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20)
던전 견문록-120화(120/319)
# 120
던전 견문록
제 121 화
“10층 진군은 당분간 포기한다.”
이제껏 10층으로, 또 더 나아가 11층의 전쟁에 끼어들어 어떻게든 심층으로 향할 실마리를 찾고 있던 김진우 입장에서는 속이 쓰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만약 우스투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곧 불어 닥칠 전화 속에서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도미니크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전선의 확대로 인한 방어의 불편함을 조목조목 짚어서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보의 신뢰성에 관해 여전히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일개 미궁의 주인 따위가 지저에 불어 닥쳐 올 환란에 대해서 먼저 감지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은 모양이다.
우스투스의 말을 어찌 믿느냐고 묻는 도미니크에게 김진우는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해주었다.
“믿을 수밖에. 이 상황을 만든 것이 우스투스와 파편들이니까.”
놀랍게도 외눈박이 군주의 파편은 지난 시대로의 회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과연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룬 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근래 일어난 11층의 전쟁만 보아도 그 계획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이제 문제는 과연 언제쯤 지저의 통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모든 9층의 미궁 주인들에게 알려라. 미궁의 체제를 전시 준비 체제로 전환하여 앞으로의 전쟁에 대비한다고.”
“그러다 만약 층의 통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요?”
안젤라의 질문에 김진우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그 병력으로 10층을 친다.”
***
9층 전체가 전쟁 준비에 한창이다. 모든 미궁의 주인이 핵의 업그레이드와 병력의 확충을 동시에 진행한다고 법석을 떨었으며, 그 과정에서 9층의 야생 크리쳐는 완전히 씨가 마르고 말았다.
아마 암상인이 있었다면 분명 한소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11층의 전쟁 소식과 함께 완전히 연락이 두절된 암상인은 더 이상 9층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암상인과 11층의 백작들은 철저하게 배제한 채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진짜 전쟁이 나는 겁니까?”
오랜만에 만난 우서의 말캉말캉한 몸이 전쟁 소식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때부터 우서는 온 9층에 탐식의 덩어리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병력을 뽑아내는 건 애초부터 염두에 없는 눈치였다.
하기야 지저의 존재라면 누구나 하나씩은 살아남는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우서는 자신의 생존을 정찰과 탐색에 건 듯했다.
비록 그로 인해 김진우에게 크게 당하고 강제적으로 기사가 되고 말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크게 손해 본 것도 없으니 그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탐식의 덩어리가 온 지저로 퍼져 나갔다. 근래 들어 부쩍 비대해진 우서의 몸이 다시금 홀쭉해졌다.
“그대, 만약 무슨 일이 생겨도 적은 만들지 말라.”
일신의 능력이 오르고 내리는 게 그대로 표가 나는 우서의 해괴한 육체를 본 김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헤헤, 저도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가늘고 길게. 그게 바로 제 신조 아니겠습니까요.”
있지도 않은 손을 만들어 싹싹 비벼대며 말하는 모습이 우스워 결국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아도 그대에게 정찰을 부탁할 참이었지. 아무래도 통로가 정해진 그동안의 전쟁과는 다르게 언제 어디서 전쟁이 시작될지 모르니 그대의 역할이 막중하다.”
그렇게 말한 그가 품에서 소환석 세 개와 최상급 다운 잼을 던져주니 우서가 냉큼 집어삼켰다.
수하에게 수여한다거나 미궁을 위해 쓴다거나 하는 고민은 일절 없는 행동인지라 어지간한 그도 쓴웃음을 지었다.
“제 수하들이라고 해봐야 전부 제 몸에서 나온 놈들입니다. 제가 강해져야 제 수하들도 강해지니 제가 강해지는 게 최우선입지요.”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이 딴에는 그럴싸해 김진우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보다 두 개의 소환석을 더 주었다.
“아…….”
우서가 그렇게 소환석을 집어삼키는 것을 보니 김진우는 문득 기생수에 생각이 미쳤다.
초기에만 해도 기생수가 없으면 어찌 미궁을 운영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능력이 성장한 지금에 와서는 가끔 무언가를 감지해 낼 때가 아니면 기생수의 존재를 잊고 지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왜 그러십니까요?”
“아니다. 신경 쓰지 말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 그대에 한해서라면 포탈의 개방을 항시 허락하겠다.”
핵과 직통으로 연결된 포탈의 항시 개방은 위험천만한 결정이지만, 셈이 빠르고 욕심이 많은 우서라면 그를 배신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간 곁에서 누려온 수혜가 어마어마하기에에 누구 곁에 있어야 이득인지를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어이쿠! 왕의 신뢰에 이 우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과장스럽게 지껄여 댄 우서가 실제로도 물컹거리는 온몸을 이리저리 꿀렁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일로 우서가 주변 미궁의 주인들에게 제 입지를 올린답시고 한참은 떠들고 다닐 게 분명했다.
