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14)
던전 견문록-114화(114/319)
# 114
던전 견문록
제 115 화
이건 또 무슨 소린지, 크라스토의 말에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보며 크라스토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11층은 지금 한창 전쟁 중이거든.”
전쟁이란 말에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짓씹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군.”
“말 그대로요. 11층은 현재 외부인이 출입할 만한 곳이 아니오.”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나톨리우스는 11층의 굳어버린 세력 구도에 변화를 주기 위해 9층에까지 손을 뻗었다. 스스로 11층의 판도를 흔들기에는 힘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11층에 전쟁이 벌어졌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11층의 백작들이라면 서로 눈치 보느라 바쁜 게 아니었소?”
그의 질문에 크라스토가 용케도 거기까지 알고 있는 게 신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전쟁이라면 백작 중 누구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 11층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그런 게 아니오.”
“그럼 대체 어떤 전쟁이길래 서로 눈치 보느라 몸을 사리던 백작들이 전쟁을 벌였단 말인가? 답답하니 한 번에 말 좀 해주시오.”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뜸을 들이는 크라스토의 태도에 버럭 화를 낸 김진우가 눈빛으로 설명을 재촉했다.
“이거야 원, 성질이 생각보다 급하시군. 알았소. 그렇게 노려보지 마시오. 이제 막 설명하려던 참이니까.”
크라스토의 어깨 위에 얹혀 있는 노인의 얼굴은 그 깊은 주름에 새겨진 세월만큼이나 느긋했다.
“혹시 알고 계시오, 11층부터는 또 다른 지저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금 11층의 백작들은 다른 지저의 세력과 전쟁을 하고 있다오. 알아들었소? 지금 11층 백작들은 전부 한편이란 말이외다. 그게 바로 백작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전쟁의 명분이지.”
점입가경이라 했던가. 불쑥 튀어나온 새로운 지저의 존재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게 바로 외부인이 11층에 출입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자 파르테논이 그토록 쉽게 물러난 이유요.”
크라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똑바로 김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와 나의 용병단이 9층까지 올라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 ‘불패’라는 이름 하나만 믿고 버티기에는 11층의 상황은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거든.”
그렇게 상황을 설명한 크라스토는 돈값은 했다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혼자 남은 그는 초조한 얼굴로 오너 룸을 서성거렸다.
또 다른 지저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저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면 모를까, 지상에서는 심심치 않게 다른 나라, 다른 대륙의 지저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지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긴장은 했을지언정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젤라가 자신의 명령으로 11층으로 향한 것은 다른 문제였다. 비록 집착이 심하고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이미 자신의 품에 들어온 여인이다.
그런 그녀를 ‘불패’라는 이름을 얻은 크라스토마저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11층으로 보냈으니 속이 타는 게 당연했다.
“제길.”
욕설이 절로 나왔다.
사실은 안젤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 하나를 구하자고 11층의 난리통에 끼어드는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어깨에 짊어진 것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몇 번이고 욕설을 내뱉으며 스스로의 무지와 안일함을 탓했다.
그렇게 안젤라에 대해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을 때, 그녀가 돌아왔다.
“주인님.”
그림자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안젤라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보기 좋게 흘러내렸던 머릿결은 여기저기 끊어지고 피에 엉켜 엉망진창이고, 창백하지만 곱던 피부는 여기저기 긁히고 베인 상처로 가득했다.
“안젤라!”
깜짝 놀란 김진우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손을 대는 순간 흥건하게 묻어오는 끈적끈적한 액체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 나 진짜 돌아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거기서 그대로 죽는가 했는데…….”
“알았으니까 말하지 마, 이 멍청아!”
입을 열 때마다 왈칵 올라오는 핏물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래도 주인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자기 거라면 끔찍이 여기는 주인님 속상할까 봐…….”
“말하지 말래도!”
파리한 안색으로 지껄여 대는 그녀를 말려보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도 칭찬을 바라는 것인지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겨, 겨우 돌아왔어요.”
“그래, 그래. 잘했어. 잘했으니까 이제 그만 말해!”
칭찬 아닌 칭찬에 안젤라가 겨우 말을 멈추더니 창백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사제! 사제를 불러라!”
그의 고함에 조용하던 미궁이 금세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죽음의 경계에 반쯤 걸친 흡혈귀에게 사제의 치유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늦고 말았다.
치유의 빛에 노출된 상처는 처음보다 배는 더 벌어지며 피를 쏟아냈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피를 생명의 원천으로 삼은 흡혈귀이니 피만큼 좋은 치료제는 없을 것이다.
팔뚝에 상처를 내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확인한 김진우가 안젤라의 입가로 피를 흘려 넣었다. 다행스럽게도 흡혈귀의 본능은 남아 있는지 안젤라는 입가를 적신 피를 흘릴세라 혀로 핥고 훔쳐 댔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아예 그의 손목에 들러붙어 게걸스럽게 피를 탐하기 시작했다.
“쭈웁, 쭈웁.”
갓난아이가 부모의 젖을 빨 듯 끊임없이 피를 들이켜는 그녀는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본능만 남은 그녀는 아무런 배려도 절제도 없이 그를 말려 죽일 것처럼 마구 피를 빨아댔다.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상처는 아직도 피를 게워내고 있고 안색은 시체처럼 파리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고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안젤라의 상세가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베이고 할퀴어 파이고 떨어져 나간 상처와 살점 위로 새살이 돋아나고 출혈이 멈추었다. 나가들처럼 파르스름하게 변한 피부도 평소처럼 돌아왔다.
