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43)
던전 견문록-143화(143/319)
# 143
던전 견문록
제 144 화
56. 군주의 길
전쟁의 서막을 알린 것은 릭샤샤가 이끄는 언더 엘프 암살자 부대였다.
“끄윽.”
가래가 끓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픽 하고 빠지는 소리 같기도 한 신음성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털썩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어둠 속에 숨어있던 10층 귀족들의 초병들이 목이 베인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전부 처리했습니다.”
“사체 수습하고 챙길 건 전부 챙긴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적의 시체를 발로 툭, 하고 걷어찬 릭샤샤가 무감정한 얼굴로 명령했다.
“다음 지역으로 이동.”
잠깐 사이에 체내의 다운 잼까지 갈취당한 초병들을 뒤로 하고 릭샤샤와 언더 엘프들은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와 비슷한 광경이 10층의 곳곳에서 펼쳐졌다. 통로를 넘어온 모아이들을 경계하느라 세워둔 초병들은 등 뒤에서 튀어나온 칼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귀족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멀고 귀가 닫히고 말았다.
9층의 군대는 그렇게 텅 비어버린 통로를 진격해 귀족들의 미궁을 향해 나아갔다. 중간에 모아이들과 조우한 운 나쁜 이들이 전멸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군대는 언더 엘프들의 조력에 힘입어 작은 전투 한 번 없이 귀족들의 미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진격이었다. 낙오병이 속출했고, 군대는 급속도로 지쳐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9층 미궁의 주인들은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이어 반 강제적인 병력의 차출까지, 김진우는 그들이 납득할 만 한 그 어떤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었을 뿐이다.
‘귀족들의 미궁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에게 그 심장이 돌아갈 것이다.’
그의 한마디를 들은 9층 미궁의 주인들은 완전히 눈이 돌아가 버렸다. 혹시라도 공을 빼앗길까 병사들이 지르는 비명마저 무시할 지경이었다.
열 개의 미궁에 대한 공격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모아이에게 거의 점령당하다시피 한 10층에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던 귀족들은 이 불시의 습격에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랐고, 그들의 정체가 모아이가 아닌 9층 미궁의 군대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였을 뿐, 그들은 이내 분노하여 병력을 모아 습격자들에게 맹공을 가했다.
타락하여 과거의 권위를 잃은 귀족들이라지만 과연 그 저력은 대단했다. 하기야 그런 저력이 있으니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끝끝내 버텨낸 것이리라.
귀족들의 병력은 비록 그간의 고된 전투에 시달려 지쳐 있었지만, 예기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전리품에 눈이 멀어 섣불리 달려들었던 9층 군대의 피해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건방진 놈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분노한 지저 남작, 거력의 바르톨로뮤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지저를 울려대고, 혼비백산한 9층의 군세가 물러났다.
“멍청한 놈들.”
“이건 뭐, 공을 세우라고 했더니 죽자고 달려드는 꼴이 제 목 베어달라는 거나 다름 없구만.”
미몽의 여왕 아리아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는 말에 일백 난쟁이들을 이끌고 나선 난쟁이들의 왕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그래도 덕분에 우리는 일이 조금 수월해질 테니, 고맙다고 봐야죠.”
요란스럽게 미궁을 뒤흔들어댄 9층 군대의 패퇴는 분노한 귀족의 정예 병력을 미궁의 외곽까지 이끌어냈다. 아리아네를 비롯한 미궁의 주인들은 그렇게 방비가 허술해진 허를 찔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느라 미궁에 남아 바깥의 동태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귀족의 병사들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졸음에 고개를 꾸벅거리다 이내 잠들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대와의 연합은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군. 생각보다 남아 있는 병력이 많아.”
“그렇게 떠들 시간 있으면 빨리 정리하시죠. 이들의 꿈은 길지 않답니다.”
“보채지 않아도 그럴 참이다.”
난쟁이들의 왕, 말락수스가 뭉툭한 손가락을 휘저었다. 뒤를 따라온 일백 난쟁이들이 그의 손짓에 사방으로 흩어져 잠이 든 미궁의 병력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모아이들의 맹공마저도 이겨낸 역전의 용사, 바르톨로뮤의 거인 병사들이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고개를 푹, 하고 꺾었다.
그간의 향락을 말해주듯 화려하게 꾸며진 미궁이 순식간에 짙은 죽음의 향기에 파묻혔다.
“이놈들 표피가 무식할 정도로 단단해. 만약 잠들지 않았다면 당하는 건 우리가 될 뻔했구먼.”
난쟁이들의 왕, 말락수스가 갓 베어낸 거인 병사의 팔뚝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저 말뿐이 아닌지 도끼를 쥔 손을 쥐락펴락하는 것이 잠든 적 하나를 베어내는 데도 꽤나 애를 먹은 모양이었다.
“어련하시겠어요. 이래봬도 심층의 군대랍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 같은 9층의 떨거지들한테 당할 분들이 아니시죠.”
비꼬는 것인지 감탄하는 것인지 모를 아리아네의 말에 말락수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말 한 번 이쁘게 하는군.”
목표를 위해 한 배를 탔다지만, 아리아네와 그는 어디까지나 경쟁자의 입장이다. 삐딱한 말투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말락수스가 그 주름진 얼굴을 더욱 험상궂게 만들거나 말거나 아리아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깥의 동태만을 살폈을 뿐이다.
