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03)
던전 견문록-103화(103/319)
# 103
던전 견문록
제 104 화
#41. 소환석
백 선생의 감정소를 나선 김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주혁 차장의 발 빠른 결단 덕에 5층에 남아 있던 하리마오 미궁의 잔존 병력은 대부분 구출되었다.
미궁에 몰려든 크리쳐들에게 시달린 탓에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기는 했지만, 이준영을 비롯한 정찬식 일행은 전원 무사한 모양이었다.
물론 하리마오 미궁의 주인이던 김진태는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었지만, 인연이 깊다면 깊은 이준영이 살았으니 그것으로 그는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는 별개로 지상의 상황은 혼잡했다. 세계 각국의 미궁 중 대부분이 공격을 당했고, 그중 상당수가 통제권을 상실했다.
심한 경우에는 미처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통신이 두절된 곳도 있었으니 지상이 시끄럽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휴전 이후로 처음으로 회합이 있을 모양이야. 한두 군데도 아니고 거의 모든 미궁이 일시에 공격당했으니 무리도 아니지. 각국의 지저관리사무소와 탐색자들은 일전의 공격이 지상을 향한 무력 도발인지, 아니면 지저에서는 흔히 있는 세력 다툼인지를 파악한다고 지금 난리도 아니라네.’
백 선생 역시 혼잡한 틈을 타 한몫 챙겨보겠다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미궁의 주인이 그런 것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미궁과 운명을 같이한다니 낭만적이지만 그런 위험천만한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 자네가 미궁의 주인 자리를 고사한 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네.’
어쩜 그렇게 뻔뻔한지, 한때는 지저개발국의 테스트를 받아보라며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백 선생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싹 바꿔 버렸다. 그 모습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휘저어 머릿속에서 백 선생의 모습을 털어냈다.
“음.”
휴대폰을 잡은 그가 통화 목록에 남은 이준영의 이름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그녀,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지만 그는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김진태와의 의리 탓에 마지막까지 항전을 부르짖던 이준영이다. 불리한 전장에서 다소 과격하게 결사항전을 강요한 태도가 문제되어 그녀는 평판마저 잃고 말았다.
그 정도로 동료와의 의리를 중시하는 그녀이건만, 안젤라에게 김진태의 암살을 지시한 자신이 무슨 낯이 있어 얼굴을 들이민다는 말인가.
그간 알게 모르게 미묘한 감정이 오고 간 사이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제는 서로를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목숨을 구원한 것으로 감정적인 빚을 청산하고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을 생각이다.
어줍지 않은 감정놀음에 하마터면 많은 것을 잃을 뻔했다. 나름대로 고심하여 몸을 빼낼 구멍 정도는 만들어두고 참견했지만 결과가 좋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된 일은 아니었다.
“포탈.”
언젠가부터 머리가 복잡할 때면 습관적으로 지저를 찾게 되었다. 지금 역시 포탈을 넘어 텁텁한 공기를 들이마시기가 무섭게 머리가 맑아졌다.
이래서야 스스로가 지상인인지 아니면 지저의 존재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바쁘게 오가는 도미니크와 나가들을 본 그의 얼굴이 평소의 빛을 찾았다.
“얼어붙은 땅과 요새가 완전히 연결되었습니다. 시험 삼아 36시간 동안 활성화된 게이트의 상태를 유지한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로 보입니다.”
왕의 조언자라는 직책을 얻은 뒤로 부쩍 카리스마가 생긴 도미니크의 보고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중간에 일이 생기기는 했지만 어쨌건 간에 나가의 요새는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56개의 봉토에서 보내오는 던전 에너지는 요새 내의 나가 일꾼들이 하루 종일 작업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에너지를 제공해 주었다.
마침 팍팍해져 가던 자금 상황이 덕분에 빠르게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요새의 업그레이드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아직도 재료를 구하지 못했나?”
“블랙 머천트에 의뢰를 하기는 했지만, 그쪽도 수소문해 봐야 할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요.”
