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12)
던전 견문록-112화(112/319)
# 112
던전 견문록
제 113 화
김진우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에 얼빠진 얼굴을 했다.
“진정한 왕?”
그런 그를 보면서도 도미니크는 여전히 확신에 차 입을 놀려댔다.
“네. 가장 존귀한 단 하나의 나가, 그게 바로 왕이니까요.”
나가의 왕. 이제껏 수백, 수천 번을 들어온 소리건만 지금만큼 머리를 울려댄 적은 없었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동안에도 그녀는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주인님은 이제 더 강하고 더 현명하고 더 존귀한 분이 되는 거예요.”
“내가 나가가 되는 건가?”
결국 차마 묻지 못한 질문을 꺼내놓고 김진우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만약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된다면 아마 스스로도 견디지 못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 인간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니요.”
예상과 다른 대답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나뿐인 왕은 나가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일 뿐.”
“그게 무슨 말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에 반문하니 그녀가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모습이 변하는 것은 왕이 아니라 저희 나가들이랍니다.”
***
홀로 남은 김진우는 조심스레 등 어림을 쓸어보았다. 여전히 느껴지는 딱딱한 비늘의 감촉이 이질적이지만 처음 비늘을 발견했을 때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평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변이에 대한 부담을 완전히 털어낼 수 있었으니 더 이상 마음 졸일 이유가 없었다.
‘저희에게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저희는 그저 왕의 거울이자 그림자일 뿐이랍니다.’
도미니크는 모습이 변하는 것은 왕이 아닌 일반 나가들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오랜 세월 지저에 존재해 온 나가들이 종을 이어온 방법이라 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나가들에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몰랐다.
탐식의 덩어리들, 그리고 몽마, 반인반마와 난쟁이들까지 어쩌면 그들 역시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태어난 건 아니리라.
‘지금 주인님의 모습이 변한 것은 미궁의 힘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육체가 재구성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에요. 변화가 끝난다고 해도 주인님이 지금의 저희들처럼 꼬리가 달리고 비늘이 온몸을 뒤덮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조금 더 나가라는 이름을 계승한 왕의 모습에 걸맞게 변화할 뿐이에요.’
도미니크는 그가 무엇을 우려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확언해 주었다.
우습지만 그 말을 들은 그는 안도했다.
“휴우.”
뒤늦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날카롭게 곤두섰던 긴장이 뒤늦게 풀린 기분,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무지란 이렇게나 두려운 것이다.
모를 때는 그렇게나 두렵고 꺼림칙하더니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우습지만 차라리 기대감마저 생길 지경이다.
이 모든 변화가 끝났을 때 얻을 그 강대한 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가의 왕이라…….”
무심결에 흘러나온 혼잣말이 조용한 오너 룸을 울려댔다.
***
[듀라한(영웅급) 발자크가 진화했습니다.] [발자크가 듀라한(영웅급)에서 ‘죽음의 기사(정예)’가 되었습니다.] [살아생전 그토록 영예로웠지만 한스러운 죽음으로 더럽혀진 목 없는 기사의 저주가 마침내 풀리고 말았습니다. 살아생전 추구하던 스스로의 명예와 영광 대신 그는 왕의 명예와 승리를 위해 기꺼이 전장에 나설 것입니다.]변화를 끝낸 발자크의 겉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기괴하게 옆구리에 끼고 있던 머리통을 온전히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두었을 뿐이다.
[죽음의 기사는 개인의 무력뿐 아니라 부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대단합니다. 발자크가 참전하는 전투에서는 모든 망자와 사자들이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특수 능력 ‘사자(死者)의 포효’를 얻었습니다. 지옥에서나 들릴 법한 이 끔찍한 괴성은 살아 있는 존재들의 몸을 굳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몸이 굳은 적은 망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것입니다.]“으하하하하! 왕이시여!”
발자크는 경망스럽게 웃으며 그의 발치에 엎드렸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머리통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으련만 변화된 육신의 머리통은 단단하게 고정이라도 된 모양인지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 않았다.
“그 머리통, 이제 완전히 붙은 건가?”
아무리 괴물이 넘쳐나는 지저라지만 머리 없는 기사는 다소 으스스한 감이 있었다. 바람직한 변화에 그렇게 물으니 발자크가 양손을 들어 머리통을 뽑아 보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단단한 머리통입니다.”
자랑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지만, 이제는 발자크의 단순무식한 행동도 익숙해진 그인지라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발자크의 변화를 확인한 김진우가 이번에는 퀀투스를 살펴보았다.
[나가 용사(영웅급) 퀀투스가 진화했습니다.] [퀀투스가 용사(영웅급)에서 ‘나가 친위대(정예)’가 되었습니다.] [주인의 승리를 위해 제 한 몸 불사르던 이 용맹한 전사는 이제 더욱더 커다란 승리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나가 친위대는 왕을 지킬 때 비로소 제 힘을 발휘합니다. 미궁을 지키고 영지를 방어하는 데 있어 나가 친위대는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존재입니다. 퀀투스가 참가한 방어전에서 나가들은 평소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특수 능력 ‘철벽’을 얻었습니다. 한 번 방어를 굳힌 이 나가를 넘어설 존재는 많지 않습니다. 철벽 능력이 활성화된 나가 친위대는 방어력이 상승하여 어지간한 공격에는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나가 대장장이들이 만든 조잡스러운 방어구를 걸치고 있던 퀀투스의 모습은 철갑을 두른 것처럼 단단하게 변해 버렸다.
더욱 크고 단단해진 비늘이 갑주처럼 온몸을 둘러싸고 투구처럼 자라난 돌기가 얼굴을 가려 한층 더 사납고 용맹해진 모습이다.
