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25)
던전 견문록-125화(125/319)
# 125
던전 견문록
제 126 화
움찔,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치는 마르쿠스를 가만히 노려보던 김진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위 귀족의 위엄이 발동합니다.] [하위 귀족의 위엄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비활성화 되었습니다.]진우는 마르쿠스가 귀족의 위엄에 짓눌려 스스로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귀족의 능력을 비활성화 시켰다.
임의로 능력을 조절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확신이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었다.
하위 귀족의 위엄이 비활성화 됐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씨익, 하고 웃어보였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차갑고도 서늘한 미소였다.
“그대의 것인지 몰랐소. 만약 알았다면 손대지 않았을 거요.”
귀족의 위엄이 비활성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는 짓눌린 얼굴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상까지 위명이 자자한 8층의 강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기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태생이 8층과 9층의 주인이라는 격의 차이가 있었고, 강적을 차례로 격파하며 강화효과가 증폭되어 전승의 사령관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에 비한다면, 마르쿠스는 그저 그런 미궁의 주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래. 그랬으면 좋았겠지. 저들에게 이름표라도 달아주었다면, 그대와 이렇게 마주하는 일이 없었을 거야.”
내용이야 마르쿠스의 말에 동의하는 뉘앙스였지만, 표정과 행동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도 그렇다고 살의를 거두지도 않았다.
“바로 그렇소! 그러니 지금에라도 알았으니, 서로 얼굴 붉히지 맙시다.”
마르쿠스는 불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의 말끝을 붙잡고 매달렸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고 믿고 싶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애초에 이 상황을 다시 되돌릴 생각이 없었으니, 축 늘어져 있던 그의 오른손이 허리춤에 매어 있던 싸구려 합금 칼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나도 그렇게 하고는 싶은데, 그대가 내가 아끼는 것에 손을 댔거든.”
“아끼는 것?”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마르쿠스가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저기 저 아가씨는 내가 아끼는 이들 중 하나야.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면서, 나를 위해서라면 제 사지가 잘려나가도 웃을 여자거든. 그런 아가씨를 내가 아끼지 않을 리가 없잖아.”
과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와서도 전령의 임무를 완수했던 릭샤샤다. 그때 릭샤샤가 아니었다면 김진우와 나가들은 교룡왕과 교룡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
아무래도 마르쿠스는 오해를 한 모양이다. 지저에서 가치 없고 천하기로 유명한 언더 엘프 하나를 감싸는 김진우의 태도에,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노린 건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였다.
“하찮은 언더 엘프 하나 때문에 피를 보겠다는 거요?”
이제는 좋게 상황을 무마하기에는 글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마르쿠스의 태도가 돌변했다. 다소 억눌려 있던 얼굴에 흉포함과 잔혹함이 떠올랐고, 주춤거리던 두 발이 땅을 딛고 굳건하게 버티고 섰다.
“피? 무슨 피?”
그런 마르쿠스를 보며 김진우가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피를 보는 건 내가 아니지. 이곳에서 피를 흘릴 건 혈사자들과.”
그의 시선이 전장을 훑어갔다. 그의 시선이 신경 쓰이면서도 마르쿠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표정이 바짝 굳어 버렸다.
그제서야 주변이 필요 이상으로 조용함을 깨달았던 탓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마르쿠스가 발작적으로 몸을 돌리고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언제…….
8층에서 최강을 자부하던 자신의 혈사자들이 차디 찬 바닥에 누워 버르적거리고 있었다.
강인한 두 팔은 떨어져 나가 바닥을 뒹굴고, 날래고 억센 두 발은 무참하게 꺾여 보기 흉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그에 반해 혈사자들을 상대한 용기사들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 개중에는 이런저런 상처를 입은 호법룡들도 보였지만, 기수를 잃은 호법룡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패배, 마르쿠스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부하들의 처참한 주검을 바라보았다.
“이쪽도 정리가 끝났어요.”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마르쿠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을 것이다.
줄무늬 땅벌들을 상대하기 위해 언더 엘프들의 후미로 빠졌던 모리건마저 돌아왔으니, 그야말로 앞이 깜깜했을 것이다.
“몇 놈 도망치기는 했지만, 나중에 제가 따로 정리하도록 하죠.”