주인의 위세야말로 자신의 위세라 생각하는 우서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비굴하게 굽실대는 우서를 바라보다 몸을 돌린 김진우는 다시 다른 미궁들을 순회하며 전쟁 준비를 체크했다.
대체적으로 그의 곁에 지낸 시간이 오래된 미궁일수록 전쟁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으며, 뒤늦게 합류한 미궁들 같은 경우에는 마지못해 준비하는 시늉만 하는 태도가 눈에 보였다.
김진우는 그런 미궁들을 철저하게 전력에서 배제했다.
어차피 어중이떠중이는 모아봐야 큰 힘이 될 수 없었다. 그저 싸울 뿐이라면 쓰임새가 있겠지만, 혹시라도 적의 공작에 놀아나기라도 했다가는 도리어 이쪽의 발목을 붙잡는 악재가 되고도 남았다.
그래서 그는 전쟁 준비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미궁들을 분류하여 따로 구분해 두었다. 칼받이로도 쓰지 못할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는 그날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전쟁 준비에 한창인 것은 9층의 다른 미궁들 뿐만이 아니었다. 나가 요새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11층 심층의 백작들마저도 고전할 수밖에 없는 강대한 적이다.
“따지고 보면 저희들은 한 번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 적이 없었네요.”
도미니크의 말이다.
처음에는 야생 크리쳐 따위의 침입을 대비해야 했고, 그에 이어 교룡왕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그 뒤로도 항상 나가의 요새는 전쟁의 한가운데 있어왔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쟁을 준비하는 나가들은 긴장보다는 차라리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든 나가들은 주인님의 성향을 닮기 마련이랍니다.”
“끄응. 내가 그렇게 호전적인가?”
그러고 보니 스스로도 늘 공존보다는 전쟁을 택해온지라 그는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지저 공작에게 시달리던 과거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쳐 상생보다는 적대를 먼저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상에 오른 이후로 결여된 치열함을 다시 되찾았을 뿐이다.
“그런데 모리건은 대체 뭘 하고 있지?”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겨 있어요. 원래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더욱 모르겠어요. 그래서 혹시 몰라 감시를 붙여놨으니 최악의 일은 방지할 수 있을 거예요.”
모리건의 출신 탓인지 도미니크는 아예 그녀를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은신과 기척을 숨기는 데 능한 호야를 붙여 24시간 밀착 감시 중이라는 말에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호야를 불러들여. 내가 따로 이야기해 보겠다.”
모리건은 명실상부한 나가의 요새 최강의 패다. 그런 그녀를 저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주인님.”
“듣고 있어.”
“모리건과 헤임달을 믿지 마세요. 옛 군주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욱 많아요. 그들과 옛 주인 사이에 어떤 맹약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도미니크의 말은 그 역시 짐작하고 있던 일이다. 과거에도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당시 미궁을 운영하고 지배하던 군주들이 다른 방식으로 부하들을 관리했다면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고대의 전쟁 영웅들을 통제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그는 길게 끌 것도 없이 모리건을 찾아갔다.
“왕이시여.”
늘 도도하고 오만하던 전장의 까마귀는 눈에 띌 정도로 수척해진 모습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느라 내가 온 것도 몰랐지?”
감각이 예민한 그녀가 지척에 접근할 때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김진우는 그녀의 고민이 생각 이상으로 깊음을 알 수 있었다.
“옛 주인의 파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저 머리가 복잡했을 뿐이에요.”
그녀는 돌리는 법 없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 이래야 전장의 까마귀지.
지저에 어울리지 않는 이 순수한 전사를 본 김진우는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리지 못한 결정을 완전히 내릴 수 있었다.
모리건, 이 강대한 까마귀는 옛 주인에게 돌려보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모리건.”
“네.”
퀀투스가 늘 지적하는 예의 없을 정도로 짧고 성의 없는 대답, 하지만 그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기꺼워져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왜 또…….”
자신의 음흉한 주인이 또 뭔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리건이 표정을 굳혔다.
“옛 주인이 그리운가?”
역시나 솔직한 그녀답게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불편한 그였지만, 지금은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최소한 이 자존심 강한 까마귀는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다그치러 온 것이 아니야.”
그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침묵을 고수했다. 하기야 새로운 주인 앞에서 옛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빤히 짐작하면서도 그는 집요할 정도로 그녀의 대답을 강요했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그 사실은 인정했다.
“옛 주인께서는 저에게 전사의 긍지를 알려주신 분이니까요.”
짤막한 대답에 씨익 웃어 보인 김진우가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 텐가?”
“그게 무슨……?”
이번 질문은 모리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그녀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말 그대로야. 옛 주인에게 돌아갈 길이 있다면 돌아갈 건지를 묻고 있는 거야.”
금세 평정을 찾은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는 이 음흉한 주인의 속내를 짐작하려는 것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비록 그가 그저 파편에 불과할 뿐이라도 그대는 돌아갈 생각인가?”
그의 질문에 한참이나 고민하던 모리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