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26)
던전 견문록-126화(126/319)
# 126
던전 견문록
제 127 화
#50. 전쟁 임박
마르쿠스와 혈사자들을 처리한 김진우는 여전히 납작 엎드린 채 몸만 떨어대는 언더 엘프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언더 엘프 일족은 자신들이 그저 겁에 질려 목숨을 구걸해야 했던 포식자들을 어렵지 않게 처리한 나가들의 존재에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 모습이 하도 비굴하고 초라해 보여 그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가치 없군.”
단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로 언더 엘프들의 운명은 결정 지어졌다.
“주인의 뜻대로 하소서.”
유일하게 그에게 언더 엘프들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는 릭샤샤마저도 입을 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는 것으로 일족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용기사들은 마르쿠스와 혈사자들의 사체를 챙겨, 미궁으로 귀환하라!”
그 말과 함께 언더 엘프들에게 시선을 거둔 김진우가 몸을 돌렸다.
용기사들이 능숙한 동작으로 혈사자와 마르쿠스의 시체를 수거했다.
“릭샤샤여. 우리는 어찌 해야 하오.”
그때까지만 해도 멍하니 바닥에 엎드려 있던 언더 엘프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릭샤샤에게 물었다.
와들와들 몸을 떨면서 자신의 처우에 대해 묻는 언더 엘프의 모습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비굴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릭샤샤는 더욱 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대가 말한 안식처는…”
대답이 없는 릭샤샤의 태도에 와락, 겁이 났는지 언더 엘프가 애원하듯 매달렸다. 피냄새가 자욱한 전장은 크리쳐들을 불러 모으기에 딱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곳에는 야생 크리쳐들이 바글바글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몰려든 크리쳐들은 피냄새 향긋한 시체 대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언더 엘프들을 보고는 침을 질질 흘려댈 게 분명했다.
자신들의 미래를 깨달았는지 언더 엘프들이 하나 둘 슬며시 고개를 들고는 나가들과 릭샤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런 그들의 처우를 말해주지 않았다.
릭샤샤 역시 대답 대신 그의 곁에 서 몸을 돌렸을 뿐이다. 모리건마저 김진우를 따라 현장을 떠나자, 덩그러니 남겨진 언더 엘프들이 이리저리 눈을 굴려대다 아직 떠나지 않은 용기사들을 보고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괜한 짓을 했군.”
“주인께 면목이 없나이다. 일족의 쇠락이 이렇게나 처참할지 상상도 못했나이다.”
“뭐라고 하자는 건 아니야. 어쨌건 돌아왔으니, 그걸로 됐어. 다만 그대가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했으니, 그게 안타까울 뿐.”
언더 엘프들의 비루한 모습을 떠올린 김진우는, 그들이 차라리 잘려져 나간 릭샤샤의 머릿채보다 가치가 없다 판단을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괜한 고생을 한 릭샤샤가 안쓰러워보일 지경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가만히 고개를 숙인 릭샤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동족이라고 신경 쓰이는 모양이군.”
“제가 감히 어찌 주인 앞에서 그들을 두둔하겠나이까. 그저 주인께 힘이 되지 못해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옵나이다.”
릭샤샤는 실제로도 김진우가 언더 엘프들을 방치하다시피 하고 몸을 돌렸을 때조차 일족을 두둔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제 와서 그의 앞에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것이다. 그 점이 의아해 그가 이유를 물었다.
“저들은 본디 타고난 순찰자들이옵나이다. 지금은 오랜 노예 생활에 좀 먹은 정신과 비루해진 육신 탓에 드러나지 않으나, 때가 되면 제 몫을 할 것이 분명하나이다.”
“기회를 주자는 것인가?”
사실 릭샤샤가 부탁을 한다면 300도 채 되지 않는 언더 엘프 일족이 자리를 잡을 곳을 만들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9층 전체를 발아래 둔 지배자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질문에 릭샤샤는 감히 생각도 한 적 없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저었다.
“가축처럼 자라, 짐승처럼 생각하니 저들에게 기회라는 말은 가당치 않나이다. 다만 그들에게도 용도가 있을 것이니…”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그들에게 심층의 염탐을 맡기소서.”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김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하디 귀한 나가들을 허투루 소모치 마시고, 가치 없는 저들을 이용하소서. 비록 희생은 있겠지만 성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나이다.”
