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32)
던전 견문록-132화(132/319)
# 132
던전 견문록
제 133 화
김진우가 11층을 다녀오고도 거의 반 년이 넘도록 적들의 공세가 이어졌다.
나가들은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적의 침입 경로를 찾아 그 통로를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적들은 여전히 9층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맹목적인 광기는 방어선이 완전히 굳어버린 이후에도 여전했고, 김진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가 쌓였다.
위급할 때에는 곧잘 통제를 따라주던 9층 미궁의 주인들이 다시 슬그머니 제 욕심을 채운답시고 비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겨우 형성해 두었던 전선이 밀리기를 몇 차례, 김진우는 이제 봉신들을 다루는 데 있어 더 이상 온화하지 않았다.
그는 필요하다면 미궁 하나를 통째로 미끼로 삼는 가혹한 결단조차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그제서야 겨우 봉신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순종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렇게 내부적인 문제로 힘을 빼는 사이에도 적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좁은 통로를 비집고 나타난 크리쳐들과 정체불명의 세력들은 기이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 등을 떠밀기라도 하듯이 발목을 잡아채는 시체 더미를 밟으며 진군해왔다.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망자들의 불길함도,
온몸을 꽁꽁 얼리는 나가들의 냉기도,
그림자를 돌아보게 만드는 언더 엘프 암살자들의 은밀함도,
그들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타 지저의 크리쳐들과 미궁의 주인들은 절대로 돌아보는 법이 없었으며, 마치 눈앞의 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앞만 보며 전진해댔다.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왜 그리 절실했는지를. 1년이나 지난 최근에 와서야 겨우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이 속한 지저에 기근이 찾아왔던 것이다.
크리쳐를 크리쳐답게 만들어주고 미궁을 존속하게 만드는 지저의 근간이 완전히 뒤흔들려 버렸다. 대체 어떤 이유에 의해서인지 그들이 속한 지저의 다운 잼은 씨가 말라버렸다.
그것이 지저를 밥 먹듯이 드나들며 다운 잼을 지상으로 옮겨 나르는 수많은 탐색자들 탓인지, 그도 아니면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대로 가다가는 상층뿐이 아니라 저층과 심층 역시 다운 잼의 씨가 말라버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타 지저의 세력들을 어렵게나마 막아냈다고는 하나, 한 번 아가리를 연 통로는 다시 그 흉물스러운 주둥이를 닫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난생 처음 보는 크리쳐들이 통로를 넘어 꾸역꾸역 기어 나오고 있었다.
“큰일이야. 이대로라면 9층 역시 온전하게 버티지 못할 텐데.
“영향은 지금도 받고 있어요.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9층에 존재하는 미궁의 수가 전쟁 전보다 오히려 늘었어요.”
거의 1년간이나 지속된 전쟁 속에서 김진우의 세력은 오히려 늘어나는 기현상을 겪었다.
지금에 와서는 100여 개 이상의 미궁이 그의 봉신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전쟁 중에 수많은 미궁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타 지저의 침공을 견디지 못한 7층과 8층의 미궁들이 대거 9층으로 이전한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좋은 현상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봉신이 늘어났다고 해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9층 미궁 탓에 9층의 생태계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미궁과 야생 크리쳐, 절묘하게 이어지던 균형이 완전히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암상인과 블랙 머천트가 그토록이나 우려하던 상황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전쟁 준비로 한창 야생 크리쳐들을 싸그리 잡아 죽이던 9층 역시 심각한 다운 잼의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기존의 세력들은 새롭게 자리를 잡은 미궁의 주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롭게 자리를 잡은 미궁들과 끊임없이 충돌했으며, 김진우와 요새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알게 모르게 반목을 이어갔다.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상황, 그 역시 방법을 찾아봤다. 하지만 11층은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아 난리통이었고, 12층은 아직 그와 요새가 도모할 수 없는 금역이었다.
