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00)
던전 견문록-100화(100/319)
# 100
던전 견문록
제 101 화
느슨하게 기울어져 있던 바디 벙커가 다시 수직으로 일어서고, 바닥을 향하고 있던 총구와 날붙이가 고개를 쳐들었다.
“아직, 아직 아니야.”
날카롭게 날을 세운 인간들의 예기에 호위 용병들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런 용병들을 향해 암상인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행스럽게도 용병들은 암상인의 통제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하지만 지금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지 말란 보장은 없었다.
실제로도 용병들은 여전히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킨 채 언제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하리마오 미궁 쪽에서 살기를 거둬야 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기에 저들이 이처럼 살기가 등등해진 것일까. 김진우는 하리마오 미궁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김주혁 차장과 김진태, 그리고 이준영 일행을 살펴보았다.
심각한 얼굴로 임프에게 계속해서 뭐라고 말하는 김주혁 차장의 모습이 보인다.
그 곁에 선 던전 베이비들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임프를 은근슬쩍 포위하는 모양새가 언제든지 인질로 삼으려는 모습이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결국 참지 못한 김진우가 암상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도대체 어떤 제안을 했기에 인간들이 저토록 살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김주혁 차장이라면 유연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수완이 있는 자였다.
“글쎄요. 이건 블랙 머천트와 흑호의 미궁 간의 거래라 자작님께 드릴 이야기가 없군요.”
오늘따라 암상인은 말을 아꼈다. 평소라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을 암상인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김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대 입으로도 말했지. 이번 거래는 단순한 미궁과 블랙 머천트의 거래가 아니라고. 근데 이제 와서 블랙 머천트의 행사라고 할 셈인가?”
“저야 존경하는 자작님과의 신뢰를 생각해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 있지요. 하지만 이번 거래는 제 담당이 아닙니다.”
임프를 내세우며 몸을 빼내는 암상인의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지만 김진우도 더는 암상인을 몰아세울 수 없었다.
아무리 임프가 암상인이 내세운 꼭두각시라고 해도 표면적으로 임프가 상행의 주체인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상행에 곁다리로 끼어든 군식구에 불과했다.
“아,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군요.”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김진우의 눈에 서로의 손을 맞잡은 김주혁 차장과 임프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에 보았을 때만 해도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는데 지금은 또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작님께서 걱정하신 사태는 오지 않았군요.”
눈을 가늘게 뜬 암상인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또다시 위화감이 들 정도로 무감정한 암상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김진우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암상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선택의 순간이 올 겁니다.”
평소라면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양손을 비벼대며 굽실댔을 암상인이 지금은 눈조차 피하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선택을 유보해 두었을 뿐입니다.”
***
하리마오 미궁을 다녀온 김진우는 왠지 모르게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정신적인 피로가 극도로 몰려온 탓이다.
하지만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왕좌에서 꼿꼿이 몸을 일으킨 그는 도미니크를 비롯한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블랙 머천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네?”
뜬금없는 말에 도미니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봐도 블랙 머천트는 평범한 상인 집단이 아니야. 분명 뒤에 누군가 있다. 그것도 이 지저를 좌지우지하는 누군가가.”
미궁을 귀히 여기는 암상인의 태도나 하리마오 미궁을 지워 버리려던 모습은 상인이라기보다는 지저의 관리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귀족의 인장을 매번 암상인이 가져오는 것도 이상했다. 하물며 귀족의 작위를 정하는 존재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한번 의문이 싹트자 의심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어요. 만약 블랙 머천트의 뒤에 누군가 있다면 그건 지저의 고위 귀족마저도 손댈 수 없는 존재일 테니까요.”
“드러내 놓고 알아볼 수는 없겠지. 하지만 방법이 있을 거다.”
그 역시 블랙 머천트의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온 지저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는 그 정보력과 자금력은 둘째 치고라도 이번 상행에서 만난 일백의 영웅급 호위 용병만 해도 어지간한 미궁 정도는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좋아. 대신 그만큼 은밀하게 알아보도록 해.”
괜히 블랙 머천트와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어쨌건 간에 나가의 요새가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블랙 머천트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절대로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벌써 방법을 강구하는 모양인지 생각에 잠겨 있던 도미니크가 한참이나 늦게 대답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지저의 일 처리를 마친 김진우는 지상으로 다시 올라왔다.
평소라면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백 선생의 감정소를 먼저 찾았을 그가 오늘은 곧장 가족을 찾았다.
암상인에 의해 머릿속에 떠오른 화두, 지저냐 지상이냐, 그 선택의 여파로 머리가 복잡한 탓이다.
“뭘 하느라 그리 바쁘니? 얼굴 까먹겠다. 종종 들러라.”
“죄송해요.”
