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11)
던전 견문록-111화(111/319)
# 111
던전 견문록
제 112 화
#45. 진정한 왕
“음.”
낮은 신음과 함께 잠에서 깬 김진우는 어두침침한 조명에 눈을 끔벅거렸다. 잠시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가 싶더니 금세 주변의 사물이 명확하게 들어왔다.
또 미궁의 침실에서 잠이 든 모양이다.
근래 들어 먹고 자는 것마저도 미궁에서 하고 있으니 이제는 자신이 지저의 존재인지 지상의 인간인지조차 모호할 지경이다.
게다가 디나리온을 만난 이후로는 악몽을 꾸는 횟수가 빈번해졌다.
아무리 잠을 자고 또 자도 피곤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정신, 그는 힘껏 얼굴을 찌푸렸다 펴며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 생각한 지저의 텁텁한 공기가 오늘따라 유독 갑갑하게 느껴졌다.
슬슬 지상에 올라갈 때가 온 모양이다.
‘이 빌어먹을 지옥을 떠나 바깥세상을 알기 전에는 절대 죽어선 안 돼.’
악몽 속에서 들려오던 정영태의 유언이 화인처럼 남아 심장 어림이 화끈거렸다.
과연 지금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일까. 기껏 볕 따스한 지상을 알게 되었는데 지저를 다시 찾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한참을 고민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주인님?”
그 순간 도미니크가 들어왔다.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보이는 창백한 피부를 보며 김진우는 어쩐지 스산한 기분이 들어 몸을 바짝 일으켰다.
“안색이 좋지 않아요.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신지요?”
나긋나긋한 음성에 금세 걱정이 깊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다.
“몸살 기운이 있는 모양이야.”
처음에는 핑계랍시고 되는 대로 주워섬겼는데 그러고 보니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숨도 가쁜 것이 컨디션이 영 좋지를 않았다.
“몸살이요?”
지저의 존재인 도미니크는 몸살이라는 증세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나갔다 와야겠어.”
아무래도 지상의 병원이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니 도미니크가 곤란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무래도 파르테논의 침공이 눈앞까지 다가온 지금, 변태 과정에 들어간 전력의 공백이 있어 그의 부재 시에 생길 사고를 우려하는 눈치다.
하지만 다른 어느 무엇보다 주인의 안위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녀인지라 만류의 말 대신 조심히 다녀오라고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
그렇게 미궁을 나선 김진우는 지상의 병원을 찾았다.
“어디가 안 좋으시죠?”
하얀 가운에 냉막한 인상을 한 중년의 의사는 어울리지 않는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열도 좀 있고 숨도 가쁘고 몸이 무겁습니다.”
“흐음. 기침이나 가래는 없으시고요?”
“네.”
형식적인 질답이 오가고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감기약을 처방해 주었다.
“뭐, 요즘 유행하는 감기 같기도 한데 일단 처방해 드린 약 좀 드셔보고 차도 없으면 다시 와주세요.”
지극히 상투적인 멘트를 인사 대신 남긴 의사는 다시 차트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 모습이 미묘하게 신경에 거슬린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으니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다.
근래 들어 잠도 제대로 자지를 못했고 휴식이 절실했다. 그래서 그는 지저로 가는 대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곧장 침대에 누웠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을 먹기도 전에 금세 잠에 빠진 그는 한참 후에야 깨어났다.
“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킨 그는 뒤늦게 약을 챙겨 먹었다. 그런데 물병의 뚜껑을 덮는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그가 누워 있던 침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다.
하도 오랜만에 찾은 집이라 먼지라도 쌓인 것인가 싶어 손으로 쓰윽 밀어내니 부스러기가 금세 손에 달라붙었다.
바삭거리는 그 기묘한 감촉에 손을 들어 확인해 본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각질 같기도 하고 흐물흐물한 비닐 같기도 한 기묘한 부스러기가 눈에 익은 탓이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는 이내 부스러기를 휴지통에 털어냈다.
“끄아아아.”
기괴한 신음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편 김진우가 욕실을 찾았다.
자는 사이에 한껏 땀을 흘린지라 씻을 생각으로 옷을 벗어둔 그는 티셔츠 상의 안쪽에 잔뜩 묻어난 각질을 보고는 손을 뻗어 등판을 확인했다.
피부 사이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 그는 거울 앞에 서서 등을 비춰보았다.
이런저런 흉터로 뒤덮인 등판의 이곳저곳에 묻어난 얼룩이 눈을 찌를 듯이 들어왔다. 살색 피부와는 대조적으로 푸른 빛깔, 눈을 부릅뜬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각질 부스러기라 생각하던 것은 벗겨져 떨어져 나간 피부 조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 나간 피부 아래 보이는 것은 결 곱게 돋아난 비늘이었다.
“비늘?”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다. 도미니크를 비롯한 나가들 탓에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비늘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붙어 있다.
“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으로 몇 번이고 등판을 쓸어냈지만 비늘은 마치 처음부터 피부와 한 몸이던 것처럼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비늘을 쓸어내는 손길이 조금씩 과격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피부를 뜯어낼 듯 사납고 포악해져 버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 이제는 피마저 보일 지경이건만 푸른 비늘은 얄밉게도 처음 보았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
갑작스레 몸에 돋아난 비늘, 당연하게도 미궁과 관련이 있으리라. 그래서 김진우는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곧장 지저를 찾았다.
“주인님 오셨어요?”
도미니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영롱한 비늘 가득한 꼬리를 바라보고 말았다.
“주인님?”
그 노골적인 시선에 도미니크가 몸을 비비 꼬았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홀린 듯이 그녀의 꼬리를 바라보던 그가 결국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제길.”
