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22)
던전 견문록-122화(122/319)
# 122
던전 견문록
제 123 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손등 자체가 뜯겨져 나가는 듯한 극통에 김진우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어지간한 통증 따위에는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는 그였건만 그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고 말았다.
“주인님!”
뒤늦게 그의 표정을 발견한 도미니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고 다시 안젤라가 달라붙어 호들갑을 떨었다.
“사제! 사제를 불러와! 아, 아니지! 너, 너도 이제 치유력을 쓸 수 있잖아!”
가뜩이나 창백한 얼굴이 시체처럼 변한 안젤라가 사제를 찾아 난리법석을 떨다가 도미니크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그 바람에 이제 막 도미니크의 손끝에 모이기 시작한 빛 무리가 다시 흩어지고 말았다.
“가만히 좀 있어요!”
평소의 조곤조곤한 말투는 어디로 갔는지 소리를 빽 지르는 도미니크의 기세가 사나웠다. 안젤라가 찔끔 놀라 물러섰다가 다시 들러붙어 김진우를 부여잡고는 발을 동동 굴러댔다.
“가만있을 테니 어떻게 좀 해보라고!”
“알았으니까 그만 좀 수선 피워요.”
그렇게 안젤라의 입을 막아버린 도미니크가 정확하게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잡아내 치유력을 쏟아 부었다. 왕의 조언자가 되며 얻은 도미니크의 치유력이 구체화되어 순식간에 그의 왼손을 집어삼켰다.
빛이 강렬해질수록 김진우의 신음 소리가 작아졌다.
“으으…….”
강렬한 섬광만큼이나 빠른 효과, 그는 그제야 잔뜩 일그러져 있던 얼굴을 펼 수 있었다.
“주인님, 이제 좀 괜찮으세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외쳐오는 두 여자를 본 김진우가 이젠 괜찮다고 잔뜩 갈라지고 쉰 음성으로 대꾸했다.
“갑자기 왜…….”
“기생수, 기생수가 변태를 끝마쳤어.”
겨우 평소의 안색을 되찾은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잔뜩 떠올라 있다.
[기생수가 변태를 마치고 기생수(모충)가 되었습니다.] [기생수가 특수 능력 ‘번식’을 얻었습니다.] [기생수는 앞으로 특정 조건 하에서 자충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충과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자충은 12시간 이후 자동으로 소멸되고 맙니다. 자충은 오로지 모충의 명령을 따릅니다.] [오로지 생존 본능에 의해 살아가던 기생수는 더 이상 하등한 벌레 따위가 아닙니다. 변태를 통해 기생수는 하나의 완전한 자아를 얻었습니다.]그렇게 소란스럽게 변태를 마친 기생수였지만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특정 조건’이라는 것이 충족되어 자충이 생산되어야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 특정 조건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당장은 기생수의 변화를 체감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기생수의 변태에 관한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생수가 아니어도 주변에 처리할 일이 산더미 같은 탓이다.
그는 당장 가장 급한 일부터 찾아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11층의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우스투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우스투스의 미궁을 통해 은신에 능한 장거리 순찰자들과 탐식의 덩어리들이 11층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연락이 두절된 릭샤샤를 찾아 탐색 팀을 구성해 파견했다.
“언제 우리 미궁에 이렇게 수인이 많이 와 있었지?”
미궁을 둘러보던 김진우는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부쩍 늘어버린 수인들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저희 미궁에서 그나마 수인들이 학대를 당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나간 모양이에요. 다른 곳의 수인들은 야만 크리쳐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끄응.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수인들이 전부 호야처럼 뛰어난 암살자이거나 이름 모를 묘인족 여인처럼 성실하고 고분고분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교룡과의 전투를 대비해 고용한 견랑족의 전사가 도망간 전적도 있으니 김진우가 수인족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잡일에는 쓸 만한 이들이니 잠시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정 쓸모없다 판단되면 내쫓으면 되니까요.”
바로 눈앞에 수인족들이 있건만 도미니크는 거침이 없었다.
하기야 긍지 높은 나가이자 왕의 조언자인 그녀의 눈에는 노예처럼 살아가는 수인족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개중에 쓸 만한 놈들이 있기를 바라야겠군.”
나가봐야 야만 크리쳐들의 밥이 되거나 미궁의 주인들, 하다못해 인간들에게 포획되고 말 테니 이곳에서라도 제 할 일을 찾기를 바랐다.
“그래도 무한정 받는 것은 좋지 않을 텐데. 이곳을 찾는 수인들이 많아진다는 건 다른 미궁의 주인들이 부려야 할 노예들이 준다는 소리나 다름없으니까.”
안젤라가 곁에서 걱정스레 한마디 내뱉었다.
“최소한 9층에서는 주인님께 불만을 표할 간 큰 작자는 없어요. 그리고 10층과 11층의 존재들도 함부로 9층을 도모하지는 못할 테고, 8층은 두말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도미니크는 해볼 테면 해보라며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오히려 다른 미궁이 도발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 김에 새롭게 구성된 요새의 병력을 테스트해 보겠다며 스산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안젤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쟤는 안 그러더니 주인님한테 완전히 물들었어요. 전에는 얌전하더니 이제는 전쟁광이네, 전쟁광.”
