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10)
던전 견문록-110화(110/319)
# 110
던전 견문록
제 111 화
#44. 거울 망령
평소처럼 포탈을 열고 공간의 문을 넘어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내디뎠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기괴한 광경이 그를 반겨준 탓이다.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이게 무슨……!”
그런 김진우의 눈앞에 거울 망령들이 앵무새처럼 그의 말을 따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 모습이 낯이 익다 못해 익숙할 지경으로 망령들의 얼굴이 그의 얼굴과 똑같았다.
발가벗은 몸 위로 수십 마리의 송충이 떼가 떨어져 내린 듯한 느낌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
왕좌에 앉은 김진우의 얼굴이 더없이 창백했다. 파리한 입술과 푹 꺼진 눈두덩에 깊은 피로감이 서려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기에 차 있던 그를 생각하면 잠깐 사이에 일어난 변화라고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방금 전에 겪은 일은 지저에서 온갖 꼴을 다 보았다고 자부하는 스스로도 치가 떨릴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적의와 살의가 끓어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앞을 얼쩡거리는 그림자를 볼 때마다 치솟는 살심을 억누르느라 진땀을 뺐다.
“끄응.”
한참을 왕좌에 앉아 끙끙거리던 김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를 흉내라도 내듯 바닥에 앉아 있던 망령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망할…….”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망령 수십이 눈을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본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건 정말 위험해.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위협받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은 그가 고개를 돌렸다. 거울 망령들을 더 보고 있다가는 스스로의 분노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지를 뜯어내고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존재마저 지우고 싶은 충동. 그래서 그는 결국 품에 싸들고 간 소환석을 써보지도 못하고 거울 망령의 미궁을 떠나야 했다.
“주인님?”
그때까지만 해도 분배 받은 소환석을 품에 안고 오너 룸을 떠나지 않고 있던 도미니크가 그의 창백한 낯빛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라면 그녀의 말에 사정을 설명해 주었을 그도 이번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아직까지 털어내지 못한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을 떨쳐내기 위해 이를 악다물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자신이 생각보다 위험한 존재를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하고 고개를 쳐든 의문에 그의 고민이 깊어졌다.
김진우는 그 뒤로 거울 망령의 미궁을 방문하지 않았다. 생명체라면 당연히 존재하는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 더없는 스트레스로 다가온 탓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간의 도피에 불과했을 뿐, 거울 망령의 미궁이 5등급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순간 그는 다시 한 번 거울 망령의 미궁을 찾아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오늘은 어쩐 일로 망령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를 반겨준 것은 눈앞을 가득 메운 메시지 창이었다.
[미궁의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미궁의 등급이 4등급에서 5등급으로 격상됩니다. 잠겨 있던 시설들이 새롭게 활성화되었습니다.] [그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거울 망령의 왕 에스페스토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제단 위에 솟아난 희끄무레한 형체가 조금씩 형태를 갖추다가 이내 완전히 제 형상을 갖추었다.
“아…….”
혹시라도 또 거울 망령처럼 제 모습을 흉내 내는 건 아닐까 우려하던 김진우는 에스페스토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페스토는 회색의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모습으로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 까만 그림자만 깊게 져 있다.
“아아아아…….”
[온갖 것을 비추는 거울, 그리고 그 안에 웅크린 망령들의 왕 에스페스토가 깨어났습니다.] [거울 망령의 왕 에스페스토가 충성을 맹세합니다.]너풀거리며 바닥에 엎드린 망령이 기괴한 음성으로 울어댔다.
[영혼을 비추는 자, 망령들의 왕 에스페스토가 나가의 요새에 합류했습니다.] [실체 없는 망령들의 왕은 산 자가 죽기 전에 본 자신의 환영과도 같습니다. 거울 망령의 왕은 지저에서 가장 끔찍한 흉내쟁이이자 유능한 마술사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거울 망령 일족은 잠들어 있던 일족의 왕을 맞이하며 비로소 하나의 당당한 종족이 되었습니다.] [거울 망령들은 타인의 모든 것을 약탈하는 끔찍한 강탈자이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왕인 에스페스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에스페스토는 왕이라는 호칭에 걸맞지 않게 나약합니다. 텅 빈 영혼을 채울 무언가를 찾기까지 그는 다른 거울 망령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에스페스토의 능력을 일부 공유합니다.]메시지 창을 확인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거울 망령의 본질 자체가 흉내를 내는 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탓이다.
그리고 지금 대외적으로 존재 자체가 비밀인 거울 망령들은 미궁 밖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볼 수 있는 존재라고 해봐야 그들의 주인이 유일했다.
그 말은 결국 그들이 흉내 낼 대상이 그밖에 없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도 에스페스토의 형체 없던 얼굴이 서서히 형상을 갖춰가는데 그 이목구비가 낯익었다.
“그만! 그만!”
저도 모르게 치솟아 오르는 살심에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니 그제야 에스페스토가 변화를 멈췄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가 중지된 얼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아 그 모습이 꼭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불쾌한 광경에 김진우가 낮게 경고했다.
“어느 누구도 내 모습을 흉내 내지 말라.”
