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13)
던전 견문록-113화(113/319)
# 113
던전 견문록
제 114 화
어둠이 넘실거리는 미궁의 외곽, 가만히 까만 그림자를 바라보던 김진우가 몸을 돌렸다.
“오래 걸리겠지요?”
그런 그를 향해 도미니크가 물었다.
“알 수 없지. 하지만 분명 돌아올 거야.”
확신에 찬 그의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언더 엘프가 요정 군주의 후예였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도미니크는 릭샤샤가 언더 엘프의 왕녀라는 사실에 꽤나 놀란 눈치였다. 하기야 김진우 본인도 언더 엘프 일족의 비사를 들었을 때는 꽤나 놀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멸망해 버린 일족, 게다가 지저의 저주로 다시는 예전의 영광을 찾지 못할 언더 엘프의 왕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허한 이름일 뿐이었다.
‘저희는 다시는 미궁의 주인이 될 수 없게 되었답니다. 지저의 신비가 허락하지 않으니까요.’
릭샤샤 역시 일족이 누리던 영광의 재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족을 규합하기 위해 요새를 떠났다.
‘비록 전승마저 끊겨 쇠락하고 말았지만, 언더 엘프들의 수는 적지 않아요. 그들을 설득해 주인님께 힘이 되고 싶어요.’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는 혼자가 아니리라. 그녀의 곁에는 뿔뿔이 흩어져 살던 일족이 함께할 테니까.
그렇게 릭샤샤가 긴 여정을 떠났다. 거기에 더해 도미니크 역시 그간 미루고 미루어두었던 소환석의 섭취를 위해 자리를 비우겠다 말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부디 안녕하시기를, 나의 하나뿐인 주인님.”
“금방 돌아올 텐데 별 소리를 다 하는군. 꼭 다시 못 볼 것처럼.”
그녀의 극진한 인사에 손을 휘휘 저은 김진우는 당부의 말을 건넸다.
“절대 욕심 부리지 마. 지금 그대로도 도미니크는 내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니까.”
“명심, 또 명심할게요.”
그렇게 그녀는 환한 미소를 남기고 칩거에 들어갔다.
“음.”
릭샤샤에 이어 도미니크마저 곁을 떠나자 김진우는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미궁을 이리저리 쏘다니는 시간이 길어졌다.
“왕이시여!”
마침 작업실 근처를 지나고 있던 그를 발리셔스가 불렀다.
“마침내 완성했나이다.”
몇 달 전부터 준비 중이던 망자의 군대가 이제야 완성된 모양이다. 발리셔스의 호들갑에 김진우는 서둘러 작업실로 향했다.
“음. 이게 단가?”
막상 기대에 차 작업실을 찾으니 덩그러니 놓인 망자가 두어 구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실망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 이 지팡이를 잡으시고.”
그런 그에게 발리셔스가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기괴하게 세공된 다운 잼이 박힌 지팡이를 건네주었다.
“망자 소환이라고 외치면.”
콰드드득!
발리셔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온 지면이 진동한다 싶더니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무덤가에서 시체가 일어나듯 기괴한 모습, 발리셔스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망자의 군대가 소환됩니다.”
발리셔스는 모처럼 신이 나는지 들뜬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생전의 힘을 8할 이상 되찾았습니다. 거기에 더해 망자 특유의 맷집과 집요함을 더했으니 어쩌면 이들의 힘은 살아생전의 역량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무려 300에 달하는 망자의 군대가 내뿜는 사기는 어마어마했다. 온 사방으로 넘실거리며 퍼져가는 불길한 기운에 김진우가 뒤늦게 감탄을 토해냈다.
“상상 이상인데?”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기다려 주신 만큼 제 역할을 할 겁니다.”
발리셔스가 드물게 흥분하여 떠들어댔다. 평소라면 가차 없이 말을 잘라낼 김진우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대로 두었다.
그만큼 발리셔스가 만들어낸 망자의 군대는 대단했다.
“10층의 군대를 상대하기에 부족하지는 않겠는가?”