“서둘러야 해요. 제 주술은 심층의 귀족들에게 통할 정도로 깊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슬슬 미궁의 주력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미몽의 여왕이 펼친 주술은 주인 없는 미궁의 병사들을 겨우 잠재울 수준, 일이 제 시간에 끝나지 않으면 안팎으로 적에게 둘러싸여 퇴각조차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녀의 말에 말락수스는 새삼 초조한 얼굴로 난쟁이들을 독려했다.
“게으름뱅이들아!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저녁은 지옥에서 먹게 될 거다!”
왕의 으름장에 난쟁이들이 짧은 다리를 더욱 부지런히 놀리며 온 미궁을 헤집었다. 몽마들은 그런 난쟁이들 사이를 오가며 흐트러진 주술력을 다시 복구하고 미몽의 술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래도 적의 주력이 빠져나간 사이에 미궁을 정리한다는 계획은 전부 틀려먹은 모양이다. 미궁의 중앙을 관통한 통로 저 너머에서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나가야 해요! 이대로 있다가는 앞뒤로 협공당하고 말아요!”
당장에라도 깨어질 것 같은 주술을 간신히 유지하며 아리아네가 외쳤다.
“이대로 나가봐야 공이라고 내세울 것도 없어! 최소한 창고라도 털어야 왕께서도 인정해 주실 거야!”
처음부터 이런 마음으로 계획에 동참한 것일까. 새삼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말락수스의 눈동자를 본 아리아네는 낭패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거인 병사 수십의 몫을 베었고, 주요 시설들 중 내구도가 약한 몇 개를 파괴했다.
당장 승기를 잡았다고까지는 못하겠지만 미궁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쟁이들은 미궁을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를 원망하지 말아요.”
결국 더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아리아네가 몽마들을 이끌고 미궁을 빠져나가려는데, 미궁 깊숙한 곳에서 난쟁이의 걸걸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창고를 찾았다!”
당장에라도 미궁을 뜨려던 아리아네의 발걸음이 그대로 멎었다.
“나가려면 혼자 나가시던가. 주술을 펼친 공은 인정하겠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말도록.”
킬킬거리며 웃어대는 말락수스의 말에 잠시 미궁의 안과 밖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시간을 벌어줄 테니, 빨리 끝내요.”
“말이 잘 통하는군!”
“대신 전리품은…….”
“공평하게 나누지.”
빠르게 합의를 마친 말락수스와 아리아네가 서로를 바라보다 헤어졌다.
“비켜!”
아리아네가 적의 발을 묶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을 본 말락수스는 곧장 창고가 있을 거라 짐작되는 곳으로 내달렸다. 짧은 다리를 뒤뚱거리며 순식간에 창고에 다다른 그가 고함을 치며 도끼를 높게 치켜들었다.
볼품없던 그의 도끼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용광로에 넣었다 빼기라도 한 것처럼 붉게 타올랐다.
“크아아앗!”
그리고 말락수스는 그대로 달아오른 도끼로 창고의 문을 내리찍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창고를 둘러싸고 도끼질을 하고 있던 난쟁이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쩌저적.
단단한 창고의 문에 순식간에 금이 갔다.
“뭐해! 내리찍어!”
하지만 그 강렬한 일격으로도 귀족의 곳간을 열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양손을 쥐었다 핀 말락수스가 수하들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쾅쾅.
불타는 도끼가 남기고 간 깊은 홈, 그 위로 수십 번의 도끼질이 가해졌다. 그렇게 도끼질을 견뎌내던 창고의 문도 마지막에 가해진 말락수스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열리고 말았다.
“쇳덩이들은 그대로 두고! 다운 잼만 챙겨!”
망치와 모루의 일족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말락수스와 난쟁이들은 번쩍이는 무구와 갑주는 무시한 채 다운 잼을 찾아 창고를 뒤졌다.
“고작 이게 다야?”
수하가 내민 다운 잼 몇 개를 받아든 말락수스가 허탈한 얼굴을 해보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창고를 열었더니 막상 챙길 거라고는 다운 잼 십여 개가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라면 수확이었지만, 이번에는 전리품을 나눌 이가 있었다.
제 손에 돌아올 다운 잼은 많아야 다섯 개, 고작 그 다섯 개를 얻자고 위험을 무릅썼으니 허탈할 만도 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설상가상으로 적의 발을 묶겠다고 나선 아리아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히 네놈들이!”
그에 이어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솟은 거력의 바르톨로뮤의 노성까지 들려왔다. 사색이 된 말락수스가 황급히 병력을 추슬러 창고를 빠져나가려는데 저 멀리서 몽마들이 허겁지겁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멍청이들아! 출구는 저쪽인데 이쪽으로 오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난쟁이들이 성난 고함을 쳤지만 몽마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난쟁이들을 지나쳐 뒤로 빠지고 말았다.
“이것들이…….”
성난 얼굴로 몽마들을 노려보던 말락수스는 이내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끔찍한 존재감에 고개를 돌렸다.
“망했군.”
그곳에는 아리아네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성큼거리며 다가오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인이 있었다.
“감히 네깟 것들이!”
청동 거인, 바르톨로뮤의 성난 고함 소리에 난쟁이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비록 남작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지저의 진정한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귀족 중의 하나였다.
순식간에 발동한 지저 귀족의 위엄에 난쟁이들과 몽마들이 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질을 쳤다.
말락수스 역시 강대한 위압감에 짓눌려 숨이 턱 막혀왔다. 겨우 버텨냈지만 도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도끼를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