“그것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다운 잼이 더 이상 나지 않는 지저라면 지상인들에게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는 것이지.”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자신들이 보유한 끔찍한 무기들을 지저에 쏟아붓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다운 잼을 비롯한 각종 기물들의 존재, 그들은 최소한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는 가르지 않을 인내심은 있는 족속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거위의 뱃속에 더 이상 황금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이 포악한 도축자들이 거위를 살려두려고 할까. 절대로 그럴 리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살점과 뼈마저 우려내기 위해 거위의 목을 비틀고 껍질을 벗겨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김진우는 도축자들과 한편이기 이전에 수많은 거위들의 우두머리이자, 다른 하나의 거위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그가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미궁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있어. 전쟁이 심화된 탓에 탐색자들은 아직 지저의 상황을 모르고 있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탐색자들이 크리쳐들이 미쳐 날뛰는 작금의 지저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난리가 어서 가라앉기만을 기다렸을 뿐, 그 이유를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한하지는 않을 거야. 지금처럼 상층의 크리쳐들이 자꾸만 지상에 올라와 난리를 피워대면, 이쪽도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지상의 지배자들은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진상을 알아내는 시늉을 해보일 거야.”
그리고 지금의 허술한 지저는 가감 없이 그 치부를 지상인들에게 드러내 보이리라. 씨가 말라버린 다운 잼과 하루가 지날수록 쇠약해지는 크리쳐들을 본 위정자들은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법을 찾아보고 있으니, 너무 초조해 하지 마세요, 주인님. 이제껏 주인님은 잘 해오셨잖아요. 그 어느 누구도 주인님과 요새가 이 정도로 성장할 줄은 몰랐을 거예요.”
작게 위로를 건네는 도미니크의 말에 김진우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보다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어? 안색이 좋지 않은데.”
그런데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미니크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지금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이곳은 9층 지저가 아닌 지상이었다.
밀고 밀리는 급박한 전쟁 속에서 김진우가 최후의 보루로 준비한 지상의 미궁이었다.
비록 탐색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미궁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곳 역시 그에게 속한 당당한 영지였다.
하지만 성장하지 않은 핵만으로는 지저의 존재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탓인지 도미니크는 부쩍 파리해진 안색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럴 거면 뭐하러 올라왔어.”
“주인님이 텅 빈 집에 돌아오는 게 싫었으니까요.”
당장 스스로가 괴로워하고 있으면서 잘도 지껄여대는 도미니크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미련해 보일지언정 정이 가지 않을 리 없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오직 그 하나만 보고 살아가는 그녀의 헌신이 절실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가만히 도미니크를 바라보던 김진우가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어서 돌아가. 내 집은 여기가 아니라 바로 저 아래니까.”
그의 대답에 파리한 안색으로나마 환하게 웃어 보인 도미니크가 지하실에 설치된 포탈을 통해 요새로 돌아갔다.
드르륵.
도미니크를 배웅한 김진우는 몸을 떨어대는 휴대폰의 액정을 확인해 보았다. 액정에 떠오른 ‘백 선생’이라는 이름을 본 그가 겨우 눕혔던 몸을 다시 일으키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지금 출발하려던 참입니다.”
제 할 말만 하고 뚝, 전화를 끊은 그가 곧장 집을 나섰다.
“그렇게 말하고 전화 끊는 법이 어디 있나.”
“여기 이렇게 오지 않았습니까.”
전화를 그렇게 끊은 것이 기분 나빴는지 백 선생은 그를 보자마자 노발대발해댔다. 하지만 그런 성화에도 그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대꾸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붙임성이 없어서 그렇지, 그래도 곧잘 하더니, 자네도 참 많이 변했어.”
혼자서 열을 내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백 선생이 이내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상황이 변했을 뿐.”
그의 대답에 백 선생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처음 이 감정소를 찾았을 때까지만 해도 김진우는 아쉬운 것이 많았다. 당장 다운 잼을 환전할 거래처도 없었으며, 지저와 탐색자들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백 선생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아쉬운 것은 백 선생이 되었다.
다운 잼의 씨가 마른 탓에 물량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졌고, 당연하게도 고객들의 수요를 맞춰주지 못해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간간히 다운 잼을 가지고 오는 것이 김진우 하나뿐이니, 백 선생의 입장에서는 고까워도 그의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제가 부탁드린 건 알아보셨습니까?”