“음?”
그런데 손을 빼내려던 김진우는 눈을 감은 채 집요하게 따라붙는 안젤라 탓에 순간적으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당장은 괜찮았지만 이대로 피를 더 빨렸다가는 자신이 위험할 판국이다.
“안젤라, 떨어져.”
뒤늦게 안젤라의 이마를 누르며 떼어내려고 했지만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긴 것인지 그녀는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난감한 상황에 그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무언가가 안젤라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모리건?”
“오냐오냐하다가는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 하는 게 흡혈귀란 족속들이지. 주인님이 이번에는 너무 물렀네요.”
목이 확 꺾일 정도로 우악스러운 모리건의 손길에 불만이 가득했다. 안젤라를 마뜩치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에 섬뜩한 살기마저 일렁였다.
“적당히 해둬. 환자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간신히 살린 안젤라를 다시 초주검을 만들 기세라 김진우가 모리건을 만류했다.
“이 정도로 주인님의 피를 퍼마셨으면 평소보다 오히려 활력이 넘칠 겁니다. 가만, 이거 혹시 의식 없는 척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한 모리건이 순간적으로 손을 오므리고 마치 매의 발톱처럼 만들어 휘둘렀다.
미처 손을 쓸 틈도 없는 신속한 행동, 그런데 방금 전까지 안젤라가 있던 곳에 검은 안개가 차오르더니 몸 전체를 가렸다.
“간악한 년.”
검은 안개를 노려보던 모리건이 욕을 내뱉더니 이내 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제가 충고 하나 해드리죠. 흡혈귀의 가장 이상적인 사랑은 노예와 주인의 사랑과 같습니다.
이 지독한 족속들은 상대가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을 벗어나지 않기를 바란답니다. 그것이 설령 제 주인이라도 말이죠. 그러니 너무 곁을 허락하지 마세요.”
그리 충고하는 모리건의 얼굴은 그가 한심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는 이내 무섭도록 차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너.”
이제 막 제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흡혈귀를 노려보며 그녀가 으르렁거렸다.
“정도를 지키지 않으면 그 작고 보잘것없는 몸뚱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나 제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야. 이건 경고가 아니야. 너와 나의 약속이지.”
그렇게 경고를 남긴 모리건은 푸드득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던 김진우가 이윽고 안젤라를 쳐다보았다.
“다녀왔어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김진우를 보고도 그녀는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잔뜩 배가 부른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한 그녀의 미소는 평소보다 몇 배는 생기가 가득했다.
그 모습이 하도 황당하고 화가 나 김진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아이참, 죽다 살았네, 정말.”
뒤늦게 안젤라가 비틀거리는 시늉을 해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서늘하기만 했다. 그 어디에도 방금 전에 보여주던 온기는 없었다. 오히려 적지 않은 분노가 내비칠 지경이다.
그제야 안젤라도 그가 진정으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눈을 데굴데굴 굴려댔다.
“너…….”
“11층은 지금 지옥이에요.”
그녀가 선수를 쳤다. 그 얕은꾀를 알면서도 그는 속아주는 시늉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크라스토를 통해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 거인이 전해준 11층의 정보는 지나칠 정도로 단편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안젤라의 버릇을 고쳐주는 것을 잠시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말해봐.”
자신의 의도가 통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안젤라가 빠르게 입을 놀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음…….”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김진우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
11층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백작들이 밀리고 있다고?”
“네. 아나톨리우스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여유가 없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어요. 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거든요.”
장난기가 쏙 빠진 안젤라의 얼굴에는 언뜻 두려운 기색마저 보였다.
“어쩌면 백작들이 수하의 귀족들을 동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때가 되면 주인님께도 조력을 요청할 거라 말했어요.”
“음…….”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파르테논이 그토록 서둘러 병력을 물린 것은 11층의 전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암상인 역시 평소에 보인 그 꿍꿍이, 지저를 조율하듯 이런저런 대소사에 끼어들던 행동을 생각해 보면 지금쯤 9층 따위는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바삐 움직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생각이 길어졌다. 아직 10층으로 진군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11층에 일어난 전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만약 주인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받아들이실 건가요?”
안젤라가 염려가 가득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의 주인이 11층의 전쟁에 끼어드는 것이 걱정된 모양이다.
“글쎄.”
“절대로 끼어들지 마세요. 11층의 전쟁은 10층의 귀족들이 벌인 전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해요. 섣불리 끼어들었다가는…….”
말끝을 흐린 그녀이지만 그는 듣지 않아도 그녀가 삼켜야만 한 마지막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좋아, 전쟁에는 끼지 않겠어.”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김진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젤라가 금세 안도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하지만 아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얼굴이 더욱더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
안젤라는 당장에라도 전화가 9층까지 불어 닥칠 것처럼 말했지만, 김진우는 그녀의 생각에 회의적이었다.
9층이 전화에 휩쓸린다는 것은 11층의 백작들이 완전히 패망할 경우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이 길어질 것으로 보고 있었다.
“자리를 비울 테니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거울 망령을 찾아라. 에스페스토라면 잠깐 정도는 내 자리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비우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11층을 다녀온 뒤로 부쩍 겁이 많아진 안젤라가 우려를 표했다.
“만약 일이 터진다면 그건 백작들이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아졌다는 뜻이겠지.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되면 어차피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의 대답에도 안젤라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김진우가 짧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그들에게 없는 무언가를 이용해 돌파구를 찾아야 해.”
강대한 11층의 백작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것, 그리고 김진우가 그들과 다른 결정적인 이유, 그는 지상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