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28)
던전 견문록-128화(128/319)
# 128
던전 견문록
제 129 화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 했더니, 이제는 아예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디나리온이었다. 김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더 설명을 해보라 턱짓을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대의 이름, 전승의 사령관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하다.”
디나리온의 말에 그는 순간적으로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증폭효과가 필요한 건가?”
“정확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전승의 사령관이 갖는 증폭효과가 필요해.”
그제서야 모든 사실이 이해가 갔다. 전승의 사령관이라는 타이틀이 가진 힘은 아군의 힘을 끝도 없이 증폭시키는 무지막지한 것, 아무래도 디나리온은 불리한 전세를 그런 식으로 뒤집을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전승의 사령관이 갖는 증폭효과는 내 부하들에게만 해당되지. 그대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야.”
전승의 사령관이라는 타이틀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요새에 속한 존재들뿐, 그 효과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백작들에게는 무용했다.
“그걸 모를까. 우리 역시 한 때는 전승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김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 전승의 사령관이란 사실 특별한 타이틀도 아니다. 패배를 알기 전까지는 누구나 승자였고, 우리 백작들 역시 그런 승자들 중 하나였지. 다만 전쟁이 너무 길었고, 그 과정에서 몇 번의 패배가 있었을 뿐이다.”
“아…….”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간 무의식중에 전승의 사령관이라는 타이틀이 자신에게만 주어졌을 거라고 착각을 하고 말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승의 사령관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은 알량한 승리 몇 번 뒤, 그다지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자신 말고도 전승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가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이제야 눈치 챘다는 사실이 오히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당장 용병단의 단장인 크라스토만 해도 ‘불패’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의 안일함에 그는 치를 떨었다.
그런 그의 표정변화가 재미있는지 디나리온은 조용히 그를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닫혀있던 디나리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법은 우리가 마련하겠다. 그대는 가부만 결정하라.”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어쩔 생각이지?”
“거부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남 이야기를 하듯 태연한 음성에 김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전황이 어렵다는 말과는 달리 어쩐지 디나리온의 태도가 묘하게 여유가 있었던 탓이다. 그 점을 지적하자 디나리온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강함만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 디나리온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면, 그대가 지금 여기 있겠는가.”
단 한마디, 그 한마디로 김진우는 디나리온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늘 약자의 입장에서 싸워 불리한 전쟁을 승리하고 마침내 전승이라는 이름과 정복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심층의 백작들 역시, 늘 강자의 입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
디나리온의 말에 그가 물었다.
“이런 전쟁이 처음이 아닌 모양이군.”
그의 질문에 디나리온이 씨익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고대의 열 군주, 지저의 옛 주인들을 몰아낸 것이 우리였으니까.”
***
꿈에서 깨어난 김진우는 꿈속을 걷는 듯 몽롱한 기분에 세차게 고개를 털어냈다. 파편이나마 남아있던 악몽의 여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지독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현실감이 대신했다.
“사령관이라…”
디나리온은 황당하게도 그에게 별동대를 맡길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별동대는 각 백작들의 진영에서 차출해낸 정예들로 이루어질 거라 말했다.
‘나를 믿을 수 있겠나?’
비꼬듯 내뱉은 질문에 디나리온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우스운 말을 하는군. 지저에서 남을 믿는 멍청이가 있을까.’
그렇게 말을 한 디나리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동대의 지휘관을 맡는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별동대에 포함된 병력들은 영원히 그에게 귀속이 된다. 거기에 더해 11층에서 활동을 하기 위해서 급조한 미궁이나마 거점이 마련된다. 물론 거점 역시 전쟁이 승리로 끝이 날 경우 온전하게 그의 영지가 될 거라 말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던 김진우는 마침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견제, 백작들간의 알력이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하게 만든 것이다. 전황이 불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자신의 전력을 내보이지 않는 백작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전쟁이 끝난 이후를 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알력과 헛점이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된 것이다.
최소한 그들이 보기에 김진우는 정복자니, 전승의 사령관이니 알량한 타이틀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백작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언제든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를 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파르테논이 일으킨 10층의 군세가 처참하게 패배하여 쫓겨 갔고, 파르테논 군의 정예들마저도 패퇴한 전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그렇게 하찮게 보았다.
“재미있군.”
잇새를 비집고 서늘한 냉소가 흘러나왔다.
백작들이 그를 과소평가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이 아직도 백작들의 숨겨진 저력을 보지 못해 그들의 힘을 폄하한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가 팽을 당하듯,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결심을 한 김진우가 침상에서 일어나 오너 룸을 향했다. 그리고는 미궁의 수뇌들을 모았다.
“전쟁이다.”