말로는 부탁이라 하지만, 그 어투 어디에도 부탁하는 어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백 선생은 혀를 한 번 찼을 뿐 나무라지 않았다.
“자네 말이 맞았네. 다른 나라들은 진즉부터 크리쳐들이 지상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었던 모양이야. 아무래도 땅덩어리도 크고 정부에서도 기를 쓰고 막아대니 이야기가 널리 안 퍼졌을 뿐, 그쪽은 벌써 예전부터 난리였다더군. 탐색자 중 대다수가 지저를 탐색하는 것보다 게이트 방어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을 지경이라니, 말 다했지.”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다운 잼의 고갈은 다른 대륙의 지저들이 먼저였다. 타 지저의 크리쳐들이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며 통로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나온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나가의 요새가 존재하는 지저는 다운 잼이 부족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느새 옛이야기가 되었다. 통로를 넘어온 크리쳐들이 닥치는 대로 다운 잼을 섭취해버린 탓에 이쪽의 지저 역시 다운 잼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방법을 찾지 않으면 지저는 근간을 잃고 자멸하고 말 것이다.
우습다.
지저 공작과 지저 세력들의 멸망을 바라면서도 지저를 걱정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아이러니했다. 그래서 김진우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틀린 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네, 뭐가 마음에 안 드는가?”
“아,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 미소가 보기에 어찌나 섬뜩한지 백 선생이 창백해진 얼굴로 애써 납득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아마도 백 선생이 예전처럼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이렇듯 수시로 드러나는 그의 위험스러운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근데 이상한 소문이 있어.”
“무슨 소문 말입니까.”
이 바닥에 떠도는 소문 중에 믿을 만한 소문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되묻는 그의 말투도 심드렁하기만 했다.
“지상에도 미궁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네.”
하지만 백 선생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태연하게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파주의 안가에 숨겨둔 미궁의 핵이 떠올랐던 탓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 그래서 내가 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도 하도 허황되고 황당한 소문이라 말해줬을 뿐이네.”
“그렇습니까?”
가까스로 표정을 수습한 김진우가 애써 태연하게 말을 받아주었다.
“그래, 그냥 신경 쓰지 말게. 지상에 미궁이 있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자신도 민망한지 상기된 얼굴로 말을 얼버무린 백 선생이 이내 다운 잼을 공급해달라며 떼를 썼다.
어차피 정보료 삼아 하급의 다운 잼 몇 개 정도는 제공할 생각이었던 김진우는 온갖 생색을 다 내며 다운 잼을 꺼내들었다.
예전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하급 다운 잼을 본 백 선생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어쨌건 또 정보가 들어오면 알려주겠네.”
다운 잼을 받아들고는 희희낙락하던 백 선생이 은근히 이제 그만 가보라며 압박했다. 더 남아 있어봐야 얻을 것도 없었던지라 그는 미련 없이 감정소를 나섰다.
“예, 저 백갑니다. 이번에 다운 잼이 새로 들어왔는데, 회장님께 특별히 먼저 연락을…….”
문 너머로 들려오는 백 선생의 음성을 보아하니 오랜만에 입수한 다운 잼을 갖고 영업이라도 하는 눈치였다.
“네, 네. 하급이긴 하지만, 그래도 잼 자체의 질은 나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잘 되는 모양인지, 한껏 밝아진 백 선생의 음성을 뒤로하고 김진우는 거처로 돌아갔다.
***
“역시 예상이 맞았어. 다른 쪽은 진즉부터 다운 잼이 고갈된 모양이야.”
백 선생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그간의 추리를 끼워 맞추었다. 도미니크 역시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해주었다.
“아마 심층의 백작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이 탓이겠지.”
한쪽은 생존을 걸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데 방어하는 쪽에서 어영부영 전쟁에 임하고 있했으니 큰 피해를 입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따금씩 있어왔던 전쟁을 떠올리고는 전쟁 이후에 변화할 판도를 더욱 신경쓰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이야 전쟁이 쉬이 끝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닫고 총력을 다해 적을 몰아내고 있었지만, 한 번 기울어진 전세는 쉽게 뒤바뀌지 않았다.
