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21)
던전 견문록-121화(121/319)
# 121
던전 견문록
제 122 화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의외의 대답이다. 김진우는 모리건이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겠노라 대답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늘 입버릇처럼 가장 영광스럽던 때를 떠들어댔다.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예상을 깨고 요새에 잔류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머릿속에 떠올린 계획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그렇지? 그대는 옛 주인을 그리워하지 않았나?”
“옛 주인께 배운 것은 전사의 긍지이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으니까.”
“아…….”
왜 이제야 눈치 챘을까. 언제부터인지 모리건은 흔들림이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자신을 시험한 그를 질책하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주인님은 절대로 제 품에 들어온 것을 흘리지 않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존재, 파르테논의 위협 속에서도 놓지 않은 저를 놓아줄 것 같지도 않네요.”
한 가지 잊고 있었다. 그녀가 뛰어난 전사이기 이전에 이름 높은 전략가라는 사실을. 그녀는 지금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김진우는 처음부터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옭아매기 위한 함정을 파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헤아리고 차라리 처음부터 그의 곁에 남는 것을 결정했다.
어차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면 만신창이가 되느니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쪽에서 싸우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뒤늦게 씨익 웃으며 말을 하는 모리건의 얼굴에 흥분한 기색마저 떠올라 있다.
“끄응.”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전쟁과 싸움에 미쳐 버린 까마귀의 홀린 듯한 얼굴은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자신의 계획이 시도조차 못했다는 사실을 금세 잊고 탄성을 내뱉었다.
“부디 저를 즐겁게 만들어주세요. 그 어떤 전장이라도 저는 마다하지 않을 테니까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김진우는 모리건을 뒤로하고 자리를 떠야 했다.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그녀의 광기에 전염될 것만 같았다.
“모리건에 대한 감시는 없던 걸로 하지. 그녀는 이쪽에 남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고…….”
드물게 그의 말에 토를 다는 도미니크였지만, 지그시 한 번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 이내 입을 다물었다.
“대신 헤임달에 대한 감시는 그대로 유지하도록 해. 그쪽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모리건과는 다르게 선택권을 주었다가는 당장에라도 미궁을 떠날 것만 같은 헤임달의 기색에 그는 우스투스와 외눈박이 군주의 파편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통제하기로 마음먹었다.
덕분에 헤임달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어둠을 노려보며 전쟁의 기미만을 살필 뿐이었다.
그렇게 대략적인 일을 처리한 김진우는 소환석과 다운 잼 뭉치를 들고는 왕좌에 앉았다.
우서가 다운 잼과 소환석을 집어삼키는 것을 보고는 뒤늦게 기생수에 대한 것을 떠올린 것이다.
혈표의 심장을 먹어치운 적이 있는 기생수이니 다운 잼과 소환석 역시 거부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기생수의 성장은 분명 주인님께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미니크가 조언을 해주었다. 그녀 역시 그가 기생수를 성장시키는 것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보인 기생수의 능력만 해도 성장에 사용할 다운 잼의 가치로는 충분했다.
“그래도 이놈은 왠지 벌레 같아서 좀 아깝단 말이지.”
기생수가 꾸물거리다 손등을 파고들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그가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이내 다운 잼을 쥐고 있던 손을 고쳐 잡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기생수가 중급 다운 잼을 섭취했습니다.] [기생수가 중급 다운 잼에 담긴 에너지를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그 탓에 중급 다운 잼은 평범한 돌덩이가 되었습니다.] [오랜만의 포식에 기생수가 기분 좋아합니다.] [하지만 기생수가 성장하기에는 공급 받은 에너지가 부족했습니다. 혈표의 심장을 섭취한 이후로 부쩍 성장한 기생수에게는 중급 다운 잼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식사가 아닙니다.] [기생수를 성장시키려면 더욱더 질 좋은 다운 잼을 제공해야 합니다.]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고작 중급 다운 잼 하나로 기생수가 성장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준비해 둔 다운 잼 뭉치를 차례로 기생수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기생수가 중급 다운 잼을 섭취했습니다.] [기생수가 중급 다운 잼에 담긴 에너지를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그 탓에 중급 다운 잼은 평범한 돌덩이가 되었습니다.] [오랜만의 포식에 기생수가 기분 좋아합니다.] [기생수를 성장시키려면 더욱더 질 좋은 다운 잼을 제공해야 합니다. 기생수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습니다.]차례로 다운 잼이 사라졌다. 중급을 넘어 이제는 상급 다운 잼까지 제공하고 있었지만 기생수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지 성장을 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히도 처먹는군.”
김진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상급 다운 잼마저 소진되어 남은 것은 최상급 다운 잼과 소환석뿐이다. 그간 9층 전체의 전력을 끌어올리고 미궁의 주인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답시고 사용한 다운 잼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아나톨리우스에게 받은 군자금과 전쟁의 전리품은 진즉 떨어진지라 근래 들어 나가의 요새도 자금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 탓에 김진우는 최상급 다운 잼만큼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까지 사용한 다운 잼이 아까워서라도 끝을 봐야 할 것만 같았다.
최상급 다운 잼과 소환석을 두고 잠시 고민하던 그가 소환석을 집어 들었다.
[기생수가 소환석을 섭취했습니다.] [기생수가 소환석에 담긴 생명력을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그 탓에 소환석은 평범한 돌덩이가 되었습니다.] [기생수는 처음으로 시식한 소환석의 맛에 몹시 만족합니다.] [기생수의 몸에서 조금씩 변화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생수의 성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마치 도박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다. 본전 생각에 계속해서 투자하는 자신의 꼴이 초췌한 모습으로 판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도박꾼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탓이다.
