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19)
던전 견문록-119화(119/319)
# 119
던전 견문록
제 120 화
#48. 이변
외눈박이의 왕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김진우는 가장 먼저 모리건의 옛 주인이 떠올랐다.
하지만 굳이 연관성을 부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 자존심 강하고 강대한 모리건이 모시기에 외눈박이의 왕은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나를 아는가?”
“이 드넓은 지저에 그대의 전승 업적과 정복자의 위명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요.”
기괴한 생김새에 비해 우스투스의 음성은 위엄이 있고 점잖았다. 그래서인지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고 말았다.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군.”
지저에 이름이 알려진다는 건 그만큼 나가의 요새가 다른 세력에게 노출된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요새의 비약적인 성장에는 그간 스스로가 드러나지 않은 칼날이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했으니 앞으로 요새의 행보가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금 그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게 내 착각인가?”
이미 벌어진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한 김진우답게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처음에는 몰자크가 귀족의 위엄에 억눌려 모든 사실을 실토했다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누가 올 줄 알고 미궁의 주인이나 되는 작자가 이리 마중을 나온다는 말인가. 게다가 몰자크 역시 위압 효과에 억눌린 척하면서 잘도 그를 유인해 냈다.
만약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았다면 그 같은 위험인물을 주인의 미궁으로 보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짐작이 맞았는지 우스투스는 커다란 몸통을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몰자크가 그러더군. 원래 거래하던 이들 사이에 전승의 사령관이 다녀갔다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깨달았지. 전승의 사령관이 지저인 출신이며 또한 지상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대가 근시일 내로 다시 올 거라 생각했소.”
“제길. 괜히 혼자 유난을 떨었군.”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진즉 정체가 탄로 났는데 혼자서 정체를 숨긴다고 그리 법석을 떨었으니 보는 이들 입장에선 얼마나 우스웠을까.
“날 기다린 이유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본론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우스투스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해왔다.
“그대가 날 찾은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의미심장한 말에 김진우는 무심코 우스투스를 바라보았다. 몸 전체가 커다란 눈동자로 이루어진 이 외눈박이의 왕은 어쩐지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이미 깊이 가라앉아 있던 가정 하나가 다시 수면으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그렇게 떠오른 가정이 다시 확신이 되고 현실이 되었다.
“나의 작고 사랑스러운 까마귀는 잘 지내고 있소?”
“모리건이라면 지나칠 정도로 잘 지내고 있지.”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외눈박이의 왕이라는 이 웃기지도 않는 존재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고대 미궁을 다스리던 외눈박이 군주와 관련이 있는 자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리건의 안부를 저리도 애틋하게 물을 리가 없었다.
물론 작고 사랑스러운 까마귀라는 말에는 동감하기 힘들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아니, 그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하도록 하지. 그대는 고대 미궁의 주인 외눈박이 군주 본인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질문하니 우스투스가 몸을 휘적거렸다.
“그럴 리가. 나는 그분께서 최후의 순간에 뿌린 수많은 파편 중 하나일 뿐, 감히 그 그림자에도 범접치 못하는 미천한 존재일 뿐이오.”
“파편 중 하나? 그럼 그대 같은 존재가 또 있다는 말인가?”
우스투스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우는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우스투스와 같은 존재가 지저 이곳저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블랙 머천트에서 알면 뒤집어지겠군.”
신음처럼 내뱉는 한마디에 우스투스가 동감을 표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소? 그대나 나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소. 이제 곧 파수꾼들이 움직일 시간이거든.”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우스투스는 설명을 시작했다.
***
우스투스의 미궁을 다녀온 김진우는 자꾸만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지저와 지상, 그리고 과거와 현재 속에서 좀처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11층의 난리에 어떻게든 11층 진출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던 일이 한참은 커져 버린 느낌이다.
그 과정에서 알아낸 사실들은 결코 하찮지도 쓸데없지도 않았으니 고민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몇 가지 이득을 본 것이 있었다.
가장 먼저 고대 미궁의 후예인 우스투스와 암묵적인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그에 따라 아무도 모르게 심층을 향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얻었다. 과연 우스투스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당장 이용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생겼으니 이득이라면 가장 큰 이득이었다.
거기에 더해 송종철을 쥐고 흔들 약점을 잡게 되었다.
협정 이전에 풀려난 던전 베이비들이 어떤 식으로 풀려났으며 무슨 목적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떤 일을 해왔는지 우스투스에게 들은 정보는 언젠가는 긴요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적을 맞닥뜨린 탓이다.
‘지저는 그저 땅 밑 토굴이 아니라오.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이지. 그런데 그 거대한 세상을 누군가가 강제로 찢어발겨 흩어놓았소. 그자가 바로 그대와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오.’
‘그게 누구지?’
‘아홉 맹우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 가장 깊은 지저의 왕이자 지금의 지저를 다스리는 단 하나뿐인 제왕, 배덕의 왕이 바로 우리의 적이지.’
