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31)
던전 견문록-131화(131/319)
# 131
던전 견문록
제 132 화
52. 옛 군주의 힘
11층 지저는 9층과는 달리 좁은 토굴 따위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 크고 작은 암석이 삐죽삐죽 솟아 나와 시야를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통로는 제법 넓었고 몇 걸음 걸을 때마다 넓은 공터가 연결되어 좁은 지저에 익숙한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11층은 오랜만이군.”
공작의 미궁을 벗어나기 위해 잠시 지나쳤던 11층, 오랜 세월이 흘러 그는 도망자가 아닌 당당한 지저의 귀족이 되어 11층에 돌아왔다.
왠지 모를 복잡한 심사에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허약해 보이잖아.”
그런 김진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백작들이 따로 추려 보내준 영웅급 소환수들이었다. 9층의 전력을 더 이상 약화시킬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홀로 11층에 나선 그가 앞으로 제 수족처럼 부려야 할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주어진 별동대라는 것이,
“백작 놈들 이때다 하고 못 쓰는 놈들을 죄다 넘겨버렸군.”
죄다 처치곤란의 고대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리건 이상으로 음험하고 삐딱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지독할 정도로 비협조적이었다. 그들이 백작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못 쓰는 놈? 쪼그만 놈이 말하는 게 제법 귀여운데?”
새하얀 털을 온몸에 두른 거인이 그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 불량스러운 태도를 보며 김진우는 자신의 생각을 정정해야만 했다.
모리건과 이들을 비교하는 건 전장의 까마귀에 대한 실례다. 음험하고 난폭하기는 하지만 모리건은 알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본 다른 고대의 영웅들은 질이 생각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껄렁거리며 이죽거리는 꼬락서니가 꼭 시장통의 불량배와 같았다.
인상을 찌푸린 김진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인 계열이 열다섯, 늑대와 사자, 각종 맹수의 형태를 한 이들이 넷, 인간과 비슷한 외모를 한 이들이 둘, 총 스물 하나의 소환수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들과 함께하는데 얼마나 스트레스받아야 할지 벌써부터 눈앞이 훤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9층의 충성스러운 수하들을 이곳에 불러들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저 바람에 불과했으니, 앞으로 11층에서 지내는 동안 미우나 고우나 이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 김진우의 기세가 돌변했다.
푸른 광망이 넘실대며 줄기줄기 흘러내렸고, 착,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그래, 어디 쪼그만 놈이 재롱 좀 부려볼까?”
되도 않을 시비를 걸어대던 설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마도 생각 이상으로 사납고 매서운 기세에 놀랐던 모양이다.
“마냥 쭉정이는 아닌…….”
감탄인지 비꼬는 것일지 모를 설인의 말, 김진우는 그가 말을 끝마치도록 두지 않았다.
[전승의 사령관 고유의 증폭 효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투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정복자의 타이틀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정복자의 진면목은 무언가를 정복할 때 드러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저들을 ‘정복’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강화된 육체가 또 한 번 비약적인 강화를 이룹니다. 신체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상승했습니다.]메시지 너머로 설인의 경악한 얼굴이 보였다.
김진우, 그의 특기는 기습을 통한 전력 전개, 상대의 약점과 방심을 이용하는 날카로운 것이다. 백작들이 감당하지 못해 내다 버린 강대한 까마귀조차 무릎 꿇린 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설인의 손발이 금세 어지러워졌다.
***
“그래, 오자마자 한바탕 하셨다고?”
“좀 고분고분한 놈들을 보내주셨어야지.”
늘 악몽을 통해서만 만났던 디나리온의 실체와 처음으로 마주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디나리온은 여전히 평범한 외모 속에 음험함과 불길함을 감추고 있었고, 본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그대의 방식인가? 그 사나운 까마귀를 어떻게 길들였나 했더니, 알 만하네.”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말 안 듣는 개한테는 매가 약이라는 생각은 아마 변하지 않을 것 같군.”
“그래서 효과는 있던가?”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
그의 시큰둥한 대답에 디나리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놈들이 제대로 임자를 만났어. 고생길이 훤하군.”
“잡담이나 나누려고 온 것은 아닐 텐데?”
김진우는 디나리온의 말을 잘라내고는 본론을 꺼내라 눈빛으로 독촉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투를 벌이고 있을 9층의 나가들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실적을 올리고 11층의 지원군을 9층으로 보내야 했다. 당연히 여유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대나 나나 시간이 많지는 않지.”
디나리온의 미궁 역시 적들의 맹공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만큼 대화는 굉장히 간결하게 이루어졌다.
