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16)
던전 견문록-116화(116/319)
# 116
던전 견문록
제 117 화
평생을 친부모에 대한 생각 없이 살아온 김진우였다. 어려서는 가족이란 개념을 몰랐고, 지상에 올라와서는 양부모가 그 자리를 대신해 주었다.
그 덕분에 살면서 단 한 번을 친부모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친부모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들은 친부모에 대한 소식에 머릿속이 완전히 엉클어졌다.
‘그 최초의 탐색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차마 삼키지 못한 질문을 내뱉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백 선생은 그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듯했다.
‘자세한 건 알 수 없네. 다만 전쟁이 끝났을 때 지상에 남아 있는 이들은 없었지. 아마도 지저의 크리쳐들에게 당한 것이 아닌가 싶네만. 하기야 지저 입장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그들만큼은 어떻게든 징치하고 싶었겠지.’
지저에서 자란 짐승 같은 인생이라고 부모에 대한 정조차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일까. 백 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 댔다.
‘어찌 됐건 간에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고 끝이 났지. 그리고 지금 심층이 소란스러운 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던 걸로 기억하네. 내 자세한 건 확실한 정보를 알아보고 말해줌세.’
그 뒤로는 백 선생이 뭐라고 지껄여 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로였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집이었다.
지상에 올라온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김진우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침대에 몸을 파묻기가 무섭게 눈이 감기고 이내 잠이 들었다.
***
김진우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그는 작고 여렸으며 보잘것없었다. 그리고 그 작은 몸을 더욱더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집채만 한 거미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장에라도 그 흉물스러운 주둥이에 온몸이 찢겨져 나갈 것만 같은 공포, 하지만 거대한 거미는 괴성을 내지르는 대신 점잖게 말했다.
“너희들은 자유다.”
그 한마디만을 남긴 거대한 거미, 거미 공작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살아남은 그와 다른 토굴꾼들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에는 살아온 인생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탓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을 때, 그들은 마침내 자유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자유란 더 이상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지도, 할 일을 정해주지도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하나둘 미궁을 떠나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김진우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진우야, 가자.”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그의 손을 잡은 작고 하얀 손이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는 음침한 지저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미소를 지은 소녀를 보았다.
그 티 없는 미소에 그는 그만 덩달아 웃고 말았다.
“절대 이 손 놓지 마.”
소녀의 당부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층 더 당당해진 걸음으로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갔다.
***
꿈에서 깨어난 그는 한참이나 멍한 얼굴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흐릿한 얼굴 하나가 눈앞을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진 무언가가 왠지 모르게 안타까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찌릿찌릿한 심장 어림을 끌어안았다.
무언가 놓친 것이 있는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도통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생각나지 않는 꿈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대신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구요?]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굵직한 음성에 김진우가 잔뜩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김진우라고 전에 두어 번 마주친 적이 있지. 혹시 기억하나?”
[아, 난 또 누구라고. 이 친구, 전화로 들으니 목소리가 아주 걸쭉하구먼.]금세 반색하고 호들갑을 떠는 사내 송종철의 대답에 그가 곧장 용건을 꺼내 들었다.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절대 연락 안 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융통성이 있는 친구였어. 그래, 물어봐. 일단 들어는 줄게.]“심층, 지금 심층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무슨 말이든 대답해 줄 것처럼 떠들어대던 송종철은 심층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공짜는 아니야. 내가 원하는 정보를 주면 적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지.”
[잠깐만. 대가가 문제가 아니라 뭣 때문에 그러는지를 알아야 할 거 아니야.]“심층에 볼일이 있어.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고.”
11층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대응할 수 있었다. 뭣도 모르고 있다가 떠밀리듯 11층의 전쟁에 참전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어쩌면 지금의 혼란이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심층, 심층이라……. 정확하게 몇 층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지?]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송종철은 심층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눈치였다.
하기야 미궁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탐색자들 사이에 다소 경원시되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탐색자협회의 간부였다.
지상에 웅크리고 들리는 이야기에 귀만 쫑긋 세운 백 선생보다는 지저의 상황에 빠삭할 것이 분명했다.
“11층.”
짤막한 대답에 송종철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전화로 말하기는 그렇고 만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지.]“정보는 있고?”
[그럼 내가 바쁜 사람 붙잡고 커피나 마시자고 할까 봐? 일단 만나자고. 뭐가 됐든 얼굴 보면서 이야기해야지.]“좋아, 어디서 만나지?”
[내가 문자로 주소 찍어줄 테니까 그쪽으로 와.]“다시 말하지만…….”
[에헤이! 속고만 살았나.]다소 경망스러운 대답에 하는 수 없이 알았노라 대답한 김진우는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도착한 문자를 확인한 그는 이내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송종철이 찍어준 주소는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낡은 외관의 지하 주점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송종철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정장을 입은 사내가 계단 앞에 서서 그를 막아 세웠다. 하지만 미리 언질을 받은 바가 있는지 이내 길을 열어주었다.
“아래로 내려가서 가장 안쪽 방입니다.”
사내의 안내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준 김진우는 좁은 통로를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허름한 입구와는 다르게 계단 안쪽에 펼쳐진 실내는 제법 으리으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그런지 복도에는 손님은커녕 일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왔군.”
