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40)
던전 견문록-140화(140/319)
# 140
던전 견문록
제 141 화
호법룡의 입에서 화염이 쏟아지고, 용기사들의 창날이 번뜩였다. 습격자들은 대번에 용기사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지고 말았다.
“이놈들은…….”
한 점 육편이 되어 흩어진 습격자들의 시신을 살펴보던 우서가 마구 꿀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놈들입니다.”
트린달이 이를 갈며 바닥에 눌어붙은 살점을 짓이겼다.
습격자의 정체는 지난 1년간 끔찍할 정도로 그들을 괴롭혀 왔던 인체가 반쯤 무너진 타 지저의 크리쳐들이었다.
“하필 재수 없게 통로 너머에 이놈들이 있었던 건가.”
“그런 모양입니다.”
우서의 말을 트린달이 받아주었다.
“만약 이 너머에 놈들이 많다면 지금 넘어가는 건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그렇겠지. 놈들의 수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며 원정대를 물려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던 우서는 저 멀리 릭샤샤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살피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몸을 숙이고 살펴보는 정도로는 모자랐는지 이내 아예 주저앉아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한참을 쭈구리고 앉아 있던 릭샤샤가 무언가를 들고 일어났다.
“감히!”
그녀가 들고 일어난 물건을 본 트린달이 분개하여 소리쳤다. 그녀의 손에는 용기사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공허의 기사의 머리통이 들려 있었다.
“그들을 욕보이지 말라!”
비록 갑작스러운 상황에 찢겨져버리긴 했지만, 공허의 기사들은 트린달이 아끼는 수하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 중 하나의 시체를 하찮은 언더 엘프가 모욕하고 있으니 참을 수가 없는지 순식간에 기세가 사나워졌다.
“잠깐.”
당장에라도 달려나가 릭샤샤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았던 트린달이 우서의 말에 이를 악물고 발을 멈췄다.
“기다려봐.”
그렇게 말한 우서는 릭샤샤가 대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비록 출신은 노예나 다름없는 언더 엘프라지만 왕의 총애를 받는 그녀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릭샤샤는 이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들을 향해 설명했다.
“오염되었습니다.”
“뭐?”
난데없는 말에 우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니, 그녀가 투구처럼 생긴 기사의 머리통을 들어보였다.
“보십시오.”
그렇게 들어올린 공허의 기사의 머리통이 심상치 않았다. 공허의 기사들은 속이 텅텅 빈, 움직이는 갑옷의 악령들이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머리통 역시 투구 속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릭샤샤가 내민 머리통은 무언가 달랐다.
“검은 색이던 갑옷이 검붉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것들을 보십시오. 마치 실핏줄처럼 올라온 이것들은 그놈들과 꼭 같습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머리통에는 보기 싫은 실핏줄과 힘줄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그 흉측한 생김새가 평소 보아 오던 적들의 그것과 같아 트린달과 우서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게 대체…….”
그러고 보니 통로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던 그들은 적의가 가득했다. 아마도 그래서 용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창을 내질렀을 것이다.
“뭔가가 있습니다.”
머리통을 툭, 하고 내던진 릭샤사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신이 아끼던 수하의 머리통이 바닥을 뒹구는 것을 보고도 트린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혼란스러워 머리가 통 돌아가지를 않았던 탓이다.
“그리고 그 뭔가는 우리가 넘어가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죠.”
언더 엘프들이 통로 너머로 넘어간 것이 두 시간, 공허의 기사들이 넘어간 것은 그보다 한참 뒤였으니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서와 트린달을 비롯한 원정대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 용맹한 용기사들마저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억눌린 시선을 보내왔을 뿐이다.
“가죠. 여기서 이래봐야 알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릭샤샤가 손짓하니 용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다시 통로를 향해 다가갔다. 이번에는 창을 굳게 움켜쥐고 언제든 창을 내지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 채였다.
언더 엘프들 역시 용기사들의 그림자에 숨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지.”
트린달은 하찮은 언더 엘프의 지시에 모두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온몸의 근육을 바짝 긴장시킨 채 무거운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만약 최악의 경우, 우서님만큼은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통로를 바로 코앞에 두고 릭샤샤가 말했다.
“이 앞에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위험이 있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우서님이니까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일까. 릭샤샤의 말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비장했다.
평소라면 자신만큼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우서도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무게에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럼, 가죠.”
통로 너머에 그 어떤 지옥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릭샤샤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만큼은 트린달도 그 기개에 감탄해 그녀가 마치 무리의 우두머리처럼 행동하는 것을 트집잡지 못했다.
“그럼…….”
우서가 꿀렁거리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고, 가장 앞에 서 있던 용기사가 마침내 통로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 직후 우서를 포함한 모든 일행이 통로를 넘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통로, 그리고 짙은 어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저의 풍경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생각과는 달리 평범하기만 한 풍경에 비장한 얼굴로 통로를 넘었던 원정대의 각오가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방심은 일렀다.
서서히 차오르는 불길한 기운이 그들을 짓누르기 시작했던 탓이다.