“8층에서 그렇게 허비할 시간은 없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저 혼자 조용히 다녀올 시간만 주시면 돼요.”
현실성이 없는 대화, 마르쿠스는 8층의 강자 중 하나인 줄무늬 땅벌들의 미궁마저도 제 손에 올려둔 것처럼 지껄여대는 두 남녀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제서야 전승의 사령관의 명성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쿠스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해도 마르쿠스는 8층의 최강자 중 하나였고, 얼마 전에는 가장 강대한 적인 큰엄니 멧돼지들마저도 쫓아낸 전적이 있었다.
일이 꼬였지만 상대가 아무리 전승의 사령관이자 지저의 유일무이한 정복자라고 한들, 허무하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꼬리를 마는 대신 갈기를 부풀리고 도전적인 얼굴로 김진우를 노려보았다.
“호오.”
“제법 기개가 있는데요? 우선지, 말캉말캉 뼈대도 없는 그 놈보다 훨씬 나아요.”
그런 마르쿠스를 보며 김진우가 감탄을 하고, 모리건이 한마디를 얹었다.
“어차피 그대는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겠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노린 것은 아닌가?”
지상까지 악명이 자자한 미궁의 주인답게 위엄을 되찾은 마르쿠스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런 마르쿠스를 보며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이내 멈췄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
처음에는 느릿느릿했던 걸음이, 그 짧은 한마디를 끝마치는 순간 폭발적인 도약이 되어 있었다.
“크허어어엉!”
마르쿠스가 흐릿해진 김진우의 그림자를 따라 몸을 날리며 양손에서 길게 손톱을 빼보였다. 순식간에 1미터 가량 늘어난 손톱이 마구잡이로 허공을 할퀴어대고, 그때마다 공기가 잘게 찢겨져 나가듯 거북스러운 소음이 터져 나왔다.
“애초에 난 그대를 염두에 둔 적이 없어.”
하지만 그 매서운 공격마저도 김진우의 실체를 찾는 데는 실패했으니, 마르쿠스는 등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속삭임에 깜짝 놀라 다시 양 손을 휘저어댔다.
“그저 그대가 하찮다 말하는.”
이번에는 왼쪽에서 그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언더 엘프 때문에 화가 났을 뿐이지.”
다시 오른쪽에서 들려온 속삭임, 마르쿠스가 손톱을 길게 그어가려다 신음을 내질렀다.
“컥!”
그렇게 신음을 내뱉는 마르쿠스의 두텁고 강인한 목이 뒤로 꺾이듯 재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르쿠스의 목 아래, 갈기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은 손이 있었다. 마치 잘려나간 릭샤샤의 머릿채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김진우의 두 손이 마르쿠스의 갈기를 뜯어내 버렸다.
“끄아아악!”
평생 비명이라고는 질러본 적도 없는 흉폭한 혈사자들의 우두머리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갈기가 찢겨져 나가며 살점을 보기 흉하게 들어냈던 탓이다.
어지간한 인간이었다면 대번에 쇼크사 했을 정도의 위중한 상처, 하지만 마르쿠스는 과연 8층의 강자를 자처할 자격이 있었다.
마르쿠스는 비명을 지를지언정 양손을 매섭게 휘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야. 그대는 운이 없어. 아니. 아주 재수가 없어.”
하지만 손쉽게 마르쿠스의 공격을 피해낸 김진우는 그런 발악적인 공격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는 전부터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무척 궁금했거든.”
김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칼을 쥐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사정없이 마르쿠스의 복부를 후려쳤다.
“크헉!”
양손을 날래게 휘둘러대던 마르쿠스가 순간적으로 손을 멈추고는 입을 쩍 벌렸다. 거대한 아가리를 타고 걸쭉한 침이 쭈욱, 흘러내렸다.
“9층에서는 증폭효과가 커서 의미가 없고. 그렇다고 다른 층을 가자니, 마땅한 상대가 없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잠시 마르쿠스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려주었다가 다시 발길질을 했다. 겨우 숨을 정리했던 마르쿠스가 그 성의 없는 발길질 한 번에 처참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8층의 혈사자라면 그래도 나름 좋은 상대 아니겠어?”
