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36)
던전 견문록-136화(136/319)
# 136
던전 견문록
제 137 화
김진우의 말에 윤희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걱정을 하려면 다른 쪽을 걱정해야 할 것 같지 않나?”
그렇게 말한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실패했을 경우 앞으로 미궁의 유지가 힘들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다운 잼이 절실한 건 나보다 그대라는 사실, 이 두가지만 걱정하도록.”
그의 말이 맞았다.
수많은 복속 미궁이 있는 김진우야 어떻게든 휘하의 미궁을 쥐어짜면 이 어려운 상황을 버텨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 반해 그녀와 파티 홀은 당장 다운 잼의 고갈을 타개할 방도를 찾지 못할 경우, 미궁 자체의 존립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다못해 미궁을 이주하려고 해도 최상급 다운 잼과 새롭게 자리 잡은 터에서 다시 기반을 쌓아 나갈 다운 잼이 필요하다.
“그대가 진짜로 걱정할 건, 어떻게 하면 그대의 몫을 조금이라도 더 챙길까, 어떻게 더 많은 다운 잼을 다시 지저로 가져올까 하는 것이겠지.”
단순하지만 핵심을 짚는 김진우의 말에 윤희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지상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원이라고 해봐야 외형상 지상인들과 차이가 없는 김진우와 윤희, 그리고 안젤라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조촐한 인원에 요란한 준비는 필요치 않았다.
“그럼 올라가도록 하지.”
포탈 앞에 선 김진우가 짧게 한 마디를 남기고는 그대로 포탈을 넘어섰다. 안젤라 역시 그간 꾸준히 지상과 지저를 오고 갔던지라 망설임 없이 포탈을 넘었다.
남은 것은 윤희 하나였다.
“뭐해, 넘어오지 않고.”
미지에 대한 두려움, 난생 처음으로 마주해야 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리가 없었다.
“7층에서 세력을 도모해 도움이 되겠다. 지금은 그 약속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그런데 뻔뻔하게 손 놓고 물러서서 내가 건네주는 다운 잼이나 받아 챙길 생각인가.”
포탈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김진우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 표정이 괜스레 분해 그녀가 이를 악물고는 지저와 지상을 가르는 경계, 포탈을 넘어섰다.
“아…….”
단 한 발자국을 내딛었을 뿐인데 완전히 변해버린 세상, 그녀가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고향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김진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말투가 꼭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제 고향은 지저에요. 지상은 그저 어머니의 고향일 뿐.”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아무리 지저 미궁의 주인들을 흉내 내봐도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블랙 머천트의 경매장에서 굴욕을 당할 때, 그녀의 목에 내걸려 있던 상품명은 ‘지저에 남은 최후의 지저 인간’이었으니까.
“그래. 지상에 처음 올라와본 감상은 어떻지?”
놀리는 듯한 표정을 거두고 김진우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크게 다를 것도 없네요, 여전히 어둡고 칙칙하고. 지상이라고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데요.”
그녀의 대답에 김진우가 낄낄대며 웃었다. 여전히 자신이 지저의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그녀의 치기 가득한 대답이 우스웠다.
마치 지상의 장점을 말하면 지저가 더 열등하다고 느끼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는 입을 비죽 내밀고는 험담을 해댔다.
“내일 아침에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
그는 일부러 그녀에게 진정한 지상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가 본 것이라고는 포탈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 그가 마련한 안가의 지하실에 불과했다.
실제로 지저에서 옮겨온 핵까지 설치된 이곳의 공기는 지저와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녀의 치기 어린 대답이 마냥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안가의 지하실에서 반나절을 보낸 윤희는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지하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하를 벗어난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밝은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때? 이래도 지상과 지저가 똑같아?”
짓궂은 얼굴을 해보인 김진우가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써 만들어낸 시큰둥한 얼굴로 그의 말을 무시했던 그녀는 멍한 얼굴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혼이라도 나간 듯한 얼굴로 손끝에 닿는 햇살을 더듬고 있었다.
“아…….”
그 역시 지상에 처음 올라왔을 때의 감동을 알고 있기에 말없이 그녀가 하는 대로 지켜보았다.
“이게 태양?”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창가를 향해 나아갔다. 아니, 나아가려 했다.
끌어안듯 자신을 당기는 김진우의 손길이 없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창가에 서 쏟아지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았을 것이다.
“왜?”
아쉬움에 손을 뻗어 햇볕의 따스함을 느끼며 그녀가 물었다.
“그대의 눈은 아직 지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
지저의 존재에게 밝은 빛은 쥐약이었다. 빛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지저를 헤매는 이들이니만큼 그들은 밝은 빛에 쾌적함을 느끼기보다는 고통을 느끼게 마련이다.