그의 한마디에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
수뇌들을 모아놓고 전쟁을 선포한 김진우였지만, 디나리온과 백작들의 의도대로 지금 당장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언제 9층까지 전쟁이 확산될지 모를 상황에서 쉽사리 미궁을 비울 정도로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게다가 디나리온의 제안 이면에 숨겨진 또다른 꿍꿍이를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표면적으로야 숨겨진 힘을 드러내고 소모하기에는 전쟁 후에 벌어질 판도의 변화에서 도태될 거란 위기감이 그 이유였겠지만,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나톨리우스라면 말해 줄지도 모르겠군.”
불리한 심층의 전황 속에서 가장 극심한 피해를 받은 것이 아나톨리우스였다. 철혈의 군주가 자랑하던 기사단은 기습에 실패하여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아끼던 부관들마저도 전사하였다 들었다.
숨겨진 전력이야 건재하겠지만 드러난 전력의 피해가 너무나 크니, 아나톨리우스는 균형을 맞출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심층으로 사자를 보내겠다. 아나톨리우스에게 내 말을 전하라.”
“하지만 안젤라조차도 실패했던 일이에요. 지금 누군가를 보내보았자, 무의미한 피해만 늘어나고 말거예요.”
무의미한 희생, 이 나가의 요새에 최소한 무의미하게 희생되어도 되는 존재는 없었다.
아니, 아예 없지는 않은가.
김진우가 무심코 릭샤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는지, 흔들림 없이 그의 시선을 받아주었다.
“그들에게 가치를 증명할 자리를 주소서.”
릭샤샤의 한마디에 그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언더 엘프들을 전령으로 삼는다!”
***
언더 엘프들을 어르고 달래 전령으로 내보내는 것은 릭샤샤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이십의 성인 언더 엘프들이 전령이 되어 심층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우스투스의 미궁을 통하여 11층의 철혈의 군주가 다스리는 철기사의 요새로 향할 것이다.
과연 그들 중에 얼마나 되는 이들이 희생되고 또 살아 돌아올지는 알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어쩌면 저들 중 어느 누구도 임무를 완수해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개의치 않았다.
수십의 생명을 사지로 보내는 스스로에게 이질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인간으로서 무언가가 결여되어가고 있음 역시 느꼈지만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누구도 믿지 마. 나 말고는 믿지 마. 아니, 나조차도 믿지 마. 너는 오직 너만 믿는 거야. 알겠어?’
악몽 속에서 들었던 소희의 가녀린 음성이 선명하게 귓가에 남았다. 그 음성을 떠올리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간 보여 온 착하고 선량한 던전 베이비 김진우는 진짜가 아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선량했다면 그는 지저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부디 살아남아야 해. 너만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꼭 살아남아야 해.’
‘크리쳐의 역겨운 살점을 뜯어 먹고, 악취가 나는 피를 들이마시더라도 너만은 꼭 살아남으렴.’
‘이 빌어먹을 지옥을 떠나 바깥세상을 알기 전에는 절대 죽어선 안 돼.’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어간 옛 토굴꾼들의 유언이 화인처럼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 말을 신념처럼 받들며 살아왔다.
당연하게도 그에게 있어 ‘생존’이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그리고 김진우는 그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치 않았다. 그 결과 그는 크리쳐들의 습격 속에서도,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은, 마침내 살아남아 심층에서 지상까지 오른 ‘괴물’이었다.
지상에 오른 뒤, 10년, 그 긴 시간동안 차곡차곡 각질처럼 쌓여 있던 ‘가짜 김진우’의 껍데기가 갈라지고 찢겨져 결국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저들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도미니크의 우려에 김진우는 차갑게 대꾸했다.
“저들이 실패하면 또 다른 전령을 보내면 그뿐.”
어쩐지 묘하게 차가워진 주인의 음성이 이상했는지, 도미니크가 쓰윽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전령을 보내야겠지요.”
그녀의 말에 김진우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떠나간 전령의 귀환을 기다리며, 미궁을 정비하던 김진우는 문득 주변의 공기가 변했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마침 9층의 전도를 펼쳐놓고 방어 계획을 점검중이던 도미니크가 그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뭔가 달라졌어.”
음습하고 끈적했던 지저의 공기가 한층 더 농밀해졌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대고 온몸의 혈관이 터질 것처럼 불끈거렸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그가 저도 모르게 미궁 밖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끼요오오오오오오!
그 순간 들려온 높고 기괴한 포효, 도미니크가 하얗게 질려 외쳤다.
“헤임달이에요!”
단 한 번도 울지 못한 비운의 새벽닭이 내지른 포효는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전쟁 파수꾼의 울부짖음에 온 지저가 진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