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06)
던전 견문록-106화(106/319)
# 106
던전 견문록
제 107 화
#42. 악몽
그는 눅눅한 지저 세계의 주민이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그는 지저 세계의 주민들에게 사육당하는 가축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려서는 정체도 모를 괴수의 젖을 어미의 젖 대신 빨며 자라왔고, 조금 커서는 희미한 불빛만이 전부인 울타리 같은 곳에서 온갖 오물과도 같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다. 그에게 있어 그 넓지 않은 닭장과도 같은 세상은 삶의 전부였다.
어둡고 무엇 하나 놀 거리가 없었지만, 그는 우리 안의 다른 존재들과 어울리며 하루하루를 평안하게 살아왔다.
기다리면 조악한 음식이나마 먹을 수 있었으며, 졸리면 누워서 잘 수 있었다. 좁디좁은 세상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늑하기만 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그의 다리 사이에 거뭇거뭇한 체모가 나기 시작하고 몸이 굵어지자 그는 닭장 밖으로 내쳐지고 말았다.
좁지만 아늑하던 그의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없었으며, 광활하고 넓은 바깥세상은 그에게 더욱 혹독했다.
생경한 세계에서 그에게 처음 주어진 것은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자루 하나. 그것으로 그의 삶은 정해져 버렸다.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는 흙과 돌을 퍼 날라야 했다.
어두운 곳에서도 빛나는 외눈을 한 존재가 항상 그를 감시했다. 아니, 그를 감시한 것이 아니라 흙을 퍼 나르는 모든 이들을 감시했다.
간혹 보이는 왜소한 체구의 일꾼들은 힘에 부치는지 간간이 작업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거미 감독관은 가차 없이 매질을 했다. 작업 일로인 현장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생경한 소리였다.
끔찍하기만 한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소리가 날 때면 남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비명의 여운을 즐겼다. 가학적인 욕구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이 단조로운 작업장에서 그것만이 일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조그만 여흥은 길지 않았다. 왜소한 체구의 일꾼들이 곧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 뒤로도 작업장은 평소와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 역시 그 안에 녹아들어 흙과 돌을 퍼 나르고 또 퍼 날랐다.
그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작업에 몰두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무언가 소명 의식이 있어서 쉬지 않고 일한 것도 아니고, 포악한 감시자의 폭력이 무서워서 부지런히 몸을 놀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태어나서 처음 주어진 무언가에 몰입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없다면 그는 도저히 이 무료한 작업장에서 견딜 수가 없던 탓이다.
그렇게 흙과 돌을 퍼 나르며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금씩 그의 작업장이 토굴의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굴이 시작되는 공터에서 흙더미를 정리하던 것이 이제는 제법 깊은 굴속까지 들어가 자루를 메고 오게 되었다.
조그만 변화였지만 그는 기뻤다. 지루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그는 자신이 굴 안으로 조금씩 전진해 가는 것을 새로운 놀이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몰두하던 놀이가 사실은 그를 죽음의 늪으로 잡아끄는 끔찍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이제는 커다랗게 자라 버려 자잘한 근육으로 뒤덮인 몸을 한 그에게 자루가 아닌 무언가가 주어졌다.
난생처음 보는 생김새를 한 그것은 기다란 막대 끝에 휘어진 쇳덩이가 달려 있었다.
꽤나 단단해 보이는 재질을 한 쇠붙이는 그 끝이 뭉툭했지만 무언가를 파내기에는 제법 적합해 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그때 받은 것은 곡괭이였다. 또한 곡괭이라는 단어를 알려준 존재는 자신들이 토굴꾼이라는 사실을 알려줬고, 곡괭이를 받는다는 것은 곧 죽을 때가 가까워진 것이라고 했다.
지저 세계는 끝없이 이어진 땅굴과 미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저 세계의 주민 대부분은 비좁은 공터에서 살아갔으며, 평생을 이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 역시 지저 세계의 주민이 아닌지 착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토굴꾼이라는 단어를 알려준 존재는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게도 자신들은 선택 받은 지저 세계의 주민이 아니라 지저 공작들의 미궁을 확장하는 노예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때 그는 노예라는 말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비루한 음식과 고된 노동, 자유 없는 존재들에 대해 울분을 토하는 눈앞의 존재가 도리어 이상해 보였다.