비록 색이 다르기는 하지만 자신의 등에 돋아난 비늘과 완전히 똑같았다. 마치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한 기분, 갑작스러운 한기에 몸이 떨려왔다.
그리고 시큼한 것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이내 악취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꺅! 주인님!”
도미니크의 비명 소리가 조금씩 멀어진다 싶더니 이윽고 완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금세 눈앞이 까맣게 바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의식을 잃었다.
***
김진우는 꿈을 꾸었다. 아주 길고 긴 꿈을.
하지만 잠에서 깨었을 때 기억이 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이 나는 것이라고는 그저 펄펄 끓어오르는 몸을 식혀주는 기묘한 한기와 부드러움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중에 그 차갑고 부드러운 것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음…….”
그런데 그 차갑고 부드러운 물체가 기묘한 신음을 내뱉었다. 듣는 순간 미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도미니크?”
마치 밤하늘을 펼쳐둔 것처럼 검고 영롱한 머릿결, 그 아래 위치한 작고 동그란 이마와 아름다운 이목구비, 그가 꿈결에 그토록 애타게 끌어안고 어루만진 것은 도미니크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주인님?”
타이밍이 안 좋아도 이렇게 안 좋을 수가 없었다. 곤히 잠들어 있던 도미니크가 깨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아, 도미니크가 여긴 왜…….”
미처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깨어난 그녀 탓에 괜스레 당황스러웠다. 그런 그를 보며 눈을 깜박이던 도미니크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주인님!”
***
“그러니까, 지금 2주나 지났다는 말이지?”
“네. 온몸에 열이 펄펄 끓어올라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도미니크의 얼굴을 보며 그가 신음을 내뱉었다. 잠깐 어지럽다 싶더니 그렇게 2주가 지나고 말았다.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다.
“이제는 정말 괜찮으신 거죠?”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열이며 어지럼증에 엉망이던 컨디션이 평소대로 돌아와 있다.
아니, 오히려 의식을 잃기 전보다 몇 배는 몸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몇 번이고 다행이라며 혼잣말을 되뇌는 도미니크를 보던 그가 뒤늦게 상황을 물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파르테논의 침공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지라 혹시라도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싶은 탓이다.
“파르테논의 군대는 이미 패퇴되었어요.”
“뭐?”
김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11층 심층의 백작이 파견한 군대를 어떻게 막았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런 그에게 도미니크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주인님은 안 계셨지만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실행해야 했어요. 10층의 도적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고,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은 보레아스님이 직접 나서서 처리했어요. 그렇게 파르테논 군대의 진격로를 막아버렸죠.”
파르테논의 군대가 10층 귀족들의 청을 받아 도적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고 거짓 정보 공작에 나선 것이 주효한 모양이다.
그녀는 도적들이 필사적으로 절망의 사제단을 합공했고 그들의 진격을 늦추는 데 성공했었다 말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언감생심 11층의 군대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실제로도 그들은 발목을 붙잡는 것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으니까요.”
하기야 10층의 귀족들도 어쩌지 못해 웅크린 도적들이 파르테논의 정예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나가들이 어떻게 파르테논을 막았는지 설명을 이어갔다.
“도적들이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을 무렵, 불패의 용병단이 출정했답니다. 그리고 보레아스님의 삭풍의 전사단이 함께했죠.”
도미니크의 설명에 김진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불패의 용병단과 삭풍의 전사단이라면 10층에서 파르테논의 군대를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아 있었다.
“누가 대체 그들을 움직였지?”
불패의 용병단과 맺은 계약은 온전히 김진우에게 일임된 것, 의뢰주의 요청도 없이 그들이 출병을 허락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보레아스 역시 지금은 패배하여 웅크리고 있다지만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존재, 쉽사리 명령을 들을 이가 아니었다.
“거울 망령의 왕.”
도미니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에스페스토를 이용했답니다.”
***
“아…….”
일전에 에스페스토의 이야기를 스치듯 했더니 그걸 기억해 내고 꼼수를 낸 모양이다.
도미니크의 말에 김진우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을 했다.
“그게 통했다고?”
“보레아스님께는 간곡히 협조를 구했고, 불패의 용병단은 아무래도 주인님과 접점이 적은 탓인지 쉽게 넘어왔어요.”
비록 도미니크의 기지로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완벽하게 대신한다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인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그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쨌건 절망의 사제단은 불패의 용병단을 보고 바로 퇴각했어요. 아무래도 쟁쟁한 용병단을 상대로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우리 요새를 응징할 각오는 없었던 모양이에요.”
뭔가 싱거운 결말이었다. 절망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허무한 퇴각이고 패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도미니크가 기지를 발휘한 덕에 얻은 승리이고 결코 공짜로 얻은 결과는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최악의 경우 요새는 9층 전체를 아우르는 그 강대한 전력을 써보지도 못하고 심장을 관통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감히 주인님의 이름을 사칭한 죄, 달게 받겠어요. 부디 벌하여 주세요.”
바닥에 엎드린 그녀가 그렇게 벌을 자청했다.
감히 주인의 이름을 빌려 쓴 죗값을 받겠다는 것이다. 분명히 위험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는 벌을 주는 대신 오히려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그렇게 대충 상황을 정리한 김진우는 그제야 자신이 쓰러진 이유를 물었다.
“대체 내가 왜 쓰러진 거지?”
2주간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면 이유가 있을 터, 곁에서 지켜본 도미니크라면 필시 그 이유를 알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짐작대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주인님은 지금…….”
도미니크가 보랏빛 영롱한 눈을 빛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진정한 왕이 되는 과정에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