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09)
던전 견문록-109화(109/319)
# 109
던전 견문록
제 110 화
#43. 전쟁준비
“혹시 말입니다.”
한참이나 입을 오므렸다 폈다 반복하던 암상인은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부탁? 내가 그대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게 있던가?”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는가 싶어 김진우가 암상인의 얼굴을 보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암상인은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대 개인의 부탁인가, 아니면 블랙 머천트의 부탁인가?”
“굳이 따지자면 제 개인의 부탁이라고 볼 수 있습죠.”
이제껏 자신의 편의를 봐준 암상인이라면 간단한 부탁 정도 들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뭐지?”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고, 이번 일이 다 해결되고 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군.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면 들어주도록 하지. 단, 대가는 있어야 할 것이야.”
“이를 말입니까요. 셈은 정확할수록 서로에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것치고는 시원시원한 대답이다. 고개를 끄덕인 김진우가 손을 휘저었다.
“그럼 이야기는 그때 가서 다시 하는 걸로 하고.”
파르테논의 수작을 분쇄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당장은 전쟁 준비에 전념해야 한다며 암상인을 내쫓았다. 그런데 암상인은 미궁을 떠나며 유용한 정보를 주었다.
나직한 암상인의 설명을 전부 들은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확실한 정본가?”
“어이쿠, 제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자작님께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하겠습니까요.”
사안이 사안이라 그렇게 물으니 암상인이 펄쩍 뛰었다. 까칠까칠한 턱 끝을 쓰다듬은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암상인을 노려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뭐지?”
“자작님께서 평안하셔야 제 부탁도 들어주실 거 아닙니까. 그냥 선금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요.”
암상인의 얼굴에 떠오른 비굴한 표정을 본 그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선금을 받았으니 꼼짝없이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게 생겼군.”
“하나만 더 말씀드리자면, 방금 말씀드린 정보는 저도 목숨을 걸고 드린 정보입니다요. 절대로 다른 곳에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참고만 하시기를.”
은근히 압박을 넣어오는 암상인의 말에 김진우가 코웃음을 쳤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군. 제 입으로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겠다고 하고, 선금으로 준 정보가 목숨을 담보로 준 정보라니. 뭐, 좋아. 전쟁이 끝나고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그렇게만 해주시면 감사드릴 뿐입지요.”
그 말에 암상인이 활짝 웃어 보이고는 미궁을 떠났다.
***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파르테논을 상대할 준비를 하겠다며 한참을 보이지 않던 도미니크이다. 그런 그녀가 김진우의 부름을 받고 오랜만에 오너 룸을 찾았다.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나?”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도미니크의 호언장담에 그가 슬쩍 물었다.
“대체 그 방법이 뭐지?”
“음…….”
그간 말을 아끼던 그녀이지만 이렇게 물어오니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조심스레 입을 연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파르테논의 군대를 요격할 생각입니다.”
“요격?”
“네. 영지에서 전투를 한다면 증폭 효과를 받아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까딱 잘못했다가는 교룡왕 아낙스투스와의 전쟁 때처럼 미궁이 쑥대밭이 되고 말아요.”
거대 교룡의 난입으로 무너져 뻥 뚫려 버린 미궁의 공터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에야 워낙에 미궁의 시설 자체가 보잘것없었으니 복구가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 그런 피해를 입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분명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언장담을 할 정도로 대단한 계획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약간이지만 실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도미니크의 계획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나톨리우스의 전언에 의하면 파르테논은 정예 중의 정예인 절망의 사제단을 출정시킬 예정이라 했다. 직접 상대해 본 적은 없지만, 최소한 철혈의 기사단 정도의 전력은 되겠지. 그런데 그런 그들을 무슨 수로 요격한다는 말인가?”
만약 우려대로 층간 페널티를 극복할 방법이 있다면 절망의 사제단을 막을 이는 9층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전원이 영웅급으로 이루어졌을 게 뻔한 막강한 군대를 대체 무슨 수로 이긴다는 말인가.
인상을 찌푸린 그의 표정에도 도미니크는 여전히 자신감에 찬 얼굴이다.
“만약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그렇겠지요.”
“달리 생각이 있나?”
그 표정이 하도 당당해 그렇게 물으니 그녀가 오너 룸에 배치된 지저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저희는 몰이를 할 겁니다.”
“몰이? 10층도 아니고 무려 11층의 군대다. 그게 말처럼 쉬울까?”
10층의 귀족연합군을 몰이하는 데도 어마어마한 공을 들여야 했다. 그러고도 그들의 진격로를 비틀지 못해 제2안, 제3안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전력 자체의 비교가 불가능한 11층의 군대를 무슨 수로 몰이를 한다는 것일까.
그의 말에 도미니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희가 몰이할 건 파르테논의 군대가 아니랍니다.”
“뭐?”
그녀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몰이할 상대는 절망의 사제단이 아니라 10층의 크리쳐들입니다.”
***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소환석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소환석은 우선적으로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지급되었다.
가장 먼저 도미니크가 상질의 소환석을 받아 들었고, 퀀투스와 오르테아가, 그리고 릭샤샤와 발자크가 그녀를 따라 소환석을 받았다.
모리건과 헤임달은 스스로 소환석의 섭취를 거부했다.
그것이 자신들이 소환석을 통해 소환된 존재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인지 모르지만 김진우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왕의 은총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혜로운 채찍질로 알고 더욱더 노력하겠나이다.”
퀀투스와 릭샤샤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감사를 표했고, 오르테아가와 발자크는 소환석을 받아 들고 희희낙락한 얼굴로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가 보는 앞에서 바로 소환석을 섭취했다.