배가 고플 만하면 밥을 먹는다. 또한 졸음이 오면 아무 곳에서나 누워 잠을 청한다. 노예가 무엇이 나쁘고 화가 나는 것인지 그 당시의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언어가 아닌 사념으로 주고받은 대화였는지라 그는 그 기회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쇠한 상대는 사념을 조절할 기력조차 없는지 여과 없이 그의 일생을 보여주었다.
이제 와서 그가 돌이켜 기억하기에는 많은 일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 일을 통해서 막혀 있던 입이 뚫렸고,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작업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곡괭이질을 하면서도 그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려댔다. 주변을 오고 가는 수많은 존재 중에서 몇몇이 그런 그에게 흥미를 보였다.
다들 하나같이 자신의 이름을 떠들어대는데 그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그저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하루 즐겁게 작업을 해나갔다.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는 굴의 절반이 넘도록 깊은 곳에 들어가게 된 그는 더욱 많은 존재를 만났다. 항상 입을 쉬지 않는 그를 보며 수없이 많은 이들이 ‘떠버리’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자신도 이름을 갖게 되었나 했더니 곁을 지나가던 이가 별명은 이름과 다르다고 말했다.
상심한 그는 이름이라는 것을 스스로 짓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는 것이 원체 적어서 그럴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앞을 잘 보지 못해 주변에서 괄시당하던 존재였는데, 그를 발견하자 반색했다.
그에게 반갑다 인사하던 존재는 수다쟁이처럼 입을 놀렸지만 그다지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기억이 난다면 오직 하나, 그의 이름뿐이었다.
김진우.
이름만이 그의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어둠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던 그는 역시나 며칠이 되자 작업장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수많은 존재가 그렇게 작업장에서 사라졌지만 그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웠기에 이제 와서 사라진 일꾼들에 대한 것은 그에게 있어 굳이 관심을 둘 필요도 없는 하찮은 일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김진우라는 남자가 사라진 일은 그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작업장에서 사라진 이들이 다시 나타나는 일이 없었기에 그는 앙큼한 꾀를 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한 능동적인 생각이다. 그는 김진우라는 이름을 자신이 쓰기로 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작업장에서 쉴 새 없이 입을 놀려댔는데, 일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내 이름은 김진우다!’ 하고 떠드는 통에 모두가 고통스러워했다.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거미 감독관의 매질에 온몸을 두들겨 맞아야 했다. 생소한 고통에 몸을 움츠렸지만 그는 이름이 생겼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기뻤다.
다음날 생경한 고통에 작업하는 것이 곤욕스러웠지만 그는, 아니, 김진우는 여전히 입을 놀려댔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일꾼 중 몇몇이 안쓰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들이 보기에 김진우는 사육된 가축과도 다름없었다. 자유가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타성에 젖어 작업만 하는 김진우의 모습은 그들이 기억하는 마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해 보였다. 고된 작업과 자신에게 남은 절망적인 미래에 좌절한 자신들보다 더욱 행복해 보였다.
누구보다 가엽지만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존재.
김진우는 그들에게 기이한 존재였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혼자 떠들기 바쁘던 김진우의 주변에 하나둘 일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 작업장에 오기 전에 목수였고, 변호사였고, 또 군인이었고, 기술자였다. 또 가수였고, 요리사였으며,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김진우에게 해주기 시작했다. 그때 김진우는 처음으로 배웠다.
말하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김진우는 그들을 통해 노래하는 가수가 되었으며, 군인들을 호령하는 장교가 되었다. 또 들뜬 마음으로 빵을 굽는 제빵사가 되기도 했다.
그들로 인해 김진우는 조금씩 자아를 갖춰갔다.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며, 자신이 갖지 못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절망했다.
자신이 이 토굴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들과 다르게 푸른 하늘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며,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이한 표정 속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는 그럴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진우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끼니를 거르기 시작했고,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그들 주변에 몰려든 일꾼들은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챘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한번 닫힌 김진우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고, 그들 사이에서 그토록 빛나던 존재는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다.
