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23)
던전 견문록-123화(123/319)
# 123
던전 견문록
제 124 화
“서둘러 몸을 빼거라.”
하지만 그런 지친 얼굴로나마 그녀의 명령을 거부하는 나가 순찰자들이다.
“이곳은 그대들이 피를 흘리기에 가치가 없을지니…….”
릭샤샤가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더 이상의 희생을 치렀다가는 정말로 주인님을 볼 낯이 없었다.
“정 그리 걱정된다면 서둘러 달려가 주인님께 이 상황을 알리거라.”
그렇게 임무를 부여 받고 나서야 주춤거리던 나가 순찰자들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키에엑!”
전장을 이탈하던 나가 순찰자 몇이 땅벌의 감지 능력에 잡혀 사지가 찢겨져 나가고 말았지만, 반 정도의 순찰자는 무사히 전장을 이탈할 수 있었다.
“한심한…….”
자신 역시 과거에는 저러했을 것이다. 주인을 만나 다시 긍지를 되찾기 전까지는 그녀 역시 저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들과 달랐다.
릭샤샤의 몸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그녀의 주변에서 언더 엘프들을 유린하던 땅벌 두 마리가 사지가 찢겨져 흩어졌다.
“싸워라.”
살점과 피가 흩날리는 와중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 그녀가 일족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싸워라.”
언제 잘라낸 것인지 땅벌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다리 하나를 들고 앞으로 내민 그녀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일족은 여전히 오들오들 떨어댈 뿐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구나.”
일족이 잡은 것은 땅벌을 다리를 쥐지 않은 그녀의 반대편 손이었다. 그런 일족을 보며 릭샤샤가 탄식을 내뱉었다.
“네?”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일족이 이내 푸드득 몸을 떨었다.
마치 화살에 맞은 작은 새와도 같은 몸짓, 창백한 입술로 왈칵 피를 쏟아낸 일족의 어린 언더 엘프가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눕히고 말았다.
그런 어린 언더 엘프의 가슴팍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릭샤샤가 건네주려 한 땅벌의 다리가 박혀 있었다.
바로 곁에서 그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언더 엘프 사내가 그 모습을 보며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싸워라.”
이번에도 언더 엘프는 그녀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똑같이 가슴이 꿰뚫려 죽고 말았다.
쓰디쓴 표정으로 일족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통로를 가로질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언더 엘프 러너로 진화하며 얻은 쾌속의 발걸음이 순식간에 도주 중인 일족을 앞질렀다.
“멈추어라!”
일족의 앞을 가로막은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사방으로 칼질을 해댔다. 그 바람에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언더 엘프 하나가 팔뚝이 베여 비명을 질러댔다.
“싸워라! 싸우지 않을 거라면 그 가치 없는 생, 내가 이 자리에서 끊어주리라!”
이렇게 가축처럼 길들여져 긍지는커녕 가장 어린 일족을 돌볼 용기조차 사라진 일족이라면 차라리 지저에서 사라지는 게 나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여전히 주춤거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일족들의 몸을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꺄아아악!”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작스러운 그녀의 돌발 행동에 언더 엘프들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쳤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기세를 높여 따지거나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의 언더 엘프였다. 거처도 없이 떠도는 동안, 살아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저열한 생존 본능에 완전히 지배되어 버린 가엾은 일족의 모습이다.
릭샤샤는 이런 일족을 자신의 주인에게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주인이 원한 것은 제 몫을 하는 한 사람의 전사요 순찰자이지 이런 밥버러지들이 아니었다.
“싸우지 않으면 그대들의 목숨, 내가 거두어주리라.”
“이게 무슨 짓이… 우리는 그저 그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평화는 구걸하는 것이 아닐지니 그대들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어디인들 다를꼬.”
차갑게 대꾸한 릭샤샤가 곡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언더 엘프 수십이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도 잠시, 뒤에서 밀려온 또 다른 언더 엘프들이 그녀의 곁을 스쳐 가려 했다.
그리고 이내 육편이 되어 허공에 흩어지고 말았다.