“끄응. 좋다 말았군.”
그간 비축해 온 물자로 막힘없이 업그레이드를 해왔지만 8등급만큼은 풍부한 물자로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운 잼뿐만 아니라 별도의 재료가 필요한 탓이었다.
“도대체 이 땅속에서 무슨 수로 해룡의 심장을 구하라는 건지.”
수룡이라면 미궁의 앞마당에 한 마리 있었다. 하지만 이 땅속 어디서 바다의 용을 찾아 그 심장을 구한다는 말인가. 황당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해룡의 심장이 필요한 것은 자신이고 무정한 시스템 메시지는 따져봐야 반복적으로 같은 말만 내뱉을 뿐이다.
“다운 잼이 얼마가 들든지 간에 최우선적으로 해룡의 심장을 구하도록.”
“명심하고 있어요. 순찰자들도 미궁을 순회하며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 블랙 머천트든 순찰자들이든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고 올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도미니크의 위로에 한숨을 내쉰 그는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보다 서리 요정족의 전사들은 어떻지?”
“솔직하게 말하면 저번 전쟁에서 이긴 게 천운이에요. 이들 중 반만 나섰어도 마지막 전투에서 우리는 절대 이길 수 없었어요.”
“그 정도인가?”
“퀀투스조차 서리 요정족 다섯을 상대하지 못해요. 오르테아가 역시 일곱을 넘기지 못하고요.”
“어마어마하군.”
보레아스의 휘하에 있다 새롭게 합류한 400의 삭풍의 전사단은 마치 심층 귀족의 저력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듯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그간 업그레이드에 업그레이드를 반복해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나가 투사들과 용사들이 그 반절도 되지 않는 삭풍의 전사단에게 무참하게 당할 정도이니 그 힘을 알 만했다.
나가 용기사들만이 호법룡과 쌍을 이루어 그나마 동수를 이루었을 뿐이다.
“강한 전력이 손에 들어온 것은 좋아할 일이지만, 그만큼 10층 귀족들의 저력이 대단하다는 이야기이니 마냥 좋아할 수도 없군.”
“다음 전투는 저희 병력이 층간 페널티를 감수하고 싸워야 해요. 사실상 제대로 활용 가능한 전력은 삭풍의 전사단이 유일하다고 봐야 해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전승의 사령관이란 이름을 얻은 게 용할 지경이다.
만약 처음부터 10층의 전력이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모리건을 파르테논에게 내어주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페널티를 벗어난 10층의 전사들은 강력했다.
“아, 그러고 보니 파르테논 놈이 모리건과 바꾸자고 보낸 고대 영웅의 소환석이 남아 있군.”
모리건을 얻은 뒤로 워낙에 정신없이 사건에 휘말린 탓에 고대 영웅의 소환석을 잊고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그는 품을 뒤적거리다 인상을 찌푸렸다.
“망할…….”
“주인님?”
김진우가 해쓱해진 얼굴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주인님, 갑자기 어디…….”
“연구실!”
초조함이 가득 섞인 대답에 도미니크의 얼굴도 와락 일그러지고 말았다.
***
“내놔!”
캬아아.
김진우의 성난 음성에 상급 나가 마법사들이 시치미를 뗐다. 아무래도 핵의 연구를 통해 재미를 본 기억이 남아 있는 탓인지 나가 마법사들은 시선을 피할 뿐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소환석을 내놓지 않았다.
“내놓으라고! 소환석!”
크에에에!
그가 몇 번이고 화를 내니 그제야 상급 나가 마법사 중 하나가 주춤거리며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런 미친!”
대체 그간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고대 영웅의 소환석은 처음의 영롱한 빛도 온데간데없이 이리저리 실금이 간 상태였다.
“이, 이이!”
하도 어이가 없고 화가 나 손가락을 내민 그가 말까지 더듬어댔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대 영웅의 소환석을 두고 온갖 실험질을 해댄 나가 마법사들의 만행에 치가 떨렸다.