[나가 용사(영웅급) 퀀투스가 소환석을 섭취합니다.] [언더 엘프 순찰자(?) 릭샤샤가 소환석을 섭취합니다.]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사방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당장에라도 온 미궁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은 빛과 힘의 파동이 심상치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도미니크가 왕의 조언자로 거듭나던 것과 같은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릭샤샤가 영웅급에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나로는 성에 차지 않는데…….”
게 눈 감추듯 소환석을 먹어치운 오르테아가가 입맛을 다시며 들으란 듯이 말했했다.
“욕심이 많은 놈이로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은 김진우가 그렇게 타박을 주면서도 소환석을 몇 개 더 분배해 주었다.
“어이쿠, 이런 황송한 일이 있나! 내 충성을 다하겠소!”
오르테아가가 다시 소환석을 섭취하고, 추가로 지급된 소환석을 다소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다른 이들 역시 잇따라 소환석을 삼켰다.
“다시.”
“다시.”
하지만 그렇게 소환석을 몇 개씩이나 지급해도 그가 바라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도미니크가 특별한 경우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그가 소환석의 지급을 끝내려는데 갑작스레 릭샤샤의 몸에서 이제껏 있어온 섬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빛이 터져 나왔다.
[언더 엘프 순찰자(영웅급) 릭샤샤가 소환석의 힘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됐어!”
메시지를 본 그가 왕좌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그와 릭샤샤를 번갈아 바라보며 오르테아가가 입맛을 다셨다.
“쩝. 나도 몇 개만 더 먹으면…….”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소환석을 요구하는 오르테아가였지만, 이미 김진우의 시선은 릭샤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도미니크가 허물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것처럼 릭샤샤는 끝이 오므려진 나무 열매 모양의 껍데기에 둘러싸여 있다.
도미니크가 그러했듯 그녀 역시 완전히 섭취하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필요한 모양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김진우가 오르테아가와 발자크를 보며 눈을 번뜩였다.
“오늘 배 터지게 한번 먹어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그의 품에서 소환석이 뭉텅이로 나왔다.
***
소환석을 받은 것은 도미니크를 비롯한 수뇌들뿐이 아니었다.
그간 전쟁과 사냥을 겪으며 개중에 영웅급 소환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추려 따로 소환석이 분배되었다.
도미니크와 다른 이들이 받은 소환석보다는 다소 크기도 작고 빛깔도 엉성했지만 그들의 가능성을 테스트해 보기에는 충분했다.
실제로 소환석을 받아 든 이들 중에 영웅급에 오른 이가 다수 있었다.
나가 용기사 중에 셋이 영웅급에 올랐으며, 나가 마법사와 사제 중에서도 두 명씩 영웅급 존재가 탄생했다.
용사와 투사들 중에도 추가적으로 각기 한 명씩 영웅급 소환수가 추가되었으니 요새의 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강력한 일반 병력에 비해 다소 빈곤하던 영웅급 소환수들의 전력이 단 번에 강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오너 룸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릭샤샤에 이어 퀀투스가 허물 속으로 파묻혔고, 발자크 역시 철의 석상처럼 변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왜 나만!”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변태의 과정에 들어서지 못한 오르테아가가 억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무래도 기본 그릇이 다르니 저 드라칸만 변화가 생기지 않은 모양이에요.”
발광을 하는 오르테아가를 보며 도미니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데 왜 도미니크는 소환석을 섭취하지 않지?”
정작 본인은 분배 받은 소환석을 고이 품에 안고 있는지라 김진우가 물으니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나중에 따로 시간을 주세요. 여기서는 좀…….”
드물게 말끝을 흐리는 그녀를 보며 김진우가 피식 웃어 보였다.
전에도 어딘가에 숨어 소환석을 섭취한 도미니크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변태의 과정을 겪는 것이 부끄러운 눈치였다.
그의 미소를 본 그녀가 더욱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뭐 없어요?”
그 다정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안젤라가 못마땅한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
“소환석은 그대가 거부하지 않았는가.”
“저희 일족에게는 소환석보다는 생혈을 섭취하는 게 훨씬 더 효율이 좋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그의 손목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운 그가 딴청을 피우다가 호야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수인족이라고는 하나 탐색자들을 상대로 발군의 전투력을 보여준 호야인지라 다른 이들과 똑같이 소환석을 분배해 주었다.
그런데 소환석을 받은 호야는 소환석을 섭취하는 대신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던지며 저글링을 하고 있다.
“호야.”
소환석을 가지고 놀던 호야가 그의 부름에 냉큼 달려왔다. 소환석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그 바람에 허공에 떠 있던 소환석들이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져 부서질 뻔했다.
다행히 안젤라가 재빨리 받아 들었기에 망정이지 귀한 소환석을 잃을 뻔했다.
“끄응. 착하지. 이거 먼저 먹자.”
혼을 내는 대신 아이 다루듯 부드럽게 몇 번을 권해보았지만, 호야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주인의 말이라면 끔찍이 따르던 그녀가 이렇듯 거부하는 것을 보니 수인족은 소환석을 섭취할 수 없거나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말을 가르치든가 해야지 원.”
경매장에서 본 수인족 여인은 말만 잘하던데 어찌 된 것이 요새의 수인들은 하나같이 벙어리였다.
답답한 심정에 그가 그렇게 말하니 호야가 까르륵 웃으며 그에게 달라붙어 뺨을 비벼댔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거울 망령들 차지로군.”
호야를 간신히 떨어뜨린 김진우가 소환석 뭉치를 들고 거울망령의 미궁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