실제로도 탐색자들이 사용하는 개인용 방패, 바디 벙커에는 이러한 지저 존재들의 약점을 이용하기 위한 발광 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태양광의 강렬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미약한 섬광에도 지저의 존재들은 눈이 멀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저에서 나고 자라 지상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그녀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밝은 햇살을 마주했다가는 잠깐 앞이 안 보이는 정도로 일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말에 그녀가 아쉬움과 놀라움이 담긴 탄성을 내뱉었다.
“나한테는 그런 설명도 하지 않아놓고는.”
안젤라가 토라진 음성으로 말했지만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김진우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윤희를 지상으로 끌고 나온 건 이유가 있었다.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그녀였지만, 그는 전적으로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본질은 인간, 지저의 시스템이 무조건적으로 강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 스스로가 그러하듯이 허점만 있다면 오히려 지저의 율법과 시스템을 언제든 비틀어 이용해낼 수 있으니, 그는 그녀를 완전히 신용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가 나가의 요새와 멀리 떨어진 7층에 잔류할 것을 선언했을 때부터 시작된 의심이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그에게 완전히 복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듯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미궁에서만큼은 여왕처럼 군림하던 그녀가 지상에 올라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곧 적응되겠지만 그때까지 그는 그녀를 길들여볼 생각이었다.
“지저에 율법이 있듯이 지상에도 법이 있어. 그걸 전부 알기 전까지는 이 건물 밖으로 외출 금지, 작업은 그 다음부터다.”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거실 한 켠에 놓인 소파에 앉아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지. 일단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공격해서는 안 돼. 그리고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이 건물 밖으로 나서도 안 돼.”
그의 말에 윤희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다운 잼이 고갈되어 가고는 있다지만 내일 당장 미궁이 무너질 정도로 다운 잼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윤희가 생각보다 지상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어도 그리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바심을 내는 것은 윤희쪽이었다.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9층과는 달리 7층의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한시라도 빨리 미궁을 이주하기 위한 다운 잼을 마련해야 했던 탓이었다.
“일단 미궁을 너무 오래 비웠으니, 나머지는 돌아와서 하도록 하지.”
“한번에 끝내는 게 아니었나요?”
이제까지 정확한 계획을 말해준 적이 없었던지라 윤희가 놀라 물었다.
“다운 잼을 다시 되찾아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제 앞가림도 못하는 너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어.”
나름대로 스스로의 유능함을 자부하는 그녀였지만, 요 며칠간 지상에서 겪은 일들로 도통 정신이 없었던 터라 쉽사리 그의 말에 반박하지를 못했다.
“나머지는 돌아와서 한다.”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망설임없이 포탈을 열고는 그대로 경계를 넘었다. 소파에 누워 늘어지게 TV를 보고 있던 안젤라가 입을 비죽이다 그를 따라 포탈을 넘었다.
홀로 남은 윤희는 어쩐지 아쉬운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다 그를 따랐다.
“음…….”
포탈을 넘어온 그녀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상의 쾌적한 공기를 마시다 지저의 음습하고 눅눅한 공기를 마시니 상실감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미궁의 방비에나 신경 쓰고 있도록. 나름대로 정보를 모아 볼 테니.”
그의 축객령에 그녀가 입을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고는 자신의 미궁으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요?”
곁에 있던 안젤라가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는 몰라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안젤라는 윤희의 외유가 어지간히도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그녀를 슬쩍 쳐다본 김진우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신이 잃었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게 된 거지.”
그녀는 이유 모를 상실감을 열병처럼 앓을 것이다. 아무리 지저 귀족의 피가 섞였어도 그녀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 그녀는 지저의 음습함에 환멸을 느낄 것이다.
어쩌면 미궁 따위 아무래도 좋으니 지상에 잔류하기를 원하게 될지도 모르리라.
“그럼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는 상대만큼 다루기 쉬운 상대도 없지.”
김진우의 대답에 안젤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힐난하듯 말했다.
“악당 다 되셨네요. 처음 경매장에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살아남으려면 뭔들 못할까.”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악몽의 군주에게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디나리온이 그의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과거의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상을 동경하고 갈망했던 어리숙했던 과거의 자신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은 악몽 속에서 떠오른 기억 탓이었으니까.
“그보다 잘 감시해.”
“감시는 저보다 우서가 제격이죠. 그리고 이미 탐식의 덩어리들이 전 층으로 퍼져나간 지 오래랍니다.”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그가 왕좌에 앉아 다시 윤희를 지상으로 끌고 나갈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
윤희를 데리고 외유를 다녀온 지 하루, 이제 슬슬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정보 수집을 해 볼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 때쯤,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이군.”
요새의 외곽까지 나선 김진우의 앞에 머리 둘 달린 거인이 초조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나가들의 왕이여.”
불패의 용병, 크라스토가 침통한 어조로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