“그대의 임무는 별동대를 이끌고 전장을 돌아다니며 전승의 사령관 고유의 증폭 효과를 골고루 전파하는 것이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고 말고는 그대의 자유다.”
애초에 백작들이 원하던 것은 그가 지닌 타이틀의 증폭 효과였으니, 예상했던 요구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별다른 이견 없이 그 임무를 받아들였다.
“다른 백작들이 몹시 바쁜 관계로 앞으로도 내가 그대와의 연락을 도맡게 되었다. 그대와 연이 있는 아나톨리우스라면 따로 그대를 찾을지도 모르겠군.”
“누가 전령 노릇을 하던 간에 몸값만 제대로 받으면 그만이지.”
위대한 악몽의 군주가 일개 전령 취급을 받은 순간이었지만 디나리온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기꺼운 웃음으로 그의 무운을 빌어주었다.
다른 백작들과 대면할 틈도 없이 그렇게 김진우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11층을 침공한 적들은 9층의 괴물들보다 한층 더 거대하고 사나웠다. 그리고 더욱 맹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지 더 강하고 거대할 뿐 9층에서 보았던 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은 그에게 별다른 감상을 주지 못했다.
“이게 백작들의 군대.”
김진우는 오히려 그들을 맞아 싸우는 백작들의 병력에 주목했다. 앞으로 언제 싸우게 될지 모를 전력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살펴본 백작의 병사들은 9층의 전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10층 귀족들이 자랑하던 군세마저도 이들 앞에 서면 차라리 초라한 편이었다.
아직 백작들의 진짜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정예들은 나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압도적이었다.
이런 전력을 갖고도 적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차라리 이해가 안 갈 지경이었다.
“다들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군.”
외부인인 자신에게 간파당할 정도라면 다른 백작들 역시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직까지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서로에 대한 견제를 늦출 수 없었던 탓이리라.
그렇게 정리한 김진우는 본격적으로 전장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온 전장에 전승의 증폭 효과를 전파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으니까.
그는 전투의 전면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이기는 전투에만 모습을 드러냈으며, 불리한 전장에는 일체 나서지 않았다.
그가 지닌 타이틀은 전승을 이어갈 때만 유지되는 것, 되도 않을 11층 백작들의 요구를 들어준답시고 본신의 힘을 깎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전투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계속된 전투 속에서 고대 영웅급 소환수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의 명령을 따르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억지로 시작된 복종이 이내 순종이 되었고 김진우가 11층에 도달한 지 한 달이 되어갈 무렵에는 소환수 중에 그의 명령을 거부하는 이들은 없었다.
위기는 계속되었다.
파르테논을 지원하기에 나섰던 김진우는 갑작스레 밀려드는 적들을 보며 이를 갈아 붙였다. 기척에 민감한 고대 영웅급 소환수들이 미리 감지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파르테논이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해 가급적이면 파르테논과 마주치려 하지 않았던 그이지만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는 소환수들을 급하게 뒤로 물리며 적들의 공격을 틀어냈다. 파르테논의 군세가 대기하고 있던 곳으로 은근슬쩍 적의 공격을 유도하는 것으로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르테논의 수작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은근슬쩍 그의 전승 타이틀에 흠집을 내기 위해 갖은 수작을 다 부렸다. 11층 전체가 전승의 타이틀에 기대 손실을 줄이고 있는 지금, 실로 옹졸하고 치졸한 행동이었다.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파르테논의 병력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빠져버린 탓에 김진우와 고대 영웅급 소환수들이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한 것이다.
피가 마르는 전투가 이어졌다. 적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칼날은 부러진 지 오래고, 소환수들은 손톱과 발톱이 깨어져 나가 필사적으로 근접 박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전승의 타이틀은커녕 제 목숨마저 지키지 못할 판국, 하지만 김진우는 오히려 웃어보였다.
이제 슬슬 9층으로 돌아갈 구실을 찾고 있던 참이다. 그 와중에 파르테논이 빌미를 주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동안 무수한 방해 공작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적에게 아예 아군을 내어준 경우는 없었다. 공론화 될 경우 파르테논은 뭇 공작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고 고립되고 말리라.
“하지만 그것도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경우의 이야기겠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전장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김진우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슬슬 소환수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대열을 갖추고, 교대로 적을 상대하라! 흩어져서 힘 빼봐야 적의 수는 줄지 않는다!”
