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41)
던전 견문록-141화(141/319)
# 141
던전 견문록
제 142 화
릭샤샤는 트린달이 뭐라고 떠들어대던 간에 여전히 무표정했다. 이따금씩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는데 그때마다 바닥에 흩어진 사체들이 수난을 당했다.
그나마 공허의 기사들이 쇳조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서님.”
“알고 있어.”
여전히 마음을 수습하지 못한 트린달은 릭샤샤와 우서의 대화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릭샤샤와 우서는 저들끼리 대화를 주고 받았다.
“빠르게 기력이 고갈되고 있다.”
“이건 마치…….”
“지저가 우리의 힘을 빨아들이는 듯하군.”
우서의 말에 릭샤샤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공허의 기사들 다음은, 호법룡이군.”
상대적으로 아직은 멀쩡해 보이는 용기사들과는 달리 검은 핏줄이 울퉁불퉁 올라온 호법룡들의 모습에 우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베어라.”
망설임 없는 릭샤샤의 명령에 용기사들이 주춤거렸다. 충성스럽고 용맹한 용기사들이었지만 자신의 반쪽과도 같은 호법룡을 베어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완전히 오염되어버린 호법룡을 제 손으로 베어내야 했다.
***
“호법룡 다음은 나가들이었습니다.”
우서의 말에 김진우는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건 이들이 전부인가?”
애초에 쉬운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임무의 완수보다 무사 귀환을 명령했던 그였다.
그런데 저 통로 너머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일이 너무도 많았던 모양이다. 귀중한 용기사들이 30기나 희생되었고, 언더 엘프들 역시 반도 살아남지 못했다.
“미천한 종이 우둔하여 왕의 귀한 병사들을 헛되이 소모했나이다! 벌하여 주소서!”
진즉부터 무릎을 꿇고 있던 릭샤샤가 머리로 바닥을 찧어가며 용서를 구했다.
“정신 사납군. 그대의 임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보고지, 애꿎은 바닥을 망가트리는 게 아니었을 텐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탓일까. 평소라면 그녀의 안위를 먼저 살폈을 김진우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릭샤샤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오물거렸다.
“통로 너머 세상은 악의뿐이었습니다. 어둠 한 조각, 침묵 한 올마저 제 몸에 엉겨 붙어 게걸스럽게 힘을 빨아먹는 듯했습니다.”
그 사이로 눈치 좋게 우서가 끼어들었다. 짜증 서린 시선으로 릭샤샤를 바라보던 김진우도 다시금 고개를 돌려 그의 보고를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그대도 알 수 없겠군.”
심각한 얼굴을 한 그가 꺼끌꺼끌한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결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신합니다.”
하기야 그 충성스러운 나가 용기사들마저도 오염되어 동료에게 칼을 겨누었다 하니, 그 악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수수께끼 하나는 풀렸군.”
그간 보아왔던 적들의 맹목적인 광기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왜 그토록이나 악의가 가득했는지, 제 몸조차 돌보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죽이려 했는지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겨우 한 가지 의문을 풀어냈지만 더욱 큰 의문이 생기고 말았다.
“흐음.”
우서는 분명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력이 고갈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했다.
실제로 이틀 만에 귀환한 그는 점액의 7할 이상을 상실한 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간신히 귀환한 언더 엘프들은 피골이 상접하여 마치 발리셔스의 실패작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릭샤샤 역시 푸르스름한 얼굴이 시체와도 같았다.
“수고했다.”
김진우는 혀를 차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비록 더욱 큰 고민거리를 던져 주었지만, 정탐을 실패했다고 하기에는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9층에서도 귀하기만 한 다운 잼 다섯 개를 우서에게 하사해 주었다.
“어서 몸을 추스르도록.”
그의 말에 우서가 온몸으로 황송함을 표하며 자신의 미궁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던 릭샤샤가 그의 시선이 닿자 몸을 움찔 떨었다.
“돌아가려던 우서를 붙잡아 근방을 탐색한 건 그대의 뜻일 터, 비록 내 명령을 어긴 것이지만 성과가 있으니 벌과 공 모두 없던 것으로 하도록 하겠다.”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김진우는 야윈 릭샤샤의 얼굴이 안쓰러웠는지 귀하디귀한 소환석을 꺼내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물론 다른 언더 엘프들에게는 최하급의 다운 잼 하나씩이 수여되었을 뿐이다.
모두의 기력을 보충해 주기에는 9층의 상황이 좋지 않았던 탓이다.
***
릭샤샤가 풀죽은 얼굴로 사라진 후, 김진우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도미니크가 곁에서 이런저런 의견을 냈지만 정보가 부족해 그다지 성과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어쩐 일인지 안젤라는 여전히 지상으로 유출된 다운 잼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제는 백 선생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딱히 수상한 점이 없으니 김진우는 안젤라에게 조금 더 백 선생을 지켜볼 것을 명했을 뿐이었다.
그사이에 릭샤샤가 다시금 자신이 통로 너머를 염탐하고 오겠노라며 소란을 피웠다.