“고작 수십 분지 일도 되지 않는 적이다. 싸워서 그대들이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라.”
차라리 광기에 가까운 말과 행동, 눈빛마저도 시퍼런 귀화가 타오르는 듯 매섭기만 했다.
“으으…….”
시작은 같은 언더 엘프였으나 김진우의 곁에서 긍지를 찾고 새롭게 언더 엘프 러너로 거듭난 릭샤샤의 존재감은 평범한 언더 엘프들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사납고 흉포했다.
결국 기세에 눌린 몇몇 언더 엘프들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
땅벌들은 격퇴되었다. 애초부터 그 수가 고작 50여 마리에 불과한 땅벌인지라 갑작스레 몸을 돌려 반격해 오는 언더 엘프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땅벌들은 반수에 가까운 동료들을 잃고 몸을 빼내고 말았다.
“으허어어…….”
바닥에 주저앉은 언더 엘프들이 상처 입은 제 몸뚱어리를 끌어안고 신음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릭샤샤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막상 싸우고자 달려드니 땅벌들을 몰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노예로 살아오며 패배 근성에 찌든 언더 엘프들이라고 한들 그 타고난 은밀함과 민첩성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희생이 적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죽은 일족이 많다고 한들 도망치다 무의미하게 개죽음당한 수만큼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릭샤샤는 더욱더 화가 났다. 처음부터 이렇게 맞서 싸웠으면 일족의 희생도 많지 않았을 테고, 나가 순찰자들도 그토록 허무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 한심한 작태에 속에서 천불이 끓어오를 지경이다.
“앞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적은 싸워서 몰아낸다.”
“무, 무기도 없고 지금 이대로는 부상자가 너무 많소.”
한쪽 팔이 찢겨져 나가다시피 한 언더 엘프 사내가 그녀의 말에 항의했다. 하지만 릭샤샤는 대답하는 대신 땅벌의 흩어진 다리들을 주워 언더 엘프들에게 주워줬다.
그 뒤로는 언더 엘프들의 고난의 연속이었다.
릭샤샤는 철저하게 적의 전력을 구별해 싸우고 도망갈 때를 정했으며, 싸우지 않는 언더 엘프들은 그녀의 손에 살해당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언더 엘프의 수가 이제 고작 500에 불과했다. 처음 추적을 피해 달아날 때에 비해 반이나 수가 줄어버렸다.
하지만 릭샤샤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녀는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눈빛이 독살스럽게 변해가는 일족을 보며 뿌듯해했다.
비록 그 사납고 적대적인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일지언정 그녀는 일족이 조금은 쓸 만해졌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런 이들이라면 조금은 주인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렇게 얼마나 추적자들을 맞아 싸우고 또 도망치며 이동했을까. 8층 미궁의 주인들은 도무지 언더 엘프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수백의 언더 엘프들을 보며 탐욕스러운 눈빛을 빛내며 망설임 없이 몇 배나 되는 언더 엘프 무리로 달려들었다.
싸워서 쫓아 보낸 적도 있고 힘이 달려 도망쳐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전투와 도주를 거듭할수록 언더 엘프들은 더욱더 능숙한 전사가 되어갔다.
비록 일족의 피의 대가라고 한 것일지언정 그렇게라도 그들은 타의에 의해 조금씩 가축에서 노예로, 그리고 전사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언더 엘프의 수가 300을 간신히 넘을 무렵, 그들은 마침내 8층의 끄트머리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달려온 언더 엘프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이거야 원, 소식 들었을 때는 안 믿었는데 정말이었네.”
눈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사내, 머리통은 사자의 것이요 목을 둘러싼 것은 역시 사자의 갈기였다.
하지만 몸은 근육질의 거한이었으니 그가 바로 8층의 최강자라 불리는 혈사자 마르쿠스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 근래 지저가 하도 어수선해서 한동안 사냥을 못했지. 언더 엘프들이라면 좋은 사냥감이 될 거야.”
