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37)
던전 견문록-137화(137/319)
# 137
던전 견문록
제 138 화
#54. 하이로드
한때는 등장만으로 요새 전체에 비상이 걸릴 정도의 위세를 자랑하던 크라스토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전날의 당당함은커녕 차라리 자괴감마저 느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크라스토를 크라스토답게 존재하게 하던 것은 불패의 타이틀, 하지만 지금의 그는 더 이상 불패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었다.
1년간 지속되었던 타 지저와의 전쟁에서 마침내 그의 불패 신화가 깨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불패의 용병이라는 타이틀이 사라진 그는 그간 누려왔던 수많은 증폭 효과를 잃어버렸다.
당연하게도 그이후로 전투에 나섰다가 패배하는 일이 잦아졌고, 근래에 들어서는 전투에 나서는 것조차 꺼릴 지경이 되었다.
과거, 심층 백작들의 군대와도 자웅을 겨루던 신화적인 용병의 말로치고는 참으로 비참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지저가 낙오자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진우는 크라스토를 동정하지 않았다.
“다운 잼, 다운 잼이 필요하오.”
눈을 질끈 감은 크라스토를 보며 그는 무심결에 혀를 차고 말았다.
불패라는 휘황찬란한 껍데기 아래 숨겨져 있던 크라스토의 알맹이는 생각 이상으로 초라했다.
거듭된 패배에 겁을 집어먹고는 웅크린 채 다시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는 패배 의식에 절어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다운 잼이라…….”
김진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몇 남지 않은 그대의 용병들이 건사할 정도는 제공할 수 있지.”
그의 말에 크라스토가 감았던 눈을 뜨며 반색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때 이른 감사 인사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당연히 대가는 치러야겠지?”
“대가라면?”
불과 1년 사이에 완전히 변해버린 입장, 크라스토는 그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절실한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전장에 다시 서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역력한 크라스토를 보며 김진우는 다시 한 번 불패의 용병이 재기가 불가능함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크라스토의 쓰임새를 궁리해야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다운 잼을 제공한 만큼 전장에서 혹사시킬 생각이었지만, 패배 의식에 절은 지휘관과 용병들이라면 그 어떤 승리도 기대할 수 없었다.
“아, 마침 적당한 것이 있군.”
한참만에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김진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가 너무나 티 없이 맑아 크라스토는 도리어 주눅 든 얼굴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대 역시 귀족이었다지?”
뜻모를 질문에 크라스토가 대답 대신 경계 어린 눈초리를 보내왔다.
“귀족의 인장이라면 비싸게 값을 치러줄 수 있지.”
설마 귀족의 인장까지 거래의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크라스토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미궁을 박차고 나와 지저를 떠돌며 용병으로 살아오던 크라스토라도 쉽사리 대답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크라스토는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비록 바로 확답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김진우는 개의치 않았다. 완전 폐물이 되어버린 지금의 크라스토라면 빠르든 늦든 간에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것이다.
그간 잊고 살았던 지저 귀족의 인장보다는 당장의 생존이 그에게는 더 중요할 테니까.
김진우는 설령 크라스토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는다 해도 직접 나서 수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생각이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 정도 능력이 있었다.
“악취미시네요.”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안젤라가 불쑥 나타나 말했다.
“뭐가?”
“저 거인이 저 모양 저 꼴이 된 건 전부 주인님 탓이잖아요.”
안젤라의 말에 김진우가 슬쩍 크라스토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 대꾸했다.
“선택은 본인이 한 거지. 분명 물러설 기회가 있었음에도 힘을 과신해 물러서지 않은 건 크라스토야.”
“하지만 그 선택조차도 진짜 자신의 선택이 아니잖아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안젤라는 크라스토의 추락을 전부 김진우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다.
“하긴 지금 중요한 건 크라스토가 왜 저렇게 되었냐가 아니죠. 다만 어디까지 그 이용 가치가 남아 있느냐일 뿐.”
안젤라가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주인님은 벌써, 그 가치를 찾은 것 같네요.”
그녀의 말에 김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
크라스토가 돌아간 이후 김진우는 곧장 지상을 향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크라스토가 찾아올 수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을 쓸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전 지저가 생지옥으로 변해버린 지금, 크라스토에게 나가의 왕이 아닌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증폭 효과를 잃고 패배 의식에 절어버린 의기소침한 용병 따위가 생존할 정도로 지금 지저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으니까.
“새삼 지저 귀족의 인장을 탐내시는 이유가 뭐죠?”
그를 따라 지상으로 올라온 안젤라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어차피 주인님은 지상인, 지저 귀족의 인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잖아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보니 남작이 되고 자작이 되었다. 굳이 스스로 애를 써 귀족의 자리를 얻으려고 한 적은 없었다.
곁에서 그를 지켜봐온 안젤라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새삼 귀족의 인장, 그것도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귀족의 인장을 탐내는 그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진우는 이번에도 안젤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냉담한 태도에 심통이 났는지 안젤라가 입을 비죽였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보를 얻을 생각이다.”
“제가 할 일은요?”
한참만에 입을 연 그를 향해 안젤라가 물었다.
“감시, 그리고 염탐.”
“뭐, 평소랑 다를 것도 없네요.”