릭샤샤는 벌써부터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흔적을 찾았다.
어지럽게 흩어진 발자국은 아마도 공허의 기사들이 이동한 자국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반해 있는 듯 없는 듯 은밀하기까지 한 발자국은 언더 엘프들의 발자국이 틀림이 없었다.
“공허의 기사들은 이 앞에서 멈춰 섰다가 곧장 돌아온 것 같습니다. 아마도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한 것 같습니다.”
작은 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릭샤샤는 마치 상황을 눈앞에 두고 보았던 것처럼 그려냈다.
“일이 꼬였지만, 그나마 다행입니다. 순찰자들은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흔적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거 뭔가 으스스한데.”
지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둠과 침묵은 동반자나 다름없다. 그런데 우서는 주변을 둘러싼 침묵과 어둠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트린달도 용기사들도 모두 하나같이 창백하게 얼굴이 질려 있었다. 언더 엘프들 역시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단 이 부근만이라도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그간 우서의 지휘권을 인정해주는 것처럼 보였던 릭샤샤가 전면에 나섰다. 그녀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행을 이끌고 먼저 넘어온 언더 엘프들의 흔적을 쫓았다.
다행스럽게도 적들과의 조우는 없었다. 전투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흔적을 쫓아 통로 인근을 헤맸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위협은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왔다.
“음?”
한참 앞을 향해 나아가던 트린달은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펴 보았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둠 속에서 걸음을 옮기는 원정대, 바로 뒤라고 해봐야 자신의 수하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트린달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늘어져 있던 손이 천천히 움직여 거꾸로 비껴 맨 칼자루를 잡아갔다.
“캭!”
그의 손이 칼자루를 마침내 쥐었을 때, 마치 목이 졸린 듯한 신음성이 터져 나오더니 대열이 소란스러워졌다.
“역시 잘못 짚은 것이 아니었군요.”
몸을 돌린 트린달의 눈에 공허의 기사 목을 짓밟고 있는 릭샤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발아래 깔려 발버둥치는 공허의 기사는 온몸이 붉게 물든 채 검고 푸른 핏줄이 갑주 위로 잔뜩 돋아나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뭔가 있는 모양이에요.”
“컥!”
발버둥 치던 공허의 기사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푹, 내리찍은 검날에 머리통을 꿰뚫린 채 버르적거리다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트린달님의 수하들, 그대로 돌려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주변을 둘러본 트린달은 침음을 내뱉었다. 어느새 제압당한 수하와 똑같이 핏줄이 돋아난 공허의 기사들이 붉은 안광을 흘리며 칼자루를 잡아가는 것이 보였던 탓이다.
“아니, 어쩌면 벌써 늦었나?”
어둠 속에서 유독 선명히 드러나 보이는 하얀 치아, 그녀는 지금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완전히 호선을 그린 순간 곳곳에서 어둠이 움직였다.
“멈춰!”
트린달이 발작적으로 앞으로 나섰지만, 이미 상황은 끝이 나고 말았다.
공허의 기사들은 모두 목이 잘린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앞에 곡도를 갈무리하는 언더 엘프들이 있었다.
머리로는 이미 수하들이 무언가에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트린달은 무수히 많은 미궁들이 멸망하던 그 혼란의 시기에도 내내 자신의 미궁을 굳게 지켜오던 불굴의 전사였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수하들이 처참하게 도륙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트린달은 광분해 날뛰어댔다.
그런 그를 말린 것은 우서였다.
“그만. 안타깝지만 그대의 수하들은 이미 뭔가에 먹혀버렸다.”
우서는 공허의 기사들이 무언가에 먹혀버렸다고 표현했다. 트린달은 그 노골적인 표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분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트린달은 분노를 담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언더 엘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자신의 수하를 도륙낸 하찮은 언더 엘프를 징치하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탓이다.
“피해?”
하지만 그마저도 글러버리고 말았다. 그의 공격을 받은 언더 엘프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다시 언더 엘프가 나타난 곳은 릭샤샤라 자신을 소개한 언더 엘프 여인의 뒤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언더 엘프의 모습에 차라리 황당함을 느낀 트린달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시 한 번 검을 꽉 움켜쥐고는 앞으로 내달렸다. 아니, 내달리려 했다.
“그들은 하찮은 노예가 아니야. 왕께서 가장 신임하는 친위대다.”
우서의 말이 막 내달리려던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들어는 봤지? 9층을 넘보는 수많은 적들을 지워버린 암살자들의 존재. 저들이 바로 왕의 숨겨진 칼날이지.”
단순한 정탐꾼이라 생각했다. 하찮은 언더 엘프 따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우서의 말을 듣는 순간 트린달은 더 이상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순차적으로 일어난 전쟁, 그중에서도 제법 이르게 전쟁에 휘말린 9층의 혼란을 틈타 발호했던 심층의 귀족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탓이다.
“다시 소개하지. 릭샤샤, 친위대의 수장이며 왕께서 가장 신임하는 여인이다.”
우서가 쓰게 웃으며 릭샤샤를 소개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