“냉정하군. 그래도 그대의 일족이 아닌가?”
“주인의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동족이 아니라 제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겠나이다.”
그렇지 않아도 탐식의 덩어리들을 11층으로 내려보내긴 했지만, 정보를 얻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층을 벗어난 탐식의 덩어리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다 이내 소멸해버렸고, 그마저도 대부분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11층의 전쟁에 휘말려 소멸되고 말았다.
그런 만큼 그도 릭샤샤의 제안에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겁이 많아서야, 뭘 할 수 있겠어.”
“짐승에게도 가족은 있고, 모성애와 부성애는 있나이다.”
“그 말은?”
“처음 일족을 찾았을 때, 가족이 있는 자들 위주로 선별하여 이끌었나이다.”
뒤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릭샤샤는 가족을 인질로 잡고 언더 엘프들을 사지로 내몰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족마저도 돌아보지 않는 그 비정함에 김진우는 차라리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대의 일족이다. 그대가 말만 한다면, 나는 저들에게 안전하게 모여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줄 수 있다.”
그의 질문에 릭샤샤는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치 못하는 저들에게 주인님의 자비는 가당치 않나이다. 그저 짐승처럼 부리고 가축처럼 배를 가르소서.”
김진우는 릭샤샤의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을 떠보는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신색, 그는 그제서야 그녀가 언더 엘프 러너로 성장할 때 보았던 메시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긍지도 없이 지저를 떠돌던 이 방랑자는 왕을 모시고 진정한 충성을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긍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긍지는 왕의 영광과 승리이며, 이를 위해 어떤 일이든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보다 더럽고 비천한 일이라고 하여도 그녀에게는 더없는 영광과 기쁨입니다.’
‘고유 능력, ‘충성과 봉사’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녀는 왕의 명령을 수행할 때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왕의 명령이라면 그녀는 기꺼이 웃으며 제 동족의 등뒤에도 칼을 꽂을 것입니다.’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요새와 그의 이득을 위해 기꺼이 동족을 죽음으로 내몰 각오를 보였으니까.
“끄응. 돌아가서 결정하도록 하지.”
귀환길에 오른 용기사들에게도 언더 엘프들의 처우에 대한 것은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평소처럼 지저를 달려 요새로 귀환할 것이다. 그리고 언더 엘프들이 만약 아직도 요새를 정착지로 생각한다면, 이를 악물고 용기사들을 쫓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으리라.
나가 용기사들은 9층에서도 쾌속한 진군과 신출귀몰한 기동으로 이름이 높은 존재들이었으니까.
만약 그들이 끝까지 낙오하지 않고 요새에 도착한다면 그는 언더 엘프들을 받아줄 것이다.
그 이후에야 릭샤샤의 말처럼 소모품처럼 11층으로 내몰든지, 그도 아니면 따로 쓰임을 찾든 지간에 일단은 쉴 곳을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
“주인의 뜻대로 하소서.”
릭샤샤는 자신이 주제넘게 나섰다 생각이라도 한 모양인지 뒤늦게 고개를 깊게 숙이며 물러났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김진우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은 마르쿠스의 미궁부터 처리하지. 주인 없는 상태로 오래 두면 파리가 꼬이게 마련이니까.”
***
이미 주인을 잃은 마르쿠스의 미궁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당연하게도 김진우는 그 어떤 방해나 저항조차 받지 않은 채 미궁의 핵에 당도할 수 있었다.
“호오. 8층에도 제법 쓸 만한 미궁이 있었군.”
층간 격차가 있으니, 잘 쳐줘 봐야 5등급일 거라 생각했던 마르쿠스 미궁의 핵은 무려 6등급에 달했다.
게다가 머금고 있는 던전 에너지 역시 한계치에 가까웠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게 횡재를 한 것이다.
“듣기로는 큰엄니 멧돼지들의 우두머리가 혈사자들에게 밀려 9층을 찾은 것이라 하였나이다. 비록 주인의 위엄에 이제는 가치 없는 이름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 층을 대표하던 강자인 마르쿠스이니 이 정도 힘을 비축해놓은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옵나이다.”
릭샤샤가 그간 모아온 8층의 정보를 슬며시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 말이 맞아. 제법 쓸 만해. 이 정도면 당장 활성화 시켜서 전력으로 사용해도 되겠어.”