당장 통로를 넘어온 세력 중에는 간 크게도 이쪽으로 미궁을 옮긴 이들조차 있을 지경이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다운 잼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에요. 하지만 지상인들에게는 아니잖아요.”
그간 틈틈이 지상을 오고 간 탓에 나름대로 지상을 알게 된 도미니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체 지상인들은 다운 잼을 어디에 쓰길래 우리보다 소모가 큰 거죠?”
그간 탐색자들이 유출시킨 다운 잼의 수만 해도 온 지저의 미궁들이 몇 년은 풍족하게 지낼 정도의 양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끊임없이 다운 잼을 원하고 또 원하는 지상인들의 행동이 지저의 존재인 그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다운 잼이 없으면 살 수 없기라도 한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도미니크의 말에 김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지저와의 전쟁이 있기 전에도 지상은 존재해 왔고 그때도 사람들이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다운 잼이 없다고 갑작스레 지상이 멸망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인들은 지저 존재들 이상으로 다운 잼에 대한 탐욕과 갈망이 컸다.
다운 잼을 지닌 자는 장생하며 쉬이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병에 걸린 자는 다운 잼을 갈아 마시면 병이 치유된다. 다운 잼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 주인에게 그 힘을 나누어준다.
마치 시장통의 약장수나 지껄일 법한 소리였지만, 이게 세간에 알려진 다운 잼의 효능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다운 잼을 통해 병을 치료한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다운 잼을 악세사리처럼 지니고 다니는 많은 이들이 몸이 가벼워지고 피로를 쉽게 느끼지 않는 효험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김진우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토록이나 다운 잼에 목을 메는 이유가 이런 뜬구름 잡는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 다운 잼에 만병통치의 효험이 있었다면 투병생활하는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간 지상에 풀린 다운 잼의 양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치병 환자들에게 하나씩 돌아가고도 남을 정도로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병마에 신음하는 이들로 넘쳐났다.
당연했다. 진짜 다운 잼의 효과는 병을 완치시켜주는 만병통치의 이적이 아니라, 병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효과를 갖고 있었으니까.
다운 잼은 마약(痲藥)이었다.
다운 잼 자체가 워낙에 고가이기도 하고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던 탓에, 아직 세간에 그 쓰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다운 잼은 마약이었다. 그것도 인체에 아무런 해가 없는 새로운 종류의 마약이었다.
하지만 인체에 무해하다고 해서 중독성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운 잼을 베이스로 만든 마약은 그 어떤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했다.
그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눈앞에는 다운 잼의 중독성에 완전히 취해버린 이준영이 있었다.
***
오랜만에 만난 이준영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사지 어느 하나 멀쩡하지 않은 그녀는 피를 줄줄 흘리며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퀭하게 가라앉은 눈두덩이 안쪽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준영 씨?”
탁하게 풀려버린 눈동자는 그가 막 기생수의 감지 능력을 통해 찾아낸 다운 잼을 향해 있었다.
“진우 씨, 그거 다운 잼 맞죠? 그쵸?”
인사조차 생략한 그녀의 첫마디는 그렇게 다운 잼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보였다. 평소 보여 왔던 물질에 초탈한 그녀답지 않은 모습,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다운 잼을 품에 갈무리하고는 주춤거리며 물러서야만 했다.
“준영 씨가 여기 왜…….”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됐다. 이곳은 아무리 던전 베이비라고 하더라도 홀로 탐색할 수 없는 7층의 지저였으니까.
이준영은 대답 대신 그의 가슴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사라져 버렸다.
지상을 찾은 김진우는 정찬식을 만났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되었다 다운 잼을 인간이 복용할 경우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보게 되며, 이준영이 그런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준영이 저 자식은 진짜 지저에서 살아온 게 용할 정도로 성격이 올곧거든요. 동료를 두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자꾸만 복수하겠다며 무리한 짓을 하려고 하니, 잠깐이라도 시름을 잊으라는 뜻으로…….”
정찬식은 중독성이 이리도 강할 줄 몰랐다며 그렇게 변명을 주워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