에게로 걸어갔다.
“아씨, 대체 왜 갑판 위까지 올라오신 건가요? 안전한 객실 안에서 기다리시라고 제가 누차 말했잖습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 와 있는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아씨는 항상 그게 문제십니다! 상회의 후계자로서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하셔야 되는데…….”
서로를 향해 목청껏 소리 지르는 남자와 카시아. 이대로 가다간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말싸움이 이어지자, 스테치는 손을 휘저어대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거기 둘, 이제 슬슬 그만 싸워!”
제삼자의 개입이 있고 나서야 입을 다무는 그들. 남자에게 우악스럽게 대하던 태도는 어디 갔는지, 카시아는 비교적 조심스럽게 스테치에게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저…… 실례지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려주실래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제가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거든요.”
“이 배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누군가에 의해 환각을 보고 있었어. 내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고, 그때 마침 널 납치하려던 무리가 있길래 몽땅 때려잡았지.”
스테치는 스컬쉽이었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납치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카시아는 물론이고, 옆에서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스테치를 흘겨보던 남자까지 덩달아 놀라워했다.
스테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 끝에 납치를 주도하던 스컬쉽의 선원이 포박되어 있는 것을 본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를 살펴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저희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소지품도 딱히 이렇다 할 만한 물건은 없고…….”
남자의 말투는 무례하게 굴던 초반과 달리 일말의 존중이 깃들어 있었다. 최소한 스테치에 대한 경계심은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어도 상관없어. 지금부터 저 녀석이 이 배 근처로는 접근조차 못하게 만들 테니까.”
때마침 저쪽에 뒤통수를 쓰다듬던 클라우디아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스테치를 주시하고 있었다. 엘레나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곤 큰 충격을 받았는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스테치가 손을 흔들고 나서야 클라우디아는 비로소 그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 비도, 시체도, 그레이 스컬쉽도 전부 환상이었다고?”
“보면 아시잖아요.”
“……이 빌어먹을 새끼들!”
클라우디아가 길길이 날뛰는 모습은 스테치조차 주춤하게 만들 정도였다.
자신을 그토록 겁먹게 만들었던 스컬쉽의 전설이 전부 가짜에 불과했던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감히 뱃사람들을 상대로 그레이 스컬쉽 이야기를 써서 우롱해?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들 같으니!”
“분한 마음은 잘 알겠지만, 지금 이 배의 화력과 제 마법을 합쳐도 저 스컬쉽을 침몰시키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적어도 도망치는 것은 할 수 있죠.”
스테치가 배의 후미 쪽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닻을 올리고 출발해 주세요, 선장님! 녀석들이 배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클라우디아는 선원들에게 바삐 명령을 내렸다.
개인적으로는 스테치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쓸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모두 써서 이 해역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영원히 멈춰 있을 줄 알았던 범선 찰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뒤늦게 그것을 눈치챈 그레이 스컬쉽도 허둥지둥 배를 따라나섰다.
미즌 마스트까지 걸어 올라간 스테치는 스컬쉽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합장했다. 마주 본 손바닥 사이에서 새하얀 기운이 어른거렸나 싶은 순간, 넓게 흩뿌려진 냉기가 수표면을 얼리며 뻗어져 나갔다.
쿠웅!
한참 잘 나가던 스컬쉽이 얇은 얼음에 부딪혀 저지되었지만, 스테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왕 멈추게 만드는 김에 다시는 추격을 재개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어 놓아야만 했다.
『커스 디바우러!』
“《아발란체》!”
마지막 남은 저주받은 아이템을 흡수하고 강화된 스테치의 손에서,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빙설이 펑펑 쏟아져 나와 바다를 얼리고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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