“아…….”
뒤늦게 그를 따라 도착한 도미니크도 빛바랜 소환석을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내가 미쳤지. 다른 것도 아니고 이걸 잊고 있었다니.”
연구실의 중앙에 놓인 조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에 이리저리 소환석을 비춘 김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핵을 회수할 때 소환석도 같이 회수해야 했다. 모리건을 소환한 대가로 전쟁까지 감수해야 한 기억이 있는데다 보내온 인물이 파르테논인지라 그 저의를 알 수 없어 묵혀둔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깨지거나 손상된 것 같지는 않아요.”
“만약 소환석에 이상이 생겼으면 네놈들은 다들 죽은 목숨이다.”
이를 갈아붙이는 김진우의 모습에 상급 나가 마법사들이 어울리지 않게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마치 멋대로 핵의 합성을 시도했다 호되게 혼났을 때와 똑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빛바랜 소환석을 품에 소중히 갈무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이따금씩 눈을 번뜩이는 탐욕스러운 마법사들의 눈길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 있다가는 괜한 사고가 생길 것 같았다.
“제길, 망가진 건 아니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영웅급 소환석이다. 사용해 보기 전까지는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또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없었다.
모리건의 경우야 아나톨리우스가 친절하게 내용물까지 알려주었다지만, 파르테논이 보내온 이 고대 영웅의 소환석은 당최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리건을 불러.”
“퀀투스와 오르테아가도 부를까요?”
혹시라도 모리건처럼 앞뒤 모르는 전쟁광이 나올지 몰라 그는 만약을 대비했다.
“아니. 모리건이면 충분하겠지.”
만약 통제 불능의 소환수가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모리건과 자신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호오, 그건 고대 영웅의 소환석이로군요?”
모리건이 눈을 빛내며 소환석을 바라보았다.
“파르테논이 보낸 놈이다. 그대와 교환하는 조건이었지.”
“욕심만 많은 놈이 제법 양보했군요.”
“답례라면 충분히 보냈어.”
비록 그 답례라는 것이 지상에서 공수해 온 폭탄 다발이었다지만 그는 당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르테논은 한때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10층의 귀족까지 충동질한 적이다. 이제 와서 새삼 미안하고 고마울 것도 없었다.
“끄응. 주인님은 정말 교활하고 악랄합니다. 그리고 비겁하기도 하고요.”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은 나쁘지 않군.”
그간 이런저런 일을 겪어오며 정정당당한 선의라는 것이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한 것인지를 깨달은 김진우인지라 모리건의 비아냥거림에도 그는 당당했다.
“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들지요.”
모리건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그가 괜스레 핀잔을 주었다.
“건방지군. 감히 주인을 평가하려고 하다니.”
“나름 애정 표현입니다.”
처음 깨어났을 당시의 모리건은 이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젤라와 어울려 다니다 보니 물들어 버린 모양이다. 긍지 높고 팍팍하던 전사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능글맞은 까마귀 한 마리였다.
“끄응. 말을 말아야지.”
결국 본전도 못 건진 김진우는 가만히 소환석을 바라보다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이 소환석을 전에도 본 적 있나?”
“글쎄요. 제가 워낙에 깨어 있던 시간이 짧아서.”
지저에 쌓아둔 원한만 산더미 같다는 모리건이니 깨어 있는 시간보다는 소환석 안에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욱 길었을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그가 질문을 달리 했다.
“감당할 수 있겠어?”
듣자 하니 고대 영웅 중에 쓸 만한 놈은 전부 심층 귀족들 곁에 이미 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파르테논이 보내온 소환석에서 제대로 된 놈이 나올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물 먹인 9층의 하급 귀족 나부랭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개중에 가장 골치 아픈 놈을 고르고 골라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궁금하십니까?”
김진우의 질문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리건이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도발적인 시선으로 소환석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좋아, 믿도록 하지.”
김진우는 씨익 웃어 보이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환석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