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08)
던전 견문록-108화(108/319)
# 108
던전 견문록
제 109 화
“디나리온이다. 다른 이들은 나를 악몽의 군주라 부르더군.”
사내, 아니, 디나리온의 웃음은 윤희의 그것을 지독스럽게 닮아 있었다.
“망할 놈. 거지같은 꿈을 꿨다 했더니 네놈 탓이었군.”
평소라면 심층의 백작에게 이렇게까지 막말을 하지 않았을 김진우이지만 오늘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꿈속의 세계인 탓인지 아니면 가장 기억하기 싫은 토굴꾼 시절을 떠올렸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무의식 중 일부를 다른 이에게 보여줬다는 것이 꽤나 불쾌한 경험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미안하게 됐군. 애초에 내 능력이 이런 것이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디나리온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미안하다 지껄여 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밉살맞은지 김진우는 턱 끝까지 차오른 욕설을 애써 삼켜야 했다.
“이것이 그대의 악몽인가?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아.”
김진우가 꿈이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 멈춰 버린 세상, 그 눅눅하고 더러운 토굴을 바라보던 디나리온이 짧게 감상을 말했다.
“닥쳐! 멋대로 남의 꿈을 들여다본 주제에!”
“이거야 원, 단단히 미움을 사버렸군.”
태연자약한 얼굴을 본 김진우가 이를 까드득 갈아붙이고 물었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냐?”
악몽의 여파 탓인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릿속을 간신히 정리한 그가 용건을 물었다. 심층의 백작이나 돼서 아무런 용건도 없이 이렇게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디나리온은 따로 용건이 있었다.
“딸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너무 주책맞아 보이는가?”
“윤희 문제로 찾아왔군.”
이쯤 되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 거지같은 꿈에서 깨어나려면 디나리온의 볼일이 먼저 끝나야 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돌리는 법 없이 디나리온의 말을 받아주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딸을 그대가 거두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제 돌려달라기라도 할 참인가?”
김진우의 날 선 질문에 디나리온이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어차피 내 손을 벗어난 딸이다. 이제 와서 애비 행세를 할 생각은 없다. 물론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녀는 제법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군.”
“그렇다면 찾아온 용건이 뭐지?”
새삼 양육권을 주장할 생각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찾아왔는지 이유가 짐작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김진우는 억지로나마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경고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느물느물한 표정을 지운 디나리온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다.
“경고?”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애매한 대답에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만간 파르테논이 움직일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그가 설명을 더 해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제법 깜찍한 선물을 줬다지? 그 덕분에 답례를 하려는 모양이야.”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다른 백작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11층의 상황을 제법 잘 알고 있군. 철혈의 아나톨리우스가 말해준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파르테논의 원한이 깊다 해도 다른 백작들의 견제가 있는 한 쉽사리 몸을 빼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진우는 파르테논이 움직일 거란 말에도 그다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아나톨리우스를 믿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군. 이번에는 아나톨리우스도 그대를 돕지 못할 테니까.”
“어째서지?”
“이유는 알려줄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장담하지. 아나톨리우스는 파르테논이 영지를 텅텅 비워놔도 움직일 수 없어. 단 하나의 기사도 출병시키지 못할 거야.”
뭔가 11층의 판도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묘하게 확신에 찬 디나리온의 말에 김진우는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나톨리우스의 견제가 없다면 파르테논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삐가 풀린 파르테논은 건방진 까마귀와 나가의 왕을 짓밟기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층간 페널티가 존재하는 이상 파르테논은 절대로 나가의 요새에 닿을 수 없었다.
“11층을 벗어난 파르테논의 군대 따위 가소로울 뿐이다.”
“속단하지 말라.”
디나리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했다.
“심층의 백작들은 그대의 생각보다 몇 배는 더 집요하고 교활하다.”
아무래도 층간 페널티를 벗어날 방법이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디나리온이 이처럼 강하게 경고할 리 없었다.
“조심하도록 하지.”
“알아들었으니 다행이군. 교만과 아집은 그대를 좀먹을 뿐일지니.”
용건은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입을 다문 디나리온은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처럼 몸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한 가지 묻겠다.”
그의 말에 흐릿해지던 디나리온이 다시 또렷해졌다.
“불패의 용병, 그대가 보낸 것인가?”
디나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미하게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김진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크라스토와 그 용병대는 분명 디나리온이 보낸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디나리온은 그에게 꽤나 호의적이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그대에게 무운이 있기를.”
“잠깐!”
이번에야말로 작별을 고하는 디나리온을 김진우가 잡았다.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디나리온을 향해 그가 차갑게 웃어 보였다.
“음?”
왠지 모르게 섬뜩한 미소에 디나리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순간 김진우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꿈 값은 받아가야지, 이 개자식아!”
***
잠에서 깨어난 디나리온은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얼굴을 산산조각 낼 듯 짓쳐들던 주먹이 아직도 생생한 탓이다.
“큭.”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뺨을 매만지던 디나리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하하하하!”
