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17)
던전 견문록-117화(117/319)
# 117
던전 견문록
제 118 화
#47. 개구멍
송종철의 웃음은 왠지 모르게 섬뜩했다. 자조와 증오가 한데 어우러진 끔찍한 미소. 하지만 김진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던전 베이비 중에 지저를 증오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으며, 사연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 역시 수많은 던전 베이비 중 하나였다.
“그날 이후로 난 심층에는 얼씬도 못하게 되었지. 비만 오면 욱신거리는 상처를 부여잡고 덜덜 떨었지. 근데 말이야, 내가 가장 비참한 게 뭔지 알아?”
김진우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어갔다.
“그 빌어먹을 놈들은 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거야. 난 말 그대로 휘말렸을 뿐이니까.”
송종철이 위스키가 가득 든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11층의 전쟁은 그냥 말 그대로 지들끼리 미쳐 날뛰는 거야. 이유 따위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 어차피 알 방법도 없으니까.”
그의 이야기는 듣는 내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김진우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지저가 넓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간 8층 이상으로 향하는 탐색자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 나름대로 통로 근처에서 활동했는데도 말이지.”
실제로는 그가 아닌 장거리 나가 순찰자들과 수많은 미궁의 주인들이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고 있는 상황이지만 적당히 거짓을 섞어 말했다.
“난 또 뭐라고.”
송종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일반 탐색자들은 모르는 심층 전문 탐색자들의 길이 있어.”
“일종의 비밀 통로 같은 건가?”
“뭐, 비슷하지. 이준영이네 패거리하고만 어울렸으면 아마 그쪽은 금시초문일 거야. 걔들은 말만 번지르르하지 실제로는 심층엔 안 들어가거든.”
9층을 통하지 않고 심층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는 말에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잔을 으스러져라 꽉 쥐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티끌만큼도 동요하는 표를 않은 채 태연하게 물었다.
“그 비밀 통로라는 거 말이야.”
“여기까지! 호의로 넘겨준 정보는 딱 여기까지야. 지금부터는 나도 그냥 말해주기는 좀 뭐하거든. 아무래도 밥줄이 걸려 있으니까.”
송종철이 그의 말을 잘라냈다. 이제까지 필요 이상의 호의를 보여준 송종철이지만 호의는 딱 거기까지인 모양이다.
“대가를 원하는 건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다운 잼을 눈짓하며 물으니 송종철이 고개를 저었다.
“대가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그냥 제안 하나 하지.”
그의 질문에 송종철이 잔을 내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패거리에 들어와. 그럼 비밀 통로고 뭐고 간에 아는 대로 다 말해주지.”
***
9층을 거치지 않고 심층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면 그 전략적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당연하게도 김진우는 송종철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새에 묶여 지저에서 먹고 자다시피 하는 그이니만큼 직접적인 활동을 함께하지는 못한다고 못을 박아두는 정도로 양보를 받아낼 수 있었다.
송종철 역시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지 협회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김진우 본인의 가치 이상으로 대한민국 최고 레벨의 던전 베이비라는 타이틀을 높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실제로도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의 탐색자들은 대한민국 최고 레벨의 던전 베이비가 아직 살아 있으며 협회와 함께함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협회 차원에서 필요 이상으로 정보를 흘린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김진우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12레벨의 던전 베이비였으니까.
[아, 그쪽 이름을 내걸었더니 협회 가입자가 몇 배는 늘었어. 사실은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좀 있어서 욕을 좀 먹었거든.]“불미스러운 일?”
짐작 가는 일이 있었지만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그게 협회 차원에서 미궁을 차지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갑자기 미궁이 사라져 버렸거든. 그 때문에 미궁을 빼돌렸니 뭐니 말이 한참 많았지.]역시나 그랬다. 아무래도 김진우가 가로챈 미궁의 핵 때문에 협회에서 누명을 뒤집어쓴 모양이다.
[끄응. 지금도 그때 일 생각하면 속이 다 쓰리네. 제 손에 쥔 물건도 아닌데 뭘 그렇게 물건 맡겨둔 것처럼 난리들인지. 완전 도둑놈 심보라니까.]지금 자신이 한탄하고 있는 상대야말로 진짜 ‘도둑놈’이라는 사실을 알면 송종철은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까. 아마도 김진우는 앞으로도 쭈욱 그 표정을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송종철이 미궁의 행방을 알게 될 일은 영원히 없을 테니까.
“그보다 그 비밀 통로라는 거, 아직인가?”
[기다리라고. 사실 그쪽 태도가 그간 좀 미적지근했잖아? 우리도 조금 더 보험을 들어놔야지. 이게 서로 믿고 살면 오죽 좋겠냐마는 사람살이가 그렇지 않아서 문제란 말이야. 그쪽이 정보만 먹고 싹 내빼면 내 꼴이 우스워진다고.]이야기를 들어보니 협회에서 김진우의 이름을 간판 대신 내거는 일은 앞으로도 한참은 이어질 듯했다.
그렇게 옴짝달싹 못하게 협회와 묶어놓고 나서야 정보를 줄 모양이다.
사실 김진우 입장에서야 그깟 이름 따위 협회에서 삶아먹든 구워먹든 관심도 없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김진우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송종철을 만날 수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어두운 통로, 짜증 섞인 김진우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아니, 그쪽을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이게 원래 절차가 이렇다니까.”
송종철이 억울한 얼굴로 그리 말했지만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 잘난 비밀 통로의 정체라도 먼저 이야기를 해주고 그런 소리 하시지. 혹시 전부 거짓말 아니야?”
