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27)
던전 견문록-127화(127/319)
# 127
던전 견문록
제 128 화
“너희들은 자유다.”
거미공작이 툭, 하고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지만, 토굴꾼들 중 쉽사리 걸음을 떼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 좁고 지저분한 토굴과 닭장 같은 침소가 세상의 전부였던 탓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 자유를 얻었을 때,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졌다.
난생 처음으로 누구의 명령 없이 덩그러니 남겨진 그들은 손을 꼬물거리며 온몸을 베베 꼬아댔다. 할 일을 잃은 두 손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들은 이내 깨달았다.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거미 감독관도 없으며, 가혹한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던 악취 나는 음식조차도 더 이상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깨달았을 때, 토굴꾼들은 하나, 둘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 미궁의 외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김진우 역시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어디론가 사라진 토굴꾼들을 따라 발걸음을 뗐다.
“아…”
완전한 목표의 상실,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해나갈 때는 몸은 고될지언정 마음은 편안했다.
비록 그 평안이 거짓된 위선과 기만으로 세워진 것이라 한들 그는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가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기만 했다.
“진우야. 가자.”
그런 그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작고 하얀 손에 쥐어진 자신의 투박한 손을 보았을 때, 김진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라는 것이 생겼다.
“절대 이 손 놓지 마.”
스스럼없이 손을 잡은 소녀, 소희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음침하고 더러운 토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미소였다.
김진우는 그 미소를 보고는 불안함마저 잊고 덩달아 웃고 말았다.
“가자.”
그런 그를 보며 소희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이 마치 지상명제라도 된 것처럼 작고 여린 손을 꼭 붙잡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토굴이 이어진다. 그리고는 토굴이 곧 지저의 통로를 만나 조금은 넓은 길이 되었다. 단지 그뿐이었을 뿐인데,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지저의 어둠은 여전했고 정리되지 않은 땅굴은 이곳저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뼛조각과 오물 따위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주변의 공기가 변했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음습하지만, 불길하지는 않다.
어둡지만, 심장이 꽉 조이는 갑갑함은 없다.
그리고 조금 더 길을 걸었을 때, 김진우는 그것이 미궁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부터는 조심해야 돼. 이곳에는 본능밖에 남지 않은 괴물들이 넘쳐나니까.”
똑같이 지저에서 나고 자라 토굴꾼으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그보다는 지저에 대해 해박해 보였다.
“괴물이라면 저 안에도 넘쳐나는데.”
“달라. 거미 감독관은 우리를 부려먹기 위해 존재하지만, 이곳의 괴물들은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존재해.”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저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저에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생명체였으며, 그리고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그들을 발견한 괴물들은 하나같이 침을 흘려대며 게걸스럽게 턱을 딱딱 거렸다.
“절대 돌아보지 마.”
달리는 도중에도 소희는 몇 번이나 그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김진우는 그녀의 말을 충실히 따라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괴물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등뒤까지 따라왔을 때도, 그 악취나는 숨결에 등가가 축축하게 젖어올 때도 그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그녀를 따라 앞만 보고 달렸을 뿐이었다.
이따금씩 다른 토굴꾼을 만나기도 했다. 김진우는 다른 토굴꾼을 만날 때면 무척 반갑게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소희는 어쩐 일인지 다른 토굴꾼들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을 경계했고, 우연히 마주쳐도 말을 섞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을 보지 못한 것처럼 걸음을 서둘렀을 뿐이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김진우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토굴꾼들은 이 지저의 먹이 사슬에서 가장 아래에 속하는 존재였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먹고 마시는 것마저도 하루하루 힘겹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는 비교적 이르게 사냥법을 익힌 이들이 있었다.
“크억.”
언제 다가온 것일까. 잠이 든 틈을 타 접근한 토굴꾼은 비명을 지르며, 제 목을 부여잡았다. 그런 토굴꾼의 목에 뾰족한 뼛조각이 박혀 있었다.
“누나?”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이는 그를 소희는 말없이 안아주었다.
“지금부터는 누구도 믿지 마. 나 말고는 믿지 마. 아니, 나조차도 믿지 마. 너는 오직 너만 믿는 거야. 알겠어?”
뜻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댔다. 뒤늦게 토굴꾼의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갔다.
지저는 광활했다. 끝없는 어둠, 그리고 습격, 하지만 그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조금만 참아.”
소희가 몇 번이나 홀쭉하니 들어간 배를 어루만지며 다독여 주었지만, 배고픔은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미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몸이 무거워지고 눈앞이 노래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김진우는 그런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투정을 부리는 대신 손 끝에 느껴지는 온기에 끝없이 집착했다.