“왕께 충성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충성스러운 모습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다시 이제 막 변이의 과정을 마쳐가는 릭샤샤를 살펴보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나무껍질과도 같은 껍데기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언더 엘프 순찰자(?) 릭샤샤가 진화했습니다.] [릭샤샤가 언더 엘프 순찰자(?)에서 ‘언더 엘프 러너(?)’가 되었습니다.] [긍지도 없이 지저를 떠돌던 이 방랑자는 왕을 모시고 진정한 충성을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긍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긍지는 왕의 영광과 승리이며, 이를 위해 어떤 일이든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보다 더럽고 비천한 일이라고 하여도 그녀에게는 더없는 영광과 기쁨입니다.]발자크나 퀀투스의 변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섬광이 온 사방을 가득 메웠다. 그 안에서 번뜩이는 메시지 창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지저의 어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은신술과 추적술, 그리고 가장 빠른 이동은 언더 엘프 러너가 되며 더욱 진화하였습니다. 지저의 어느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그녀는 왕의 명령을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때로는 왕을 위해 적장의 그림자 속에 숨어 목을 노리는 암살자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녀는 은밀하고 치명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충성과 봉사’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녀는 왕의 명령을 수행할 때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왕의 명령이라면 그녀는 기꺼이 웃으며 제 동족의 등 뒤에도 칼을 꽂을 것입니다.] [특수 능력 ‘그림자 칼날’을 얻었습니다. 어둠으로 빚은 이 자그만 단검은 그 무엇보다 날카롭고 은밀하며 또한 치명적입니다. 가장 단단한 갑주로 몸을 보호하는 존재조차도 그녀의 칼날로부터 무사할 수 없습니다.]“아…….”
섬광이 걷히고 깨어난 릭샤샤를 보고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을 한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나의 하나뿐인 주인이시여.”
릭샤샤는 마치 검은 표범과도 같았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탄력 있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근육으로 둘러싸여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 간단한 동작조차도 더없이 역동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쭉 뻗은 다리에서 뻗어 나오는 그 아찔한 각선미에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주인님.”
“주인님!”
곁에서 도미니크와 안젤라가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릭샤샤의 모습을 보고 있었으리라.
“커흠.”
뒤늦게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그가 헛기침을 했다.
릭샤샤는 그런 그의 시선에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슬쩍 몸을 내밀며 그가 자신을 더욱더 편히 볼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해주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뇌쇄적이고 고혹적이라 그는 무심결에 시선을 피했다.
“모두들 축하한다.”
표정을 가다듬은 그가 축하의 말을 건네자 퀀투스와 릭샤샤가 납작 바닥에 엎드리고 발자크는 제 가슴을 두들겼다.
“모든 영광은 왕께!”
***
릭샤샤는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주인이 독대의 자리를 따로 마련한 것이다.
“명하소서. 그 어떤 명이든 달게 받겠나이다. 그것이 설령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라는 명이라고 하여도…….”
“아, 불구덩이로 뛰어들 필요는 없고, 한 가지 대답만 해주면 돼.”
그녀의 과한 공경에 다소 불편한 얼굴을 한 김진우가 잠시 텀을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릭샤샤.”
“주인이시여.”
“왜 너만 등급이 표기되지 않지?”
그가 그녀를 따로 남으라고 명령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메시지 창을 통해 확인한 수하의 정보 중 유독 그녀만 등급난이 물음표로 표기되어 있던 탓이다.
전에야 합류한 지 오래되지 않은 용병 신분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고유 능력으로 충성과 봉사마저 얻은 그녀의 등급이 아직도 표기가 되지 않는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역시나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었는지 릭샤샤는 그의 질문에 다소 당황한 기색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던 그녀답게 바로 대답해 왔다.
“아마도 미천한 종의 출신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나이다.”
“출신?”
생각해 보니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작정하고 왕좌에 몸을 깊이 파묻고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지루한 이야기가 될 것 같나이다. 미천한 종의 재주 없는 입담이 혹여 주인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걱정되나이다.”
“중요한 건 재미가 아니니 길든 짧든 이야기해 봐.”
아무래도 사연이 있는지 생각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릭샤샤의 모습, 이쯤 되니 김진우도 슬슬 이 언더 엘프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혹시 주인께서는 저희 일족이 언제부터 지저에 존재해 왔는지 알고 계시나이까?”
“아니.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해 봐. 시간은 많으니까.”
다시 이야기를 재촉하니 그녀가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일족은 한때 지저에서 가장 융성한 일족 중 하나였나이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큰 전쟁에서 패퇴하여 영락하였으니 이제는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일족의 형제자매마저도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나이다.”
아무래도 고대 영웅들처럼 소멸해 버린 고대 미궁의 주인들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외눈박이 군주가 지저를 다스리던 그 시절 말인가?”
“바로 그러하나이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생각보다 오래된 언더 엘프의 역사에 그가 눈짓으로 설명을 이어가라 재촉했다.
“짐승처럼 사는 삶이나마 누리게 된 대가로 지저의 은총과 가호, 그리고 신비마저 빗겨가게 되었으니.”
그녀가 허름한 후드를 걷어 맨살을 드러내 보였다. 그 구릿빛 피부에 눈을 휘둥그레 뜬 김진우는 그녀의 피부에 새겨진 흉물스러운 낙인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추방의 낙인이자 끊기지 않는 저주이옵나이다.”
아름다운 몸에 새겨진 낙인은 한 번의 변태로도 지울 수 없을 만큼 깊고 선명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저주받은 요정 군주의 후예 언더 엘프들이 지저를 떠돌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