“전쟁이야말로 우리 요새를 살찌우는 가장 좋은 영양분이니까.”
안젤라의 이죽거림도 태연하게 받아친 도미니크가 김진우를 향해 말했다.
“차라리 요새에 거주하는 수인들을 이용해서 소문을 좀 내야겠어요. 9층 전체가 주인님의 영역이 된 지금 잘만 이용하면 수인들은 주인님의 눈과 귀가 되어줄 거예요.”
역시나 주인을 제외하고는 쉽사리 믿음을 주지 않는 도미니크다운 말이다.
그렇게 갑작스레 늘어난 수인들을 보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김진우와 도미니크, 그리고 안젤라는 갑작스레 미궁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왕이시여, 릭샤샤를 찾아 나선 순찰자들이 돌아왔습니다!”
퀀투스의 말에 반색한 그는 귀환한 장거리 순찰자들을 보고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릭샤샤를 찾아 나선 장거리 순찰자들의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
“대열을 갖추어라!”
절대로 흐트러지는 법이 없던 릭샤샤가 비명처럼 외쳐댔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이내 진짜 비명 소리에 삼켜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꺄아아악!”
“살려줘!”
온 사방에서 언더 엘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댔다.
“맞서 싸우라! 수는 이쪽이 더 많을지니!”
릭샤샤가 다시 소리를 쳐보지만, 동족 중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언더 엘프는 하나도 없었다.
“꺅!”
건장한 언더 엘프 사내 하나가 쓰러진 동족을 짓밟고 내달렸다. 짓밟힌 어린 언더 엘프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고, 그런 어린 소녀를 거대한 그림자가 덮쳤다.
이내 피가 튀고 살점이 이리저리 찢겨져 나갔다.
“아아…….”
어린 일족을 구하기 위해 곡도를 움켜잡은 릭샤샤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손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온 사방이 비명이고 붉은 피뿐이다. 수백의 동족은 좁은 통로를 몰려다니며 비명을 질러대기 바빴고, 그런 동족들을 따라다니는 수십의 그림자가 있었다.
아비규환, 지옥이 있다면 이런 광경일까.
릭샤샤는 멍한 얼굴로 주변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곳저곳에 흩어진 동족을 모으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소문을 듣고 몰려온 동족들을 봤을 때만 해도 귀환이 멀지 않았다며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곧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며, 일천에 달하는 일족이 더 이상 핍박 받지도, 쫓겨 다니지 않아도 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며 그녀는 마냥 기뻐했다.
하지만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미궁의 주인 중 몇몇이 언더 엘프의 규합을 경계하여 공격을 해온 것이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일족은 모두가 은신에 능한 타고난 밀정들, 행적을 따라온 미궁의 병력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마지막 추적자까지 따돌린 일족이 너무 이르게 안심한 모양이다. 은신에 능한 일족만큼이나 추적에 능한 포식자들이 일족의 뒤에 따라붙었다.
설상가상으로 피 냄새를 맡은 추적자들까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이다.
추적자 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고 포악한 줄무늬 땅벌들에게 뒤를 붙잡히고 만 것이다.
“아아…….”
그녀의 눈앞에서 어린 언더 엘프의 육신이 찢겨져 나가고, 건장한 언더 엘프 사내들이 벌들의 억센 이빨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아, 이제 곧 주인님이…….”
일족을 향해 소리치려던 그녀가 금세 입을 다물었다.
황송하게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주인님이 파견한 나가 장거리 순찰자 몇이 땅벌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9층을 정복한 위대한 주인님의 군대답게 용맹하게 싸웠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줄무늬 땅벌들 역시 8층을 지배하는 강대한 미궁의 군대 중 하나였다. 그런 그들을 맞아 층간 페널티로 약화된 나가 순찰자들이 정면 대결에서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장렬하게 땅벌들을 맞아 싸웠다. 그리고는 살해당했다.
아마 이곳에 나가 용기사들 몇, 아니, 용사나 투사 몇이라도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유격전에 능한 그들이라면 적은 수로도 효과적으로 상대의 발목을 붙잡아둘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언더 엘프들은 나가 용사들처럼 용맹하지도, 나가 투사들처럼 전투에 능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독스러운 겁쟁이였다.
언더 엘프들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나가 순찰자들을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당연하게도 고작 스물에 불과하던 순찰자들은 땅벌들에게 둘러싸여 지닌 바 재주를 반도 펼쳐 보이지 못했다.
“아…….”
주인님을 볼 낯이 없었다. 그토록 큰소리치며 미궁을 나섰는데, 막상 찾은 일족이 이렇게나 나약해졌을 줄은 릭샤샤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저의 저주가 앗아간 것은 과거의 영광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날뛰어대는 일족은 터럭만 한 긍지와 용기마저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녀의 일족은 그 긴 시간 동안 완벽하게 지저의 가축으로 길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가축들을 위해 주인님의 영광스러운 군대가 피를 보았으니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더라도 주인님을 볼 낯이 없었다.
“도망치거라.”
악전고투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가 장거리 순찰자 몇이 그녀의 말에 움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생긴 나가들이었지만, 온몸에 피를 덕지덕지 묻힌 나가들의 면면이 낯익었다. 아마도 지난 몇 번의 작전에서 함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나 든든하던 우군들의 얼굴이 잔뜩 지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