그가 그렇게 말하니 송종철이 펄쩍 뛰며 난리를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이 끔찍한 곳까지 그쪽을 끌고 와서 거짓말을 하겠어!”
결국 제자리다. 송종철은 여전히 비밀 통로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고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일단 가자고. 저층까지만 가면 다 알게 된다니까.”
비밀 통로를 알려준다고 한 송종철은 전원이 던전 베이비로 이루어진 탐색 팀을 이끌고 나타났다.
전날 미리 연락을 받은 김진우는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어차피 아쉬운 쪽은 이쪽이니 그냥 따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다짜고짜 자신을 따르라 말한 송종철이 정작 비밀 통로에 대해서만큼은 함구하고 있으니 그가 답답한 마음에 신경질을 부리는 것도 당연했다.
“좋아, 저층까지 믿고 가보도록 하지.”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이거야 원, 황송해서.”
듣기에 따라 협박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송종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작 그의 말에 신경 쓰는 것은 송종철의 뒤를 따르는 탐색자들이었다.
협회 내에서 송종철의 입지와 신뢰가 생각 이상인지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며 신경질을 부리는 그를 보는 탐색자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라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송종철의 비위를 거스르는 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탓이다.
아니, 비위를 거스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송종철 본인이 그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지 않은가. 그게 다른 일행은 그렇게 불편해 보인 모양이다.
“야, 저 사람은 누군데 종철이 형님이 저렇게 설설 기냐?”
“낸들 아냐, 말을 안 해주는데. 소개도 안 시켜주고.”
“궁금해 죽갔네.”
“아서라. 출발 전에 말 걸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괜히 나섰다가는 또 한소리 듣지 싶다.”
지들 딴에는 한껏 목소리를 낮춘다고 속닥였지만, 근래 들어서 오감이 비약적으로 예민해진 김진우는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전부 엿듣고 말았다.
아무래도 송종철은 일행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다.
그게 그저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귀찮게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이 없으니 신경 쓸 일이 없어 편했다.
그렇게 송종철의 배려 아닌 배려 속에서 지저를 나아가던 김진우는 문득 5층에 이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일행이 크리쳐와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운일까, 아니면 노린 것일까.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송종철이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돈 안 되는 초입의 크리쳐들과의 조우는 최대한 피하는 게 상책이지.”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노하우가 있는 눈치다. 어차피 물어봐야 대답해주지 않을 게 뻔해서 김진우는 그저 고개를 짧게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며칠간 지루한 행군이 계속되었다.
전투조차 없는 지루한 시간 속에서 김진우는 한층 더 면밀하게 일행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일단 던전 베이비의 레벨이 겉으로 표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사내들의 레벨이 꽤나 높다는 건 분명했다.
일단 표정부터가 달랐다. 전체적인 행동거지에 여유가 있었으며 긴장은 했을지언정 두려움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이야말로 송종철이 얘기한 심층 탐사대가 아닌가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지켜보던 김진우는 문득 그들의 짐이 유달리 크고 무거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번 의식을 하고 나니 그들이 배낭이 유독 거슬리기 시작했다.
“저 안에는 뭐가 들었지? 그냥 식량과 탐사 도구라고 하기에는 부피가 너무 큰 것 같은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송종철이 히죽 웃어 보였다.
“가보면 알아.”
도대체가 하나에서 열까지 속 시원히 털어놓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자신인지라 그는 더는 재촉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 다른 탐색자들 없는지 체크해!”
한참을 나아가던 일행이 멈춰 섰다. 그런데 송종철의 지시라는 게 근방에 크리쳐가 있는지 체크하라는 것도 아니고 탐색자 일행을 체크하라는 것이다.
그게 수상했지만 김진우는 굳이 나서서 묻지 않았다. 그전에 송종철이 먼저 설명해 주었다.
“비밀 통로라는 거, 많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 확실히 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
“아…….”
드디어 말로만 들은 비밀 통로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이쪽에서 15분 거리쯤에 크리쳐 몇 놈이 있긴 한데 탐색자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내 감각에도 걸리는 건 없어.”
잠시 일행에서 떨어져 나간 던전 베이비 몇이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하긴 정신 상태 멀쩡한 놈이라면 멀쩡한 경로 내버려 두고 이쪽으로 올 리가 없지.”
지금 그들이 멈춰 선 곳은 7층의 외진 통로였다.
“마지막으로 휴식 취하고 장비 점검한다! 짐 챙겨온 놈들은 마지막까지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그렇게 휴식을 취할 것을 명령한 송종철이 이내 김진우를 돌아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곧 깜짝 놀라게 해줄 테니까.”
***
다시 이동을 시작한 송종철과 그 일행이 멈춰 선 곳은 엉뚱하게도 이름 모를 미궁의 외곽 근처였다.
“다 왔어.”
“뭐?”
김진우는 송종철의 말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멀찍이 보이는 미궁의 엠블럼이 색조차 바래지 않고 선명한 것이 주인이 있는 미궁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송종철 일행이 길을 잘못 들었거나 그저 지나가는 경로 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한 차였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여기라고. 우리 비밀 통로.”
그렇게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여 댄 송종철이 무언가를 기다리듯 팔짱을 끼고 미궁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건 누가 봐도 살아 있는 미궁인데?”
“맞아. 저 미궁, 주인 있는 미궁이야.”
혹시라도 착각한 건 아닌가 싶어 되물었더니 송종철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근데?”
“저게 우리 비밀 통로라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여 대는 것인지 김진우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송종철은 그런 그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는 것이 즐거운지 낄낄대며 웃어댔다.
“내가 깜짝 놀라게 해준다고 했지?”
송종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 미궁에서 일단의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