송종철은 마치 오랜 친구라도 맞아주듯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들어왔으면 앉지 뭘 우두커니 서 있어?”
이런 업소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필요 이상으로 널찍한 테이블과 소파가 어색해 김진우는 끄트머리 의자에 살짝 엉덩이를 걸쳤다.
“그렇게 멀리서 이야기나 할 수 있겠어? 이쪽으로 와서 앉으라니까. 안 잡아먹어.”
그런 그를 보며 송종철이 맞은편에 놓인 잔 따위를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일단 한잔 들…….”
“심층, 심층의 정보가 필요해.”
그대로 두었다가는 술 상대라도 하게 생긴 판국이라 김진우가 적당히 송종철의 말을 잘라냈다.
“거 성질 하고는.”
무안한 얼굴로 입맛을 다셔 보인 송종철이 금세 표정을 달리 했다.
“정보 주는 건 어려운 게 아닌데, 이유나 알자.”
“말했잖아. 심층에 갈 일이 있다고.”
“심층에 왜 가는데? 다운 잼? 하긴 지저에 들어갈 일이 그것 말고 더 있겠어? 뭐, 최상급 다운 잼이라도 필요한 모양이지?”
제멋대로 자문자답하는 송종철에게 김진우는 말없이 품속에서 꾸러미를 꺼내 보였다.
“질문은 내가, 그쪽은 대답만.”
테이블 위로 쏟아진 다운 잼 몇 개를 바라보던 송종철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요즘 시세로 치면 대충 몇 천은 되겠구만. 근데 이건 왜? 뭐 자랑하고 싶은 거야? 그래, 잘 봤어. 그래서 뭘 어쩌자고.”
“정보비다.”
생각과는 다른 반응에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참, 사회성 없는 친구네. 이봐, 난 분명 정보를 주는 건 어렵지 않다고 했어. 근데 지금 누굴 심부름센터 직원으로 아나? 누가 이깟 푼돈 받자고 이러는 줄 아시나?”
아무래도 호의를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건지 송종철은 불편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그런 송종철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농담으로라도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송종철이 이렇듯 호의를 보이니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혹시 그쪽, 뭐 그런 거야? 남한테 신세 지고는 못 사는 성격. 그런 거라면 내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다운 잼을 쓰윽 밀어내는 송종철이다.
“음. 그래, 심층의 정보가 필요하다고? 안타깝지만 지금 심층은 들어갈 상황이 아니야. 만약 들어갈 일이 있다고 해도 조금 미루는 게 좋을 거야.”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어.”
“근데도 들어가겠다는 거야? 완전히 미쳤군.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닌 이상에야.”
송종철의 핀잔에도 김진우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반응이 기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송종철이 이렇듯 난리를 칠수록 정보의 신뢰도가 올라갈 테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필요하다니 일단 말은 해주지. 심층은 지금 전쟁통이야. 어떻게 알고 있냐고? 다운 잼 구한다고 11층까지 기어들어 갔던 미친놈이 얼마 전에 죽다 살아서 쫓겨 왔거든. 그 미친놈이 나랑 좀 가까운 놈이야.”
“정확하게 말하면 심층이 아니라 11층이 그렇겠지.”
“잘 알고 있네. 근데 대체 뭘 더 듣겠다는 거야?”
“11층의 전쟁, 이번이 처음이 아닌 걸로 알고 있어. 그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을 뿐.”
백 선생을 통해 이미 이러한 전쟁이 과거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있어온 전쟁이라면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정확한 이유까지야 지상의 인간들이 알 길이 없었지만, 자세한 정황을 듣다 보면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송종철에게 아는 대로 정보를 말해달라며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근데 왜 하필 나지? 마지막에 만났을 때는 거의 도망치듯 날 피했잖아?”
“필요하니까. 그쪽 말고는 물을 곳이 없기도 하고.”
그는 김진태의 등에 칼을 꽂아 넣고 그 죽음에 슬퍼하는 이준영의 앞에 서서 아쉬운 소리를 할 정도로 뻔뻔하지 않았다.
“이준영이네와는 완전히 틀어진 건가? 뭐, 좋아. 좋은 인연 맺는다고 생각하고 내가 아는 건 다 말해주지.”
그렇게 입맛을 다신 송종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나는 잘나가는 탐색자였지. 한 5, 6년 전까지만 해도 송종철이 하면 이 바닥에서 알아줬단 말이야. 아, 그런 표정 짓지 마. 내 자랑하자고 하는 말 아니니까.”
엉뚱한 자기 자랑에 김진우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니 송종철이 손을 휘저었다.
“근데 말이야, 왜 내가 지금 협회니 뭐니 만들어서 이렇게 지상에서 뭉개고 있을까? 왜일 거 같아?”
잠시 말을 멈춘 송종철이 상의를 걷어 올렸다. 그렇게 걷어 올린 셔츠 아래로 드러난 맨 피부에 온통 흉터가 아닌 곳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고 끔찍한, 가슴팍을 길게 가로지른 흉터를 손으로 두들긴 송종철이 히죽 웃었다.
“그 빌어먹을 전쟁에 휘말려서 몸이 걸레짝이 됐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