그간 속을 무던히도 썩였지만, 이곳에 모인 소환수들은 모두 영웅급에 달하는 강자였다. 비록 백작들에게 제공받기는 했지만 보나마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던 그들이라면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소환수들을 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먼저 체력이 떨어진 놈들부터 안쪽으로 들어가!”
그의 말에 소환수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하여 똘똘 뭉쳐 싸우다 보니 방금 전보다는 여유가 생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앞뒤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여유가 생겨봐야 얼마나 생겼겠냐마는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했다.
호흡이 돌아오자 소환수들의 공격이 다시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대장도 쉬십시오!”
한때 껄렁대다가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해야 했던 설인, 호거가 김진우의 자리로 끼어들며 말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으니, 나 말고 다른 쪽의 놈들을 도와라!”
“척 보니, 한두 시간 싸워서 될 것도 아닌데 고집 피우지 마쇼!”
여전히 껄렁껄렁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진심으로 그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 급박한 전투 와중에도 괜스레 뿌듯해진 그가 마지못해 물러나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대 영웅급 소환수 하나가 그에게 접근했다. 다른 이들이 반항을 거듭하며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조차도 한 발 물러선 채 나서지 않았던 늑대 형상의 소환수는 기묘할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했다.
“뭐, 하는…….”
그런데 그렇게 다가온 소환수가 갑작스레 손목을 물어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배신을 떠올리고 늑대를 베어내려다 이내 아무런 통증이 없음을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손을 떨쳐 그대로 빼내려던 그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고대 지저를 다스리던 열 군주 중 하나인 광휘의 군주의 파편이 전이됩니다.]“이게 무슨 짓이지?”
갑작스러운 행동과 뜬금없는 메시지. 소환수는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예견된 것이니, 나 그대에게 모든 것을 전하리.”
“알아듣게 이야기하라.”
“백작들의 눈을 피하다 너무 시간을 지체했소. 파르테논이 제 욕심을 부린다고 병력을 빼버린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터, 아무 말 말고 나를 따라주시오.”
그 말과 함께 소환수의 몸이 찬란한 섬광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옛 지저를 다스리던 강대했던 열 군주의 권좌, 하이로드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파편의 힘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당 부분 소실된 상태입니다.] [파편을 통해 온전히 계승받은 것은 하이로드의 자격뿐입니다.]“너는…….”
“나는 광휘의 군주가 지저에 흩뿌린 사념 중 하나, 자격을 잃은 지저의 존재 중 유일하게 그대만이 지저에 속하지 않았으니 그분의 유지를 받들 자격이 있으리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함께 늑대 형상의 소환수는 완전히 빛에 휩싸이고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흩어진 빛무리를 쫓아 저도 모르게 멍하니 서 있던 김진우는 멀리서 들려오는 사나운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적들을 분쇄하라!”
고함 소리에 이어 요란한 발굽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아나톨리우스가 이끄는 정예 병력이 나타나 적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철혈의 기사들이 지나간 자리로 느긋하게 다가온 아나톨리우스가 그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꼴이 말이 아니군.”
“뭐, 어떤 빌어먹을 놈 때문에.”
섬광 탓에 잊고 있었던 파르테논의 수작질을 떠올린 김진우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아나톨리우스는 곧장 그를 데리고 디나리온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인가?”
디나리온의 질문에 대신 대답해준 것은 아나톨리우스였다.
“적들의 사체가 얼마나 많은지 철혈의 기사들이 돌격하기 힘들 지경이었지. 그런데 파르테논의 병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더군.”
“끄응, 단단히 돌았군.”
파르테논이 옹졸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비밀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제 원한을 풀려고 했다는 사실에 디나리온도 놀란 모양이다.
“어쨌건 간에 이것으로 백작들과의 계약은 끝마치도록 하지. 언제 꽂힐지 모를 칼을 등 뒤에 두고 전장에 나서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어.”
날카로운 김진우의 힐난에 디나리온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쨌건 간에 11층에 나가의 왕을 끌어들인 것은 디나리온 자신이었고, 그의 안전을 보장한 것도 디나리온 자신이었다. 나름대로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디나리온의 입장에서는 체면이 구겨지는 일이었다.
“먼저 약조한 것을 어긴 것은 그대들이니, 나는 이쯤에서 대가를 받고 임무를 마무리하겠다.”
“그대의 요청이 합당함은 내가 보증하겠다.”
아나톨리우스가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결국 두 명의 백작이 동의하고 보증하여 기존의 의뢰는 파기되었다.
그 과정에서 파르테논의 독단에 대한 대가로, 원래 약속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군자금과 병력을 약속받은 김진우는 마침내 9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