작업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 김진우를 대신해 주변의 일꾼들이 하나둘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아는 무언가를 그에게 전해주기 바빴다. 자신들에게 미래가 없음을 진즉부터 알고 있던 그들은 김진우를 통해 무언가를 남기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늦든 빠르든 김진우도 자신들과 같은 미래를 맞이하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빛을 잃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알려주고 설명해 주는 데 필사적이었다.
김진우는 이제는 습관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곡괭이질을 했다.
하나둘 그의 주변에서 다른 존재들이 사라져 간다.
문득 김진우가 주변이 조용해졌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의 주변에서 떠들어대던 존재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무렵이었다.
그는 김진우에게 말해주었다.
자신들은 지저 세계의 공작들이 운영하는 미궁의 일꾼이라고. 전방으로 갈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며, 언젠가 이 토굴이 다른 토굴과 만나는 순간이 자신들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라고.
이제는 그마저도 김진우의 곁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생전 처음 보는 존재들이 앞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울 거라 생각한 거미 감독관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덩치에 살벌한 생김새를 한 거대 거미들은 그의 주변을 빠르게 지나갔다.
난생처음 보는 살기에 바짝 얼어버린 김진우는 그들에게서 도망치듯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선두에 도착한 순간 그가 그토록 보기 바라던 존재들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곡괭이질을 하던 그들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김진우를 보며 경악했다.
“이 멍청아! 여기는 왜 왔어!”
자신을 대한민국 육군 병장이라고 소개한 존재가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자신에게 소리를 지른 존재는 처음이었다.
포악한 거미 감독관도 매질을 할 때 묵묵히 긴 다리를 놀려댔을 뿐이다.
뭔지 모를 감정이 뒤섞인 일꾼의 고함에 김진우는 왠지 눈시울이 뜨뜻해졌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일꾼들이 몰려들었다.
“이걸 어쩐다. 형태야,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전에 자신이 군인이었다고 소개한 일꾼이 바로 곁의 일꾼에게 물었다.
“몰라! 바로 코앞이야! 저쪽에서 뚫고 들어오니 얼마 못 갈 거야!”
왜인지 절박한 그의 외침에 일꾼들이 비장한 표정을 했다.
“나, 나는 그냥… 다, 당신들이…….”
어눌한 발음으로 일꾼들을 향해 입을 연 김진우, 그를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에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화낸 거 아니야. 그러니 울지 마.”
처음에 고함을 친 일꾼이 김진우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타인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은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왠지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일꾼들은 그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저 죽을 자린 줄도 모르고 이곳에 찾아온 김진우가 너무도 가여웠다.
“잘 들어, 진우야.”
철컥거리는 쇳소리가 굴의 안쪽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토굴의 막다른 곳, 그 벽 너머에서 기이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토굴꾼이야. 최전방에서 굴을 파는 존재라고.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다른 미궁의 토굴 직전까지 굴을 팠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부사관 출신의 일꾼이 김진우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이 벽이 사라지고 나면 이곳은 전쟁터가 될 거야.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가장 약하고 하찮은 존재야. 적군도 아군도 우리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꾼의 말에도 김진우는 눈만 끔벅거렸다.
“안 되겠다, 진우야. 그냥 내 말대로 해. 이 벽이 무너지고 나면 어떻게 해서든 몸을 숨겨. 그리고 아무 소리가 나지 않을 때까지 나오지 마. 절대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궁금해도 주변이 조용해지기 전까지는 나오지 마. 알았지?”
앞의 말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김진우였지만, 그저 숨어 있으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꾼들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꼭 숨어 있어.”
“넌 꼭 살아야 해.”
“가련한 우리 진우.”
모두가 한마디씩 하며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 품이 너무도 따뜻해 김진우는 언제까지고 그 품에 안겨 있고 싶었지만 이미 일꾼들은 몸을 돌린 후였다.
왠지 아쉬운 감정에 손을 내밀어보는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온 굉음. 철컥거리는 소음이 이제는 바로 등 뒤에까지 다가서고 사방에는 알 수 없는 고함 소리가 들어찼다.
“토굴이 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