김진우가 흡족한 얼굴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11층의 전쟁은 곧 지저 전체로 확산 될 것이다. 그런 와중에 8층의 미궁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훗날 8층에 진군하게 된다면 교두보로 삼기에 이보다 적당한 곳은 없었지만, 전선이 확대되는 것은 지양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고민하던 끝에 결국 미궁의 핵을 추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돌아간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최상급 다운 잼에 핵을 추출해 옮겨 담은 김진우는 미련 없이 심장을 빼앗긴 미궁을 떠났다.
***
귀환길은 순탄했다. 마르쿠스의 미궁 자체가 8층의 끄트머리에 있었던 데다가 9층 전체가 그의 발아래에 있으니, 순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주인님!”
도미니크의 환대에 미소를 지은 그가 슬쩍 그녀의 매끈한 다리를 쳐다보았다.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조언자가 쭉 뻗은 다리를 내놓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밤이 된 모양이었다.
“용기사들은?”
“나갔던 인원 그대로 돌아와 지금은 휴식중이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들을 달고 왔던데요.”
그의 질문에 도미니크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를 했다. 그녀가 말하는 ‘이상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몇이나 왔지?”
“어리고 늙고, 다치고 멀쩡하고 다 포함해서 이백사십구, 일단은 외곽에 전부 모아놨어요.”
앞뒤 다 자른 대화에 도미니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김진우는 생각보다 적은 낙오자의 수에 저도 모르게 릭샤샤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도망치고, 숨는 데 이골이 난 이들이옵나이다.”
여전히 이 냉혹한 언더 엘프는 자신의 동족을 탐탁찮아 했다. 대체 이렇게 홀대를 할 거면 왜 일족을 모은다고 고생을 한 것인지, 이번 외유에 동족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진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그대로 둔다. 대신 감시자를 붙여, 그들의 대화와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보고하도록.”
아무래도 김진우는 언더 엘프들의 시험을 쉽게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도미니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간 모아온 정보를 토대로 보고를 했다.
11층의 상황은 여전히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고, 이제는 10층의 남작 몇이 11층 백작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마저 들려올 지경이었다.
거기에 더해 아나톨리우스의 군대가 11층에서 적을 맞아 대패했으며, 파르테논이 자랑하던 절망의 사제단 역시 극심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1층의 백작들이 더 버텨줘야 할 텐데.”
아직 김진우에게는 아나톨리우스의 존재가 필요했다.
비록 물질적 지원은 완전히 끊겨버렸지만, 밀약의 대가로 얻는 11층 백작들의 정보가 적지 않았으니 훗날을 위해서라도 아나톨리우스가 조금 더 버텨주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런데 도미니크는 현재 가장 피해를 많이 본 백작들 중 하나가 아나톨리우스라며 우려를 표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그 음흉한 작자가 제 전력을 고스란히 전쟁에 쏟아부었을 리가 없잖아.”
“저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랍니다. 아나톨리우스라면 분명 전쟁이 끝이 난 뒤에 움직이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숨겨두었을 게 분명해요. 다만 생각보다 전쟁이 길어지는 게 과연 그에게 전쟁 이후를 도모할 기회가 있을지가 의문일 뿐이에요.”
생각보다 도미니크는 전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하기야, 제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전투조차도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하고 있는 백작들이니 농담으로라도 전황이 좋다는 말은 하지 못할 법도 했다.
그렇게 11층의 상황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김진우는 코앞까지 다가온 전쟁의 그림자를 절실하게 느꼈다.
머지않았다. 11층을 휩쓴 전쟁은 분명 9층에도 찾아올 것이다.
주먹을 다잡은 그는 지저와 지상을 오고 가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보유중이던 다운 잼의 상당량을 환전해 지상의 무기를 구했고, 그 과정에서 송종철의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과연 캥기는 구석이 있는지 송종철은 군말 없이 그가 부탁한 ‘진짜 전쟁 무기’들을 공수해주었다.
과연 지상의 무기들이 앞으로 닥쳐올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해줄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완을 발휘해 전쟁을 대비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저와 지상을 넘나들며 눈코뜰 새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던 김진우는 피로에 지쳐 왕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악몽의 초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