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39)
던전 견문록-139화(139/319)
# 139
던전 견문록
제 140 화
#55. 혼돈
“으하하하, 나를 따르라!”
우서는 호위를 위해 나선 나가 용기사들을 보며 호기롭게 외쳤다.
허구헌날 꿀렁거리는 탐식의 덩어리들을 끌고다니다, 위세 당당한 용기사들을 지휘하게 되니 있지도 않은 콧대가 끝도 없이 높아진 모양이다.
하기야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9층에서만큼은 나가 용기사들의 위세가 그 어느 미궁의 주인들보다 대단했으니 그가 기고만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우서는 최전방의 미궁 중 하나인 공허의 땅에 도착했을 때, 마치 정복자라도 되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만약 내가 망자들의 군대를 전부 끌어내지 않았다면, 왕께서도 그리 수월하게 그레이브 야드를 점령하지 못하셨을 테지!”
“과연! 대단하시군요!”
진즉부터 요새와 연결된 포탈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트린달은 우서의 무용담에 연신 감탄을 토해냈다.
“내가 바로 왕의 첫 번째 기사이니라!”
그런 트린달의 반응이 몹시 흡족했던 모양인지 우서는 신이 나서 더욱 입을 놀려댔다.
지난 전투 이후로 김진우와 나가들의 무력에 완전히 매료된 트린달은 정말로 우서가 김진우의 제일 가는 심복이라 믿고 열과 성을 다해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통로 너머의 상황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만약 릭샤샤가 나서지 않았다면 우서의 무용담은 오늘 하루가 다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하찮은 노예가!”
트린달은 이번 기회야말로 왕의 첫 번째 기사인 우서에게 환심을 살 기회라 생각했는지, 건방진 언더 엘프의 참견에 버럭 역정을 냈다.
그런데 하찮은 언더 엘프 여인은 그의 말에 겁을 먹기는커녕 시큰둥한 얼굴로 우서를 다시 한 번 재촉할 뿐이었다. 기가 막혀 트린달이 다시 한 마디를 하려는데, 우서가 기겁을 하고 나서 그를 말렸다.
“그, 그녀의 말이 옳다. 왕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첫 번째 기사가 할 일이 아니지.”
우서가 먼저 나서 그녀를 두둔하니 트린달의 꼴만 우스워졌다. 하지만 우서는 무안해 하는 트린달을 달래주는 대신에 공허의 미궁을 나설 준비를 서둘렀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내가 바로 왕의 지낭이니까!”
릭샤샤가 내뱉은 무성의한 말에 우서가 다시 우쭐거렸다.
트린달은 그런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 일인지 저 위대한 정복자의 첫 번째 기사는 하찮은 언더 엘프에게 거듭 자비를 베풀었다.
“저도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의문을 짧았다. 호법룡과 용기사들이 목을 축이는 정도로 휴식을 마친 원정대가 당장에라도 공허의 영지를 떠날 것만 같았던 탓이다. 트린달은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우서에게 간청했다.
왕의 곁에 서는 것을 희망했으나 역량이 되지 않아 짐이었던 지난 전투와는 달리 염탐 정도의 임무라면 자신도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트린달은 난색을 표하는 우서에게 체질에도 맞지 않는 입바른 소리를 해가면서까지 거듭 간청했다.
“뭐, 아무래도 그대 또한 당당한 왕의 기사이니, 짐은 되지 않겠지. 좋아, 그대의 합류를 허락한다.”
이번에는 릭샤샤도 굳이 나서서 우서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무신경한 얼굴을 보니 애초에 트린달에 대해 신경 자체를 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릭샤샤가 아무 말 없이 원정대를 챙기는 것을 본 우서는 트린달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아무리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해도, 처음부터 왕을 곁에서 보좌해왔던 그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자제해야겠어, 너무 들뜬 모양이야.”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저 너머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신중하자는 말이었네.”
그 혼잣말을 들었는지 냉큼 물어오는 트린달에게 대충 말을 얼버무린 우서가 조용히 원정대의 뒤를 따랐다.
“이게 바로 전쟁의 원흉이로군.”
그간 탐식의 덩어리들을 통해 몇 번이나 보아왔던 통로였지만,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또 느낌이 달랐다.
얼핏 보기에는 다른 층과 이어진 통로와 비슷하지만, 그 너머에 도사린 어둠이 한층 더 짙고 불길했다.
“가시죠.”
자신의 뒤를 따르는 용기사들의 위세에 밀려났던 불안감과 공포가 슬그머니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우서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신중한 얼굴로 통로 너머를 살펴보았다.
단순히 겁 많고 의심 많은 성격이 다시 도졌을 뿐, 하지만 트린달은 우서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또 다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감탄하는 얼굴을 해보였다.
“과연! 왕께는 앉아서도 천리 밖을 내다보는 신통력이 있다더니, 우서님이 바로 그 신통력의 근원이었군요!”
우서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점액질 덩어리들이 꾸물거리며 통로 너머의 어둠 속으로 빨려드는 것을 본 트린달이 탄성을 내뱉었다.
“뭐, 따지고 보면 그렇지.”
그 와중에도 자신에 대한 칭찬은 빼지 않고 받아먹는 우서였다. 하지만 우쭐거리는 표정도 잠시였을 뿐이다.
“어떻습니까?”
소리 없이 다가온 릭샤샤의 질문에 우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이상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한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통로 너머로 향한 점액질 덩어리들과 교감이 잘 안되었던 모양이다.
“심층에 보낸 놈들도 이렇지는 않았어.”