“아아아아…….”
다행스럽게도 에스페스토는 그의 말을 이해했는지 더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무너진 얼굴로 빤히 그를 들여다볼 뿐이다.
왠지 모르게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말간 시선에 몸서리를 친 그가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절대 따라 하지 말라.”
그제야 시선을 거두는 에스페스토였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뱉은 김진우가 재빠르게 왕좌에 앉아 미궁의 시설을 업그레이드했다.
한시라도 빨리 거울 망령의 미궁을 벗어나고 싶은 탓에 그의 입과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망령 소환.”
“시설물 업그레이드.”
“미궁 업그레이드.”
소환석을 만드는 데 대부분의 다운 잼을 소모한지라 자금이 그다지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5등급 미궁을 6등급으로 업그레이드하기에는 충분했다.
미궁의 핵이 찬란하게 빛나며 울려대기 시작하고, 수없이 많은 망령들이 제단에서 튀어나와 미궁을 바삐 오가며 시설물의 건설과 증축에 열을 올렸다.
“음?”
한참을 미궁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김진우는 기묘한 위화감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에스페스토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없이 유령처럼 선 에스페스토의 모습이 언제 변한 것인지 도미니크의 얼굴과 똑같았다.
영혼을 비추는 자, 강탈자, 흉내쟁이.
뒤늦게 그는 거울 망령이 훔쳐 내는 것이 외적인 부분뿐 아니라 산 자의 모든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소름 끼치는 모습에 한마디를 하려던 김진우는 왠지 에스페스토의 모습이 도미니크와는 다소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검은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 섬세한 이목구비에 유려한 몸의 곡선 등 모든 것이 유사했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으니 뱀의 하체가 있어야 할 곳에 쭉 뻗은 다리가 있었다.
“주인님.”
그런 그를 보며 도미니크의 모습을 한 에스페스토가 말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듣기 좋은 도미니크 특유의 음성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낸 에스페스토의 모습에 그가 멍하니 두 눈을 껌벅거렸다.
“실체 없는 이 망령을 부디 긍휼히 여겨주소서. 실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음이니 누군가를 따라 하지 않으면 결국은 사라지고 마는 가엾은 종의 업을 살펴주소서.”
“아…….”
에스페스토의 설명에 김진우는 뒤늦게 미궁을 다시 찾았을 때 망령들이 자신의 모습을 흉내 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울 망령들은 누군가의 모습을 훔쳐 내지 않으면 결국 살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으니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를 따라 한 모양이다.
간신히 혼란을 수습한 그가 물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도미니크의 모습을 따라 할 수 있었지?”
“감히 주인의 의식을 일부 엿보았나이다. 벌하신다면 달게 받겠으나 부디 왕께 봉사할 영광만큼은 거두지 마시옵소서.”
그것 역시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이미 디나리온을 통해 경험한 것이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과거와 기억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궁금한 점을 푸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그는 애써 표정을 다잡고 에스페스토를 다그쳤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도미니크지?”
그의 질문에 에스페스토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주인께서 저희의 존재를 탐탁찮아 하심을 느끼고 부디 어여삐 여겨주십사 하는 마음에 가장 신뢰받는 존재의 모습을 흉내 내었나이다. 얕은꾀가 불쾌하셨다면 벌하여 주소서.”
“그런데 왜…….”
불편하기는 했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완벽에 가깝게 흉내 낸 에스페스토가 하체만큼은 인간의 모습을 한 이유를 알 수 없어 그 까닭을 물었다.
“이것이 주인님께서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인 탓이나이다.”
***
“주인님?”
왠지 모르게 얼굴을 빨갛게 상기시킨 도미니크가 그를 불렀다.
“아, 응?”
“혹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니. 왜?”
“근데 왜 자꾸 저를 쳐다보시는지…….”
그녀의 수줍은 음성에 뒤늦게 자신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은 김진우가 헛기침을 했다.
“아,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묘하게 아래를 향한 그의 눈길이 길고 유려한 그녀의 꼬리를 향해 있다.
그게 꽤나 부끄러운지 도미니크가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몸을 비비 꼬아댔다.
“주인님, 자꾸 그렇게 쳐다보시면 제가 일을 할 수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왠지 모르게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괜스레 민망해진 김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도미니크.”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는 다시 도미니크를 불렀다.
“네, 주인님.”
“혹시 말이야.”
오너 룸의 중앙에 놓인 지도를 보며 열심히 무언가를 궁리하던 그녀가 그의 부름에 곧장 대답해 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가 망설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가 중에 다리가 있는 나가도 있어?”
뜬금없는 질문에 도미니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뒤늦게 자신이 무엇을 물었는지 깨달은 그가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대체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스스로를 자책한 그가 도망치듯 오너 룸을 떠나려 하는데 도미니크가 다소 늦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나가라고 다 이렇지는 않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장 존귀한 나가들에게는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서는 영광이 허락되었답니다.”
“아, 그래?”
“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요?”
“아무것도 아니야.”
도미니크의 질문에 고개를 휘휘 저은 김진우가 오너 룸을 떠나는데 어쩐지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