말로는 그리 타박하면서도 어머니는 혹시라도 그가 배를 곯고 다니는 건 아닌지 상부터 차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밥상이 왠지 모르게 특별하게 느껴져 몇 번이나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무슨 일을 그리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지만, 몸도 챙겨가면서 해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잖니.”
변함없는 애정과 염려에 김진우의 마음이 조금이지만 가벼워졌다.
***
[속보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미궁들이 정체불명의 단체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정확한 피해 상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미궁을 점거당한 곳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달그락거리는 설거지 소리를 자장가 삼아 소파에 누워 있던 김진우는 귀를 파고드는 아나운서의 음성에 눈을 번쩍 떴다.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이 미궁들은 공격 받기 전에 소속 불명의 집단의 방문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이번 공격과 그들이 무관해보이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뉴스에서는 대체 어떻게 입수한 것인지 소속 불명의 미궁이 공격당하는 영상도 떠올라 있었다.
[크아아아아!]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것인지 녹색의 어지러운 화면에는 각양각색의 크리쳐가 마구잡이로 날뛰어대고 있었다.
총성이 울려 퍼지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크리쳐들은 멈추지 않았다.
모자이크 처리된 녹색 화면에 가득 떠오르는 참상에 김진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화면에 보시는 바와 같이 미궁은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며, 지저 전문가들은 이 크리쳐들이 각국이 보유한 미궁이 위치한 층과는 어울리지 않는 높은 등급의 크리쳐들이라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이 미궁에도 말이에요, 생태계라는 게 있어요. 깊이 내려갈수록 강한 놈들이 있고 약한 놈들은 위로 밀려나는데 말이죠. 지금 미궁을 공격한 크리쳐들은 절대로 5층이나 초입에서 보일 만한 놈들이 아닙니다. 저건 적어도 8층, 9층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놈들이란 거죠. 근데 그런 놈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십, 수백이나 올라왔다는 건 지저의 생태계가…….]전문가라고 나와 떠들어대는 나이 지긋한 사내의 얼굴을 보며 김진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화면을 보는 내내 그는 블랙 머천트의 호위 용병들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지저에 안위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 설 경우, 핵을 회수할 생각입니다.’
암상인이 차갑게 지껄여 대던 모습도 떠올랐다. 혹시 하는 생각에 리모컨을 잡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본 그는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타국의 지저에도 암상인과 같은 존재가 있다면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다.
아마도 공격당한 미궁들은 블랙 머천트와 비슷한 단체들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영웅급에 이르는 수많은 용병들이 미궁을 지워 버린 것이리라.
“아…….”
정신없이 뉴스를 바라보고 있던 김진우는 뒤늦게 설거지 소리가 멈췄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을 한 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 요즘에도 지저에 다니니?”
한참 만에 꺼낸 어머니의 말에 김진우는 변명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탓이다.
“진우야.”
어머니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
“언제부터니?”
“현지 결혼하기 바로 전쯤일 거예요.”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어머니의 질문에 김진우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게 다 엄마, 아빠 죄다. 우리가 무능해서 널 다시 그 끔찍한 곳으로 내몰았구나. 우리가 죄인이야.”
처음에는 한탄처럼 시작한 말이 끝에 가서는 결국 흐느낌이 되었다. 그가 지상에 채 녹아들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보인 광증을 보며 몇 년을 힘들게 보내온 가족이다.
그런 그들이니 그가 다시 지저를 찾아야 한 이유가 가족에게 있음을 알고 어찌 절망하지 않을까.
“우리가 죄인이야.”
“아니에요, 어머니.”
그 누구보다도 그가 지저에서 어떤 끔찍한 꼴을 당해왔고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어머니인지라 좀처럼 흐느낌을 멈추지 못했다.
“미안하다, 진우야. 미안하다.”
자식 손에 피를 묻히고, 그 피 묻은 돈을 받아 딸을 시집보내고 또 자신들이 건사해 왔으니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간 생활비나 용돈 명목으로 김진우가 보내온 돈이 적지 않은 탓이다.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벗어나려면 얼마든지 벗어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야 뭣도 몰랐다지만, 미궁의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당에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지저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저를 붙잡고 있는 것은 김진우 본인이었다. 아니, 어쩌면 짐승처럼 살아온 토굴꾼 시절의 망령일지도 몰랐다.
“어머니, 그런 게 아니라고요. 울지 마세요.”
하지만 지저 공작에 대한 복수심을 어찌 말로 설명하겠는가. 어머니의 시름이 더욱 깊어질 것을 뻔히 아는지라 그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했다.
“미안하다, 진우야.”
“아니요. 제가 죄송해요.”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을지라도 두 모자가 서로에게 건네는 사과의 말에는 애틋하고도 가슴 아픈 무언가가 있었다.
[속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보유한 미궁 역시 정체불명의 집단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어머니의 가녀린 어깨를 몇 번이고 쓸어 만져주던 김진우는 귀를 파고드는 앵커의 비명과도 같은 음성에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