“역시 직접 넘어가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심각한 얼굴을 한 우서를 힐끗 바라본 릭샤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애초에 이런 일을 우려했으니 정찰과 염탐에 능한 언더 엘프들을 원정대에 끼워 보낸 것이리라.
“이거 감이 좋지 않은데.”
겁 많고 의심도 많은 우서였지만, 타고난 생존 본능에 의거한 육감만큼은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이 없는 김진우도 원정대가 떠나기 전에 따로 릭샤샤를 불러 우서의 감에 대한 언질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릭샤샤는 우서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너하고 너.”
그녀의 호명에 대기하고 있던 언더 엘프 둘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확인해 보고 와.”
온 지저를 혼란에 몰아넣은 원흉, 그 어둠 너머를 훑어보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명당한 언더 엘프 순찰자들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저, 저!”
우서가 깜짝 놀라 언더 엘프들을 집어삼킨 어둠을 바라보다 혀를 찼다.
“똑똑한 아이들이니, 만약 이상이 있다면 준비할 시간 정도는 벌어줄 것입니다.”
동족을 사지에 밀어넣은 것 치고는 지나치게 평안한 릭샤샤의 음성, 하기야 지난 1년간 언더 엘프들이 김진우에게 그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난리통이 된 심층의 정찰을 도맡아 한 것은 물론, 험난한 전황을 알리기 위해 그야말로 피의 길을 지나온 언더 엘프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일족의 수만 해도 거의 200에 달했으니, 살아남은 언더 엘프들은 모두 일당백의 용사가 되었다.
릭샤샤가 사지로 떠난 동족들이 임무를 완수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음…….”
수십, 수백 번의 첩보 작전을 무사히 완수해낸 언더 엘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저쪽에 뭐가 있든 간에 하나는 돌아와 상황을 알렸어야 하는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둘 다 당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끄응.”
릭샤샤의 말에 우서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지난 1년간 언더 엘프들이 얼마나 악착같이 임무를 완수해내는지를 지켜봐 왔던 만큼 지금의 상황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정도는 그도 알 수 있었다.
“나약한 언더 엘프 따위를 믿느니,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트린달이 한발 나서며 말했다.
“괜, 괜찮겠지?”
슬쩍 릭샤샤에게 결정권을 떠넘기는 우서의 태도에 트린달은 또다시 의문이 들었으나 꾹 참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의견을 어필했다.
“쓸데없는 희생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만, 본인이 원한다면야.”
릭샤샤의 허락이 떨어지자 우서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트린달이 자신을 따라온 공허의 기사 몇을 불러내 통로 너머로 내몰았다. 속이 텅 빈 공허의 기사들은 마치 유령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어둠 속에 삼켜졌다.
하지만 그렇게 트린달이 자신했던 공허의 기사들 역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틀린 것 같지?”
“역시 직접 부딪쳐보는 것밖에는 답이 없을 것 같군요.”
릭샤샤의 말에 트린달이 발끈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통로로 넘어간 수하들과의 교감이 완전히 끊어져 초조하던 차였다.
차라리 직접 넘어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가볼까.”
우서의 말에 원정대가 천천히 통로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크르릉.”
“쉬이잇! 쉿!”
비늘을 바짝 곤두세운 호법룡들이 벌써부터 낮게 울음을 토하고 불꽃을 흘려댔다.
수많은 적들을 앞에 두고도 단 한 번도 물러선 적 없었던 용맹무비한 호법룡들이 자꾸만 주춤거리며 통로 주변을 맴돌았다.
나가 용기사들이 연신 바람 소리를 내며 호법룡을 다그쳤다.
언더 엘프들은 바짝 굳은 얼굴로 용기사들의 뒤에서 언제든지 허리에 찬 곡도를 뽑아 들 수 있게 칼자루를 꼭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이상해.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지.”
“이상하니까 왕께서 우리에게 이런 임무를 주셨겠죠.”
대열의 중앙에 있던 우서가 자꾸만 걸음을 늦추다 이제는 최후열이 되었다. 릭샤샤는 은연중에 곡도로 우서의 등을 밀며 앞으로 갈 것을 종용했다.
“그게 아니라, 내 사랑스러운 덩어리들과 교감이 이어지질 않는 것도 이상하고 독하디 독한 그대의 수하들이 돌아오지 않은 것도 이상해. 그리고 공허의 기사란 놈들도 내 보기엔 보통은 넘었단 말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릭샤샤가 칼자루로 우서의 등을 쿡 찔렀다. 그 서슬에 다소 앞으로 밀려난 우서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멈춰.”
난데없는 명령에 용기사들이 가뿐 숨을 몰아쉬는 호법룡을 간신히 멈춰 세웠다. 그 순간 통로 너머에서 무언가가 괴성과 함께 튀어 나왔다.
“카아아앗!”
그 끔찍한 비명에 최선두에 서 있던 용기사들이 무심코 창을 내질렀다. 네댓 개의 창날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통로에서 튀어나온 무언가를 그대로 관통했다.
“켁!”
피는 튀지 않았다. 대신 짧은 단말마와 철컥거리는 쇳소리만 났을 뿐이다.
“이런!”
용기사들의 창끝에 걸린 물체의 정체를 알아챈 우서가 낭패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물러서!”
용기사들은 신속했다. 창에 관통당한 물체가 트린달의 수하, 공허의 기사들임을 알아본 순간 이미 창을 회수하고 있었다.
넝마가 되었던 공허의 기사들이 다시금 갈기갈기 찢겨지며 허공에 쇳조각이 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통로의 어둠을 뚫고 무언가가 달려들어 용기사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