“이를 말이겠습니까. 망자의 제작에 쓰인 재료의 상당수가 10층 출신의 병사입니다. 9층의 어중이떠중이 군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한 번 죽은 자들, 두려움도 없고 배고픔도 피로도 느끼지 않는 이 망자들이야말로 진정한 무적의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말의 반만큼만 되어도 쓸 만하겠군.”
말이 길어지자 이제는 허풍인지 아니면 진담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다. 그래서 그는 적당히 말을 잘라내고는 발자크를 불러냈다.
“오! 이들은……!”
망자의 군대를 본 발자크는 본능적으로 그들과 자신의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는 반색했다.
“앞으로 네가 지휘할 군대다.”
“이들과 함께라면 뭔들 못하겠나이까!”
그간 철혈의 기사단 언저리를 맴돌며 받은 서러움이 북받치는 것일까. 죽음의 기사가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앞으로의 활약 기대하마.”
망자를 소환하기 위한 지팡이를 건네주고 돌아선 김진우는 뜨악한 얼굴로 어버버거리는 발리셔스를 발견했다.
“문제가 있는가?”
“망자의 군대는 그 자체로 어지간한 미궁은 하루 낮, 하루 저녁에 점령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입니다. 그런데 이걸 저 출신도 불분명한…….”
끝에 가서는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진 목소리였지만, 그는 발리셔스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발자크는 죽음의 기사다. 망자의 군대를 이끌 지휘관으로 그보다 어울리는 자는 없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무래도 발리셔스는 발자크에게 너무 큰 힘이 집중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김진우는 더는 반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 애초에 믿음이 없었다면 미궁에 들이지도 않았을 터, 쓸데없는 말로 분란을 자초하지 말라.”
그 말에 발리셔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속으로는 나약한 육신에 봉인되다시피 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대 역시 포상이 따를 것이다. 그러니 그만 입을 다물도록. 그렇지 않으면 저 단순무식한 발자크가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군.”
농담이 아니라 망자의 군대를 받아들이고 기쁨에 들떠 있던 발자크가 새파란 귀화를 흘리며 발리셔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단순한 만큼 자존심 강한 이 죽음의 기사는 자신의 충정을 의심 받은 것이 몹시 불편한 기색이었다.
“이익! 가, 감히!”
한때는 9층에서도 내로라하는 강자이던 발리셔스다. 하지만 지금은 비천한 나가 일꾼에 기생하는 가엾은 신세일 뿐이다.
발자크의 강렬한 기세를 견디지 못한 발리셔스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피했다.
“그만. 그대는 그대의 군대를 만들어준 장인에게 걸맞은 대우를 하라. 더 이상의 핍박은 가만두지 않으리라.”
간악하고 음험한 발리셔스의 성정 탓에 온갖 족쇄를 채운 김진우였지만 그래도 한때는 미궁의 왕으로 군림하던 사령술사가 바닥에 주저앉아 억울함에 몸을 떠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대에게 맞는 새로운 육신을 찾아주리라.”
수치심에 몸을 떨던 발리셔스가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금세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음.”
아무래도 비천한 육신에 지배받는 것은 능력뿐이 아닌지 예전의 위엄과 기세는 온데간데없는 모습이다.
***
미궁을 떠난 릭샤샤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도미니크마저도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지난 변태 과정 중에 김진우에게 허물을 보인 그녀는 이번에는 작정하고 숨은 것인지 온 미궁을 뒤져 보아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도미니크야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만, 그 언더 엘프는 아예 도망친 거 아닐까요?”
근래 들어 완전히 곁이 빈 그의 옆을 꿰찬 안젤라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김진우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그녀를 무시했다.
“생각해 보세요, 주인님. 예전이라면 모를까, 소환석까지 섭취하고 변해버린 언더 엘프라면 지저 어디를 가도 대우를 받을걸요. 굳이 하루하루 조용할 날이 없는 주인님 곁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어요.”