***
이제 슬슬 지저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아직 처리하지 않은 일이 산재해 있었지만, 애초에 심층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찾은 지상이다.
우스투스라는 강력한 우군을 얻은 지금, 굳이 지상에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포탈을 열고 나가의 요새를 찾았다. 그런데 포탈을 넘기가 무섭게 품에 쏙 안겨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도미니크?”
검은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
그리움과 반가움, 그리고 깊은 연모가 내비치는 보랏빛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그 맹목적인 눈빛에 김진우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이제 다 끝난 거야?”
“네. 모두 주인님 덕분이에요.”
그렇게 대답한 그녀가 품에서 떨어져 몸을 한 바퀴 돌려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스럽게 제 몸을 보이는 그녀의 하체에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가 달려 있다.
“다리?”
저도 모르게 얼빠진 음성을 내뱉은 그가 턱을 쭉 빼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도미니크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몇몇 운 좋은 나가에게는 주인님의 모습을 따를 수 있는 영광이 허락된다고.”
그러고 보니 가장 존귀한 나가에게는 두 발로 대지를 딛는 영광이 허락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왜 나가들이 대지를 발로 딛고 서는 것이 영광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가의 왕은 그 자체로 가장 완성된 종의 결정체였다.
나가들에게는 자신의 왕이야말로 가장 도달하고 싶은 모습 그 자체였으리라.
[왕의 조언자(영웅급) 도미니크의 변화를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도미니크는 이제 완벽한 대리자이자 조언자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조언을 귀담아듣는 것만으로도 요새는 빠르게 발전할 것입니다.] [내정관의 위엄, 대리자의 자격, 헌신과 봉사 능력이 각각 성장하여 더욱 완벽해졌습니다.] [도미니크는 이제 존귀한 나가에 가장 근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하루 중 낮에는 일반적인 나가의 모습으로, 가장 깊은 밤 잠시 동안은 인간과 근접한 모습으로 지낼 것입니다.]한발 늦게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김진우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도미니크는 한껏 들뜬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 눈빛에 왠지 모르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해 그는 괜스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
아직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서는 것이 어색한지 웃으며 다가오던 그녀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헤헤.”
지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웃음, 그녀가 변명하듯 이야기했다.
“아직 어색해서…….”
“차차 익숙해지겠지.”
이유 모를 어색함에 그렇게 대꾸하니 그녀가 슬며시 그의 품을 빠져나갔다.
“그럼 주인님께서 오셨다고 알리도록 하겠어요. 다들 주인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몸을 돌려 오너 룸을 빠져나가는데 어쩐지 그 걸음걸이가 하나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끄응. 속은 건가.”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 하지만 그는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
요새로 귀환한 김진우는 빠르게 자신의 정보를 풀었다.
“그, 그분께서…….”
모리건은 외눈박이 군주의 파편이 이 지저에 존재함을 들은 뒤로부터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흥. 양다리라도 걸치려는 거야? 주인님 앞에서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런 그녀를 보며 안젤라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대의 태도는 문제가 있군요.”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도미니크마저도 모리건의 동요에 불쾌한 기색을 내보일 지경이니 충성스러운 퀀투스와 나가들의 반응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태도를 확실히 하라!”
퀀투스가 으르렁거리며 그렇게 말하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모리건이 무릎을 꿇었다.
“잠시 옛 인연에 대한 그리움에 젖었을 뿐이니 부디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강인하고 도도한 까마귀가 보이는 이례적인 모습에 김진우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꼭 자신의 것을 뺏긴 것만 같은 기분, 그래서 그는 불편한 내심을 숨기지 못했다.
“모리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지 마.”
으르렁거리듯 불쾌한 속내를 내비치니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왔다.
“다시 말한다. 태도를 명확히 하라.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이들 뿐, 그대가 그런 태도를 계속 취한다면 나는 그대를 이 자리에서 내쫓을 수밖에 없다.”
암상인이 말했다.
지저의 파수꾼들이 평소 어떤 모습으로 지내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그래서 그는 우스투스의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가장 믿을 만한 자들만 이 자리에 불러 모았다.
“주의하겠습니다.”
그 자존심 강한 전장의 까마귀가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사과를 해왔다. 평소 충성 맹세가 무색하게 틱틱거리던 그녀를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다.
겨우 평소의 신색을 찾은 모리건은 돌처럼 굳은 얼굴로나마 똑바로 서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찬 김진우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우스투스에게 들은 이야기와 지상의 정보를 종합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도미니크가 물었다.
“그럼 심층의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그녀의 질문에 김진우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찢겨졌던 지저가 다시 하나로 합쳐질 기미가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도미니크가 차마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말을 그가 대신해서 받아주었다.
“전쟁은 더욱 확산될 거다. 그리고 이 9층에도 전화가 찾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