그렇게 주린 배를 잡고 나아가기를 한참, 김진우는 외진 토굴의 사각에 생겨난 구덩이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토굴꾼을 만났다.
토굴꾼은 몹시 지쳐 있었으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토굴꾼은 알 수 없는 욕망이 담긴 시선으로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기력이 그새 다했는지 이내 손을 떨어트리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완전히 숨을 멈추었다.
그렇게 숨이 멎은 토굴꾼을 보며 김진우는 기이한 열망에 시달렸다. 비록 뼈가 다 드러나는 앙상한 몸이었지만, 토굴꾼의 몸은 그가 보기에 몹시도 탐스러워 보였다.
“안 돼. 우리는 인간이야.”
그 말 한 마디에 혼미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먼 옛날 자신을 위해 죽어갔던 사내들의 얼굴이 스쳐가고, 그는 뒤늦게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괜찮아. 괜찮아.”
자괴감에 고개를 숙인 그를 소희는 꼭 안아주었다. 그것이 괜히 안심이 되어 그는 괜스레 울어버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왜 다른 토굴꾼들을 조심하라고 했는지, 또 그토록이나 그들을 경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대체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미궁에서 자라 평생을 토굴꾼으로 살아온 것은 마찬가지,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이런 사실들을 마치 겪어보았던 것처럼 알고 있었던 것일까.
망설임 끝에 던진 질문에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김진우는 더욱 더 강한 생존욕에 불타올랐다.
토굴 사이에 돋아난 정체불명의 이끼를 주워 먹고, 악취 풍기는 정체불명의 날고기를 망설임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수시로 식량과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가 지저의 포식자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새의 알을 탐을 낸 것은. 그것은 정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 사실을 깨달았들 때는 이미 늦고 난 뒤였다.
“누나.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언제 자신들을 둘러싼 것인지, 날개를 퍼드득 거리며 위협적으로 울부짖는 거대한 새들을 보며 김진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런 그를 보며 소희는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감싸주었다.
“괜찮아. 아직 도망칠 수 있어.”
사방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보면서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게 그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야. 우리는 못 도망쳐.”
무심코 튀어나온 자신의 음성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냉소적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김진우는 끔찍할 정도의 위화감을 느끼고는 소스라쳤다.
당장에라도 억센 부리를 털어낼 것만 같은 거대한 괴조의 몸짓도, 포기하지 않고 퇴로를 찾는 소희의 눈빛도,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흘러간 지난 과거의 기억이자, 잊지 못해 차라리 지워버린 누군가의 망령, 그리고,
“꿈이로군.”
앳되고 순진무구한 음성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냉소가 가득한 차디찬 음성, 김진우는 스스로가 악몽의 한 가운데 있음을 깨달았다.
“조금 더 지켜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자각했어. 아쉽게 됐어.”
무덤덤한 음성 하나가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고, 그 순간 온 세상이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갈라지고 흩어져 산산조각 나버렸다. 흩어진 파편 속에 담긴 소희의 조각을 눈으로 쫓으며 김진우는 차갑게 대꾸했다.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을 텐데.”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게 그대와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일 뿐, 다른 뜻은 없었다.”
마지막 파편 하나가 흩어지는 것을 보며 괜스레 심장이 조여지는 느낌에 김진우가 필요 이상으로 으르렁거렸다.
“차라리 부하를 보내지 그래. 이딴 되도 않을 장난은 그만 하고.”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지금 11층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혀에 기름을 칠한 듯, 지껄여대는 사내, 디나리온을 보며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서야 잃었던 현실감이 깨어나며 과거에 머물렀던 정신이 현재를 찾았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그렇게 밀리는 거지?”
11층의 백작들이라면 10층의 남작들과는 다르게 평화로웠던 시간동안 착실하게 힘을 비축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속절없이 다른 지저의 세력에게 밀리고 있으니, 이제는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상대가 우리보다 강해. 단지 그뿐, 다른 이유는 없다.”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평스러운 대답에 그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대책 없군.”
“그럴 리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금 그대를 찾지 않았는가.”
“쓸데없는 말장난은 좋아하지 않아. 찾아온 이유가 있다면 용건만 간단히.”
무려 11층의 백작씩이나 되는 존재에게 하는 말투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신경질적이었지만 지난 만남과 마찬가지로 디나리온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11층에 대한 파병이라면 사양하겠어. 상황을 보아하니, 9층도 전쟁이 멀지 않았어. 그대들과는 달리 난 고작 자작 나부랭이에 불과할 뿐이야. 내 것을 지킬 힘도 부족해.”
“그대의 군대를 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당연히 지원군의 파병을 요청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김진우는 의문스러운 마음에 되묻고 말았다.
“군대가 아닌 그대라는 개인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