게다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조차도 그의 추가적인 투자를 독촉하고 있었다.
복잡한 심정에 왼쪽 손등을 바라보니 어쩐지 손등이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김진우는 미친 척하고 남은 소환석을 전부 기생수에게 먹여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소환석을 기생수에게 먹였을 때, 기생수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생수가 소환석을 섭취했습니다.] [기생수가 소환석에 담긴 생명력을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그 탓에 소환석은 평범한 돌덩이가 되었습니다.] [기생수는 포만감에 몹시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기생수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넘어섰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수용하고 성장을 위해 기생수가 변태 과정에 들어갑니다.] [기생수의 성장이 끝날 때까지는 기생수의 특수 능력 ‘탐색’과 ‘마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텔스’ 능력의 기반이 되는 ‘카모플라쥬’ 능력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텔스’ 능력 역시 비활성화됩니다.]눈앞을 가득 메우는 메시지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기생수가 변태 과정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정말로 아까운 최상급 다운 잼을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투자에 인색한 그는 아니었지만 전쟁 준비가 한창인 요새의 사정상 속이 쓰린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환호하고 말았다.
“주인님?”
“됐어! 기생수가 성장에 들어갔어!”
자신을 바라보며 의아한 얼굴을 한 도미니크를 보며 그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
“감사합니다, 왕이시여.”
김진우의 눈앞에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나가 일꾼 발리셔스가 있다.
“그동안 잘해준 보상이다.”
지금 그는 발리셔스에게 일전에 약속한 보상을 내려줄 생각이다.
300여 기의 망자의 군대를 만들어낸 발리셔스는 더 이상 예전처럼 호시탐탐 주인의 등 뒤에 칼을 꽂기 위해 틈을 노리던 망자의 왕이 아니었다.
나가 일꾼의 육신에 지배당한 정신에 의해 강제로 충성을 주입 받은 발리셔스는 이제는 완전히 요새의 일원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발리셔스에게 새로운 육체를 제공해 주었다.
새롭게 제공 받은 육신은 나가의 만신창이 몸이었다. 비록 사지의 이곳저곳이 찢겨져 나가고 불에 타올라 엉망진창이었지만 발리셔스는 몹시 만족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제공받은 육체는 연구 도중에 폭발에 휩쓸려 절명한 상급 나가 마법사의 육체였다. 비록 과거 왕의 육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능력의 한계로 대부분의 술법을 봉인당해야만 한 나가 일꾼의 육체에 비하면 사정이 나아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발리셔스는 그답지 않게 입에 발린 말로 그를 칭송하기까지 했다.
“헛소리 말고 육체부터 챙기지. 아무래도 냉기로 보존했다 해도 상태가 워낙 좋지 않으니까.”
“뜻대로 하겠나이다!”
그의 말에 발리셔스가 재깍 엎드려 손안에 쥔 다운 잼을 움켜쥐었다. 나가 일꾼의 몸으로는 제 몸을 옮기는 술법마저 펼칠 수 없어 이렇듯 다운 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발리셔스는 비참한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는 대신 새로운 육체에 대한 설렘으로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음…….”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발리셔스가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 있던 상급 나가 마법사의 시체가 벌떡 일어났다.
“성공인가?”
김진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상급 나가 마법사 발리셔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발리셔스가 환호를 내질렀다.
“성공이군.”
물을 것도 없이 성공이었다. 만약 실패했다면 상급 나가 마법사는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어야 했다.
[상급 나가 마법사(일반)의 육신이 상급 나가 마법사(영웅급)으로 진화하였습니다.] [상급 나가 마법사의 육신이 발리셔스의 사기를 받아들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상급 나가 마법사가 ‘사령술사’가 되었습니다.] [상급 나가 마법사는 발리셔스의 능력을 사용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사령술의 카테고리 ‘사혼술(死魂術)’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령술의 카테고리 ‘소환술(召喚術)’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령술의 카테고리 ‘사령마법(死靈魔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령술의 카테고리 ‘망자제작술(亡者制作術)’ 비술이 유지됩니다.]망자의 왕에서 나가 일꾼으로, 그리고 장의사로, 지금은 다시 사령술사가 된 발리셔스는 다시 되찾은 사기가 반가운지 몇 번이고 사기를 불러일으켰다 도로 흩어놓기를 반복했다.
“왕께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한참을 그리 들떠서 날뛰어대던 발리셔스가 뒤늦게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어차피 나가의 육신에 갇혀 있는 한 강제될 충성인지라 큰 감흥도 없어 김진우는 성의 없이 손을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앞으로 그대가 이끌 새로운 군대를 만드는 데 주력하도록. 연구에 쓸 시체라면 지금 넘쳐나고 있으니까.”
거의 모든 미궁이 크리쳐 사냥에 몰두해 있는 지금인지라 김진우는 무한히 시체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죽음마저도 왕 앞에 무릎 꿇리겠나이다!”
새로운 군대를 만들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 얼굴을 한 발리셔스가 꾸물거리다 사라졌다.
“끄응. 근데 나가 마법사의 몸이라 그런지 조금 호들갑스러워진 것 같군. 진짜 나가 마법사들처럼 사고라도 치지 않으면 다행이겠어.”
기이할 정도로 가벼워진 발리셔스의 태도에 그가 걱정스레 말하니 도미니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만큼은 그녀 역시도 발리셔스가 사고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한 때문이다.
하기야 하필이면 발리셔스가 제공 받은 육체가 미궁 핵의 합성과 소환석의 연구를 주도하던 가장 골칫덩이 마법사의 육신이었으니 그 누가 발리셔스의 앞날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발리셔스를 통해 새로운 전력 준비를 서두르던 김진우는 갑작스러운 손등의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기생수의 변태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