마르쿠스가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그런 마르쿠스의 뒤편으로 그와 똑같은 모습을 한 100여 마리의 혈사자가 사납게 목을 울려대고 있다.
“길을 비켜주시오. 목적한 곳이 있어 이대로 조용히 지나갈 터이니.”
릭샤샤가 한발 나서서 그렇게 말하니 마르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찮은 언더 엘프 따위가 지금 뭐라는 거야?”
웃음 끝에 차가운 살기를 머금은 마르쿠스의 말에 분위기가 한층 더 살벌해졌다.
기껏 그간의 격전 속에서 겨우 심어둔 일족의 독기가 그 사납고 강대한 기세 한 번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 가축은 가축답게 그렇게 눈을 내리까는 거야.”
겁에 질린 언더 엘프들을 본 마르쿠스가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르쿠스는 흡사 300에 달하는 언더 엘프를 이미 다 잡은 것처럼 행동했다.
릭샤샤는 그 안하무인의 태도에 화가 났다. 하지만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일족에게서 순순히 마르쿠스의 말을 따를 기미가 보인다는 것이다.
“싸우지 않으면 그대들은 내 손에…….”
결국 릭샤샤가 일족의 뒤를 막으며 곡도를 뽑아 들었다. 그간 적의 피보다 일족의 피를 더 마셔댄 곡도는 완전히 마도가 되어 있었다.
스르릉 울어대는 마도의 곡소리에 언더 엘프들이 기계적으로 손에 쥔 크리쳐들의 다리와 이빨, 뿔을 들어 올렸다.
“호오, 언더 엘프 주제에 왕 노릇이라도 하려는 건가?”
마르쿠스가 릭샤샤를 똑바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눈 아래로 깔아보던 마르쿠스의 커다란 눈동자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나의 왕은 오직 한 분뿐일지니.”
릭샤샤가 그렇게 말하고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안타깝게도 퇴로는 없었다. 어차피 9층을 향하는 통로는 이곳뿐이었다.
여유가 있다면 7층의 파티 홀을 통해 요새에 기별을 넣었겠지만,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내달리는 도중에 길을 잘못 잡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다시 발길을 돌리기에는 자신의 일족을 두고 군침을 흘리는 이가 너무도 많았다.
“모두 들어라!”
곡도를 늘어뜨린 릭샤샤 일족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돌아가기에는 추적자들이 너무 바짝 따라붙었느니 그대들이여, 싸워서 이길 필요는 없고 그대들의 발걸음을 9층에 도달하는 데 목적을 두도록 하거라!”
9층 전체가 주인의 영역이니 마르쿠스의 군대만 지나면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을 설명해 주니 언더 엘프들의 죽어버린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빛이 돌아왔다.
“무슨 작당들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네놈들은 9층까지 단 한 놈도 못 갈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 전부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언더 엘프라면 제법 쓸 곳이 많거든.”
고양이 쥐 생각해 준다고, 마르쿠스가 되도 않을 소리를 지껄여 댔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는 완벽한 포식자, 언더 엘프들은 한낱 사냥감에 불과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언제 따라붙은 것인지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한 줄무늬 땅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침도 못 발라봤는데 벌써부터 식탁에 파리가 꼬이기 시작하는군.”
마르쿠스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젊고 건강한 놈들만 생포하고 상처가 있거나 나이든 놈들은 전부 죽여라.”
지시가 떨어지자 마르쿠스의 뒤에 도열해 있던 일백의 혈사자들이 거침없이 언더 엘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배후에서 들려오던 땅벌의 날갯짓 소리가 성큼 다가오더니 마침내 그 흉물스러운 벌 떼의 모습이 드러났다.
릭샤샤와 언더 엘프들이 강적들 사이에서 완전히 박살이 나는 것은 기정사실. 그런데 갑작스레 마르쿠스와 혈사자들의 뒤편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혈사자들은 그런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흉포하게 울부짖으며 달려었다.
푸드득!
일촉즉발, 당장에라도 언더 엘프 무리의 선두가 혈사자들에게 짓밟힐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전장의 한가운데에 푸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검은 깃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