흡혈귀의 고질적인 집착, 독점욕이 다시 도진 모양인지 안젤라가 끊임없이 릭샤샤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대로 듣고 있다가는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 김진우는 그녀에게 일거리를 주었다.
“그대라면 11층의 지리도 익숙하겠지. 아나톨리우스의 영지를 다녀오도록.”
갑작스러운 명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왜…….”
“암상인도 오지 않고 아나톨리우스의 연락도 없는 것이 뭔가 이상해.”
파르테논의 준동에도 몸을 빼낼 상황이 아니라며 무운을 빈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아나톨리우스와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그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두 미궁을 오고 가던 암상인마저 발길을 뚝 끊었으니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그대가 직접 가서 둘러보고 와야겠어.”
“모처럼 주인님 곁을 독차지하려고 했는데…….”
금세 실망해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녀가 입을 비죽였다.
“가서 보고 듣고 그대로 나에게 설명해 줘. 뭔가 심상치 않다.”
아나톨리우스도 그렇지만 이 정도까지 암상인이 요새를 찾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파르테논의 침략을 격퇴한 것을 축하한다며 얼굴을 비췄을 암상인이건만, 벌써 한 달 가까이 연락이 없는 건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흐음. 꼭 가야만 한다면 가기는 하겠지만…….”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는 그녀를 보며 김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는 탓이다.
손톱 끝을 세운 그가 반대편 손바닥을 길게 그어버렸다. 금세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선혈에 안젤라가 들러붙어 정신없이 피를 들이켰다.
“여기까지. 나머지는 돌아와서 주도록 하지.”
“그 약속 꼭 지키세요.”
첫마디는 바로 곁에서 들려왔지만 마지막 말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그리고는 이내 그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정말 애먹이는군.”
***
이번에는 11층으로 떠난 안젤라마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10층을 주파하여 11층까지 도달해야 하는 먼 거리라고 해도 시간이 걸려도 너무 걸렸다.
“모리건.”
자리를 비운 안젤라와 도미니크 대신 곁을 지키고 있던 모리건이 그 말에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11층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마지막으로 휘저은 것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이라 지금의 상황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겁니까?”
“11층의 상황, 아나톨리우스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암상인이 사라진 이유 모두 알고 싶다.”
김진우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모리건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거라면 좋은 이야기꾼이 바로 곁에 있지 않습니까?”
“이야기꾼?”
그가 반문하니 그녀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으며 말했다.
“불패의 용병 크라스토, 그 작자라면 11층을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제야 불패의 용병단을 떠올린 김진우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그를 보며 모리건이 입을 비죽이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주인의 우둔함을 비웃는 꼴이라 와락 인상을 찡그린 그가 신경질적으로 지시했다.
“크라스토에게 전해라. 내가 보자고 한다고.”
푸드득!
대답 대신 날갯짓 소리와 함께 모리건이 사라졌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크라스토가 미궁을 찾아왔다. 미궁의 경계에 적당히 몸을 걸친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퀀투스와 발자크를 살펴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각기 죽음의 기사와 나가 친위대로 진화한 그들의 변화에 다소 놀란 눈치다.
하지만 그도 잠시, 김진우를 발견한 크라스토는 퀀투스와 발자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팔짱을 꼈다.
“나를 보자 하셨소?”
“아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물어보시오.”
시원시원한 크라스토의 대답에 그도 더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11층의 상황을 알고 싶다.”
“내가 받은 의뢰는 그대의 검이 되라는 것이지 눈과 귀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쩔그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진우가 품에서 다운 잼 꾸러미를 꺼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다운 잼을 확인한 크라스토가 씨익 웃어 보였다.
“내 아는 한에서는 다 대답해 드리지. 무엇이 알고 싶소?”
금세 돌변한 크라스토의 태도가 더없이 용병다웠다.
“지금 11층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정찰을 보낸 수하가 돌아오지를 않으니 영문을 알 수 없군.”
그의 질문에 크라스토가 잠시 텀을 두고 대답했다.
“그것 참 안됐군. 하필이면 지금 정찰을 보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