흡혈귀의 특수 능력인 은신 능력 탓에 그간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해온 안젤라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명령에 따라 몇 번이나 누군가를 암살한 경험까지 있는 그녀에게 감시와 염탐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 탓이다.
평소랑 다른 것이 있다면 이곳이 지저가 아닌 지상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감시해야 할 대상이 지상인이라는 것 정도였다.
“누굴 감시하면 되는 거죠?”
“늙고 꾀 많은 여우.”
주름 가득한 백 선생의 노회한 얼굴을 떠올린 그가 짧게 대꾸했다.
***
“이게 다 뭔가!”
백 선생이 홀린 듯이 그가 쏟아낸 다운 잼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이 정도면 운이 좋았던 정도가 아니지! 자네, 어디 다운 잼 광산이라도 찾은 것인가!”
되도 않을 소리를 지껄여대는 백 선생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중급 둘, 상급 하나, 그리고 하급 다운 잼 여섯. 얼마나 쳐주실 겁니까?”
“가만있어 보게. 그렇게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쳐줄 테니.”
그동안 공급이 달렸던 다운 잼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나 마주하고 보니 완전히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백 선생은 어디선가 외눈 돋보기를 꺼내 다운 잼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부 질이 좋구만! 같은 등급이어도 저층 깊은 곳에서나 발견될 법한 놈들이야!”
마지막 하급 다운 잼 하나까지 살펴본 백 선생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껄껄대며 웃었다.
“그래서 얼마나 쳐줄 겁니까.”
미리 생각하고 있었는지 백 선생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운 잼의 폭등한 시세를 읊어주고는 다시 거기에 3할을 더 얹어 가격을 매겨주었다.
“나쁘지 않군요.”
“나쁘지 않기는! 이 정도면 어딜 가도 잘 받은 걸세. 다운 잼 공급이 끊기지 않았으면 말도 안 되는 금액이야! 괜한 흰소리 말게!”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한테 거짓말을 하겠나!”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니 은근슬쩍 테이블에 올려진 다운 잼을 챙겨드는 백 선생이었다.
“혹시라도 최상급은 구할 수 없겠나? 구해만 준다면 내 팔자 피게 해준다고 약속함세.”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전화기를 향해 시선이 가는 것이 백 선생은 김진우만 없다면 당장에라도 고객이라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김진우는 백 선생이 원하는 대로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멀리 안 나가겠네. 돈은 바로 입금할 테니 걱정 말고 가보시게.”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백 선생을 뒤로하고 김진우는 감정소를 나섰다.
[너무 많이 준 거 아니에요?]감정소를 나서기가 무섭게 머릿속을 파고드는 안젤라의 텔레파시, 김진우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차피 전부 회수할 텐데, 뭐가 걱정이야.”
전에 없이 다운 잼이 귀해진 지금, 그가 괜히 백 선생만 좋은 일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백 선생이 절대로 다운 잼의 행방을 말할 리 없다 생각해 나름대로 미끼를 던진 것이다.
[킥, 알았어요. 저는 그럼 지켜보다 구매자라는 사람이 나타나면 뒤를 밟으면 되는 거죠?]“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도 있으니, 행방을 알게 되면 바로 돌아와야 해.”
한동안 뚝 끊겼던 다운 잼의 공급이니만큼 백 선생은 가장 먼저 우량 고객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연락할 것이다. 지상에 유출된 다운 잼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주인님, 안녕!]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잠시 감정소를 돌아본 김진우는 다시 지저로 향했다.
지저로 돌아온 김진우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크라스토와 마주할 수 있었다.
“결정은 내렸나?”
크라스토는 대답하는 대신 침통한 얼굴로 두툼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는지 주춤주춤 내밀어지는 손바닥 위의 반지가 유독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호오, 이게 그대의 인장인가? 특이하군.”
자신이 지닌 인장과는 확연하게 모습이 다른 반지에 김진우가 감탄 아닌 감탄을 토해냈다.
“잘 생각했어. 어차피 지금 같은 상황에서야 귀족이 대순가. 심층이라고 해봐야 다른 층과 다를 바 없이 전쟁터에 불과한 것을.”
김진우는 말과는 달리 크라스토가 내민 귀족의 인장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값은 후하게 쳐주시오.”
이제는 자존심 따위는 완전히 버렸는지 크라스토는 대놓고 그의 호의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흔쾌히 크라스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오겠소.”
크라스토의 말에 김진우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대가를 치를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지만 크라스토가 다시 자신의 인장을 찾는 일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한때 잘 나가던 용병은 이제 퇴물이 되었고, 크고 작은 의뢰를 수행하며 쌓아온 원한은 아직도 깊기만 했다.
지금이야 불패 용병의 쇠락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지 않았다지만, 이제 곧 불패의 용병이 폐품이 다 되었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그리고 그때 즈음이면 크라스토는 살아남기 위해 다운 잼을 들고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도록 잠적하든지, 그도 아니면 재기를 꿈꾸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리라.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만약 기적적으로 불패 용병이 재기에 성공해 인장을 다시 찾기 위해 온다고 해도 그는 인장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귀족의 인장이 꼭 필요했으니까.
[진정한 군주, 하이로드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크라스토를 돌려보낸 김진우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씨익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