나가들이 아닌 언더 엘프들만이라면 비교적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다는 그녀의 고집에 결국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무리하지 말도록. 그대의 가치는 용기사들과 비교할 수 없으니까.”
소환석까지 섭취시키며 성장시킨 릭샤샤다. 수백의 언더 엘프들을 데리고 와 전력을 상승시켰으며 지금은 정탐과 암살, 여러 방면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거듭 위험한 임무에 투입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통로 너머에 숨겨진 비밀은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중요했다.
어쩌면 얻는 것도 없이 소모적이기만 한 이번 전쟁을 끝낼 실마리가 거기에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며칠 전에 그렇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놓고도 사소한 말에 감동해 환하게 웃는 릭샤샤의 얼굴이 부담스러워 김진우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릭샤샤는 다시 떠났다. 그녀가 차출한 이십의 언더 엘프들과 함께였다. 짐작이지만 아마도 그녀는 최소한 비밀에 근접하지 않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릭샤샤가 다시 돌아온 것은 생각보다 일렀다. 떠나간 지 불과 사흘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요새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처음 출발했던 인원의 반의 반도 채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성과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미천한 종이 저 너머에서 만난 존재 중 유일하게 이지를 상실하지 않은 존재이옵나이다.”
릭샤샤는 피부가 마치 나무껍질처럼 바싹 마른 사내 하나를 데리고 왔다. 사내는 놀랍게도 타 지저의 존재였다.
사내는 놈들이 으레 그렇듯 사납게 번뜩이는 붉은 눈빛도 없었고, 흉측하게 돋아난 검푸른 핏줄과 힘줄 대신 상처투성이 피부를 하고 있었다.
릭샤샤의 눈짓에 사내가 주춤주춤 다가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왕좌에 앉은 김진우의 위압적인 시선에 주눅이 든 얼굴을 한 사내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내의 음성을 들은 그는 전에 없이 바짝 굳은 얼굴로 릭샤샤를 돌아보았다.
“뭐라는 거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들은 드물지 않았다. 상대 역시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언어라는 게 김진우가 알지 못하는 종류의 언어였다.
대한민국 지저의 크리쳐들이 한국어를 말하듯, 사내는 당연하게도 외국어로 말했다. 그리고 김진우는 외국어에는 문외한이었다.
다행이도 릭샤샤는 상대와 대화가 가능했다. 지저의 존재라면 인간의 언어가 아닌 제 종족의 언어 정도는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사내의 종족은 언더 엘프와 그리 뿌리가 다르지 않았다.
***
“끄응.”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여 저 너머는 차라리 지옥이라 해도 좋을 상황이나이다.”
릭샤샤는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 같은 얼굴로 김진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지옥이라…….”
그는 가만히 지옥이란 단어를 되뇌었다.
그녀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사내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저 너머는 지옥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끔찍한 상황이었다.
“생각보다 심각하네요.”
곁에서 듣고 있던 도미니크가 기어이 신음 같은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이게 그냥 심각한 정도면, 지금의 전쟁은 차라리 애들 장난이게.”
그런 그녀의 곁에서 모리건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모리건뿐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사태의 심각성을 떠들어댔다.
그만큼 사내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차라리 악몽이라고 해도 좋겠어.”
김진우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래서 저쪽은 완전히 가망이 없는 건가?”
그의 말을 릭샤샤가 제 종족의 언어로 옮겨 말했다. 심각한 분위기에 질식할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가 한참만에 더듬거리며 대답을 했다.
“이미 온 지저의 반 이상이 모아이로 변질되었고, 남은 이들마저 언제 오염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지옥이라 하나이다.”
모아이란 변질되어버린 지저의 크리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기력을 빼앗기고 끝내는 지저에 떠도는 악의에 오염되어 이지마저 상실한 그들은 끊임없이 살아 있는 자들을 증오하고 그 살점을 탐한다 말했다. 그 해소할 수 없는 허기와 갈망 속에서 그들은 공멸의 길을 가고 있었다.
통로를 넘어온 수많은 적들이 바로 그 모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제일 큰 문제는 모아이가 아니었다.
“만약 다운 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쪽도 똑같이 되겠지.”
황당하게도 다운 잼이 고갈된 지저는 거꾸로 지저의 생명체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끔찍한 악의야말로 김진우가 걱정해야 할 진짜 문제였다.
고민에 빠져 있던 그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심층의 백작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운 잼의 고갈은 9층이 아닌 전 지저에서 벌어지는 문제였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번 전쟁에서 적들을 몰아낸다고 해도 결코 이긴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백작들은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고 해도 확인해볼 필요는 있겠지. 운이 좋다면 그들에게 해결책이 있을 수도 있고.”
언젠가는 밟고 올라서야 할 심층의 백작들이지만 아직은 더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블랙 머천트와 암상인이 종적을 감춘 지금에 와서는 그들과의 협력 관계가 더욱 더 절실했다.
“그들이 순순히 정보를 내놓으려 할까요?”
도미니크의 우려에 김진우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1년 전의 빚을 받겠다 말하라. 그럼 그들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