말로는 그리 말하면서도 자신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구는 마르쿠스에 대한 조소가 역력한 어투,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마르쿠스는 이를 갈았다.
“감히!”
김진우의 공격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뒤틀던 마르쿠스가 양손을 우악스럽게 휘둘러 김진우의 어깨를 잡는데 성공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마르쿠스의 손톱이 순식간에 김진우의 심장을 쥐어파듯 내질러졌다.
“그런데 말이야…….”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던 마르쿠스가 그의 음성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제서야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상대를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렸다.
캉.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듣기 거북한 소음, 김진우의 가슴팍을 찔러갔던 손톱이 몽땅 부러져 바닥을 나뒹군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을 잘 못한 모양이야.”
상황을 파악한 마르쿠스가 몸을 빼내려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느새 뻗어온 상대의 양손이 제 두손을 옴짝달싹 못하게 움켜쥐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대는 내 힘을 테스트하기에는 너무 약하군.”
말을 하는 사이에도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대던 마르쿠스가 입을 쩍 벌리더니, 날카로운 이를 들이밀고는 김진우의 머리를 집어 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송곳니는 김진우의 머리에 침 하나 묻히지 못했으니, 이빨이 닫기 직전 김진우야 양손을 부여잡은 채로 발길질을 마구 해댄 탓이었다.
마침 쩍 벌어져 있던 마르쿠스의 주둥이가 턱이 빠질 듯 떨어져 내렸다.
“그냥, 그대는 너무 운이 없었을 뿐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말도록.”
눈동자가 풀려가는 마르쿠스를 바라보며 발길질을 해대던 김진우가 양손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마르쿠스의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서서히 머리를 뒤로 빼다 그대로 거대한 머리통을 들이 받아버렸다.
콰직.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잠깐의 텀을 두고 마르쿠스가 그대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
“음. 이제는 진짜 괴물이 됐군.”
김진우와 마르쿠스와의 전투를 지켜보던 모리건이 혀를 찼다. 마르쿠스라는 혈사자가 그다지 특출난 강자는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농락당할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한 층을 대표하는 강자 중 하나가 그녀의 주인에게 저렇듯 농락을 당하고 있으니, 그녀는 새삼 그와의 첫만남이 떠올랐다.
부하들을 내세운 차륜전, 그에 이어 온갖 증폭효과를 몸에 두르고는 깨어난지 얼마 안 되는 자신을 몰아붙이던 그는 그다지 눈 여겨 볼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내심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하찮다 생각했던 그녀의 주인은 11층 백작의 협박에도 자신을 내놓지 않을 정도로 강단이 있었으며, 보복을 위해 출병한 10층의 귀족 연합군을 가지고 놀 듯 농락하다 전멸 시킬 정도의 수완이 있었다.
그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일신의 전투 능력이 11층의 귀족들에 비해 손색이 있었을 뿐, 그 외에는 심층의 고위 귀족들에 못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주인이 이제는 슬슬 육신과 다른 능력의 균형마저 맞춰지려 하고 있었다.
“언제 한 번…….”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짧은 시간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주인을 바라보던 모리건이 입술을 핥으며 들뜬 얼굴을 해보였다.
“아직은 아냐…….”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그녀의 주인은 자신과 견주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컸다.
당장 타고난 전투 센스와 경험이 부족했으며, 결정적 한방이 아쉬웠다. 지금만 해도 저 거대한 혈사자의 최후를 장식하는 방법이 하필이면 박치기였다.
아마도 증폭 효과가 없었다면, 전투가 조금은 더 치열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고전을 했을 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녀는 그의 주인에게 조금은 더 시간을 주기로 했다.
저기서 조금만 더 강해지면, 증폭 효과의 증폭량이 몇 배는 더 늘어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군침을 삼키는데, 마르쿠스를 처리한 김진우가 양손에 묻은 피와 갈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증폭을 억제하는 게 더 힘들군.”
승리의 기쁨따위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 김진우가, 푸념처럼 지껄여댔다. 그리고 그의 이번 한마디에는 어지간한 모리건조차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방금 전에는…”
“말했잖아. 적당한 상대가 보이면 테스트 해볼 거라고.”
놀란 그녀를 보며 김진우가 시큰둥한 어투로 내뱉듯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