작은 균열과도 같던 실소가 이내 소리쳐 웃는 대소가 되었다. 무엇이 우스운지 디나리온의 웃음은 한참 동안 끊이지 않았다.
“윤희가 제법 좋은 패를 뽑았군.”
마침내 웃음을 멈춘 디나리온은 왕좌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렸다. 그런 그의 시선이 마치 어둠을 넘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가엾고 사랑스러운 딸아, 애석하게도 너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 부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버둥치고 살아남기를 바라노라.”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을 한 디나리온의 말이 어둠 속에서 메아리를 쳐댔다.
***
김진우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디나리온 탓에 희미하게 색 바랜 과거의 망령이 또렷해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의 이지석, 장교 출신의 장기수, 요리사 출신의 오현일, 기술자 출신의 이지웅, 기자 출신의 정영태.
잊고 있던 이름이 오래되어 희미해진 상처의 딱지처럼 올라왔다.
“주인님?”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일까. 도미니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아, 미안. 좋지 못한 꿈을 꿔서.”
“악몽이라도 꾸신 건가요?”
성큼 다가온 도미니크의 눈망울에 염려가 가득하다. 그 순수한 호의와 신뢰를 보고 있자니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어설프게나마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도미니크.”
“네, 주인님.”
“파르테논이 움직일 모양이다.”
그는 빠르게 디나리온과의 대화를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도미니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파르테논의 군대가 제 힘을 유지한 채 9층에 올라온다면 아무도 막지 못할 거예요.”
“11층의 백작의 본대라면 필시 그럴 테지.”
하기야 아나톨리우스가 쓸모없다 여겨 내버린 발자크가 나가의 요새에서는 강자 축에 포함되었다. 그런 지경이니 백작의 힘이 9층과 비할 수 없음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지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미니크는 불패를 입에 올렸다. 아무래도 무언가 좋은 묘안이 있는 모양이다.
“방법이 있나?”
“네. 제게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다른 이도 아니고 도미니크의 말이다. 그녀가 호언장담하는데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야말로 나가의 요새가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해 온 진정한 조언자였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소환석 생산이 끝나면 도미니크가 가장 좋은 것을 취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주인님.”
온 9층을 다 헤집어놓으며 별의별 크리쳐를 전부 끌고 왔다. 그렇게 모아온 크리쳐들이 소환석의 재료가 되고 있으니 곧 나가의 요새는 넘치는 소환석을 주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소환석들은 나가들이 성장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리라.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무슨 일이 있으면 파티 홀로 전갈을 보내도록.”
왕좌에서 일어난 김진우는 포탈을 열었다. 쩍 하고 아가리를 벌린 공간을 넘어 그는 파티 홀에 도달했다.
“왕이시여.”
마침 오너 룸에 있던 것인지 윤희는 그를 보자마자 황급히 왕좌에서 내려왔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그 자리에 앉은 김진우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악몽의 군주를 만났다.”
“아…….”
늘 표정이 없던 그녀도 이번만큼은 허를 찔렸는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을 했다.
“혹시…….”
“아니. 디나리온은 그대를 돌려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어.”
기대라도 한 것일까.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그 기색을 놓치지 않고 지켜본 그가 물었다.
“미련이 남은 건가?”
“이제 와서 미련이 있을 리가. 그저 놀랐을 뿐이다.”
금세 평정을 찾은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과연 디나리온도 그럴까?”
“그게 무슨…….”
언젠가 윤희는 스스로의 입으로 얘기했다. 자신이야말로 디나리온의 가장 사랑받는 딸이라고. 그리고 실제로 디나리온을 만나본 김진우 역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덕분에 그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디나리온은 윤희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는 어쩌면 윤희가 경매장까지 흘러들어 온 사실 모두가 디나리온의 입김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톨리우스는 11층의 판도가 변하기를 바랐지. 그리고 어쩌면 디나리온 역시 무언가 변화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의 말을 들은 윤희는 대답도 없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김진우는 한마디를 남겨놓고 파티 홀을 떠났다.
“생각할 시간을 주마. 너라면 디나리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겠지.”
***
암상인을 통해 아나톨리우스의 전갈이 도착했다.
“정말이었군.”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읽어본 김진우는 신음을 내뱉었다. 디나리온의 예견처럼 아나톨리우스는 자신의 발이 묶였으며, 파르테논을 더 이상 견제할 수 없게 되었노라 말했다.
그리고 그에 아울러 파르테논이 절망의 사제단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암상인의 말에 김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그대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 11층에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혹시나 해서 물었건만 암상인은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일인가?”
이번에도 암상인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피했다.
“알았다. 편지 잘 받았으니 그만 물러가 보도록.”
파르테논의 침략이 현실적으로 다가온 지금, 암상인과 노닥거릴 시간은 없었다.
당장 우서를 불러들여 10층에 탐식의 덩어리를 퍼뜨리고 보레아스의 미궁, 얼어붙은 땅을 정비해야 했다.
11층에서 올라온 파르테논의 군대를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건 보레아스와 그 전사들이 될 테니까.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건가?”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암상인이 떠나지를 않고 머뭇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