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44)
던전 견문록-144화(144/319)
# 144
던전 견문록
제 145 화
“네놈이 우두머리군.”
하지만 오기를 부린 것이 오히려 악수가 되었다. 바르톨로뮤의 눈에 뜨인 것이다.
“아악!”
사나운 청동 거인은 아리아네를 우악스럽게 집어던지고는 쿵쾅거리며 난쟁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그의 뒤로 열기의 거인들이 따랐다.
수적으로는 이쪽이 우세, 하지만 미궁의 증폭 효과까지 받는 귀족의 군대다. 권위에 짓눌린 난쟁이와 몽마들이 대항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마, 막아!”
그래도 난쟁이들 중에 대가 강한 몇몇이 나서 바르톨로뮤의 앞길을 막았지만, 그들은 아주 잠깐의 시간도 벌지 못하고 그대로 곤죽이 되어야 했다.
“다, 다… 틀렸어.”
내동댕이쳐진 아리아네가 피를 울컥대며 신음과도 같은 한마디를 뱉어냈다.
“헤카림 역시 저들 손에…….”
그러고 보니 바르톨로뮤의 손에 들린 거대한 창이 낯익었다. 짐작이 맞다면 다른 미궁의 주인들 틈에 섞여 적의 주력을 유인하겠다며 호기롭게 나섰던 헤카림은 이미 저 끔찍할 정도로 우악스러운 청동 거인의 손에 당했으리라.
“죽을 때가 됐었나 보군. 같지도 않은 욕심을 부린 걸 보면.”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거인을 보며 말락수스가 한탄했다.
연합군에 섞여 9층을 침범한 10층 귀족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맛보았던 말락수스였다. 그날 고혼이 된 10층의 군대는 무려 수천이었으며, 그 수장들 역시 혼비백산하여 달아났었다. 유래 없는 승리, 그래서 그는 착각하고 말았다.
당시 승리의 주역은 자신과 난쟁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조연도 아닌 단역에 불과했으며, 그들이 누렸던 그 믿기지 않은 승리를 이끈 주인공은 전승의 사령관의 힘이었을 뿐,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은 그들의 앞마당인 9층도 아니다. 전과는 반대로 적들은 증폭 효과를 받고 자신들은 층을 벗어난 페널티를 받는다.
그냥 맞붙어도 힘겨운 적을 상대로 손발이 묶인 채 싸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자신들이 무슨 생각으로 10층과의 전쟁을 그리 쉽게 생각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전리품에 눈이 먼 것일지도.”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봐야 늦은 법, 위기를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미몽의 주술에서 풀려난 미궁의 생존자들이 퇴로를 막고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으허어어엉!”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흉성이 터진 것인지. 거인들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앞뒤로 적들에게 둘러싸인 절체절명의 위기, 말락수스는 죽음을 각오했다.
“고작 다운 잼 몇 개가 네 저승길 여비인가?”
바르톨로뮤가 말락수스의 손에 쥐어진 다운 잼 꾸러미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노골적인 경멸과 비웃음을 보면서도 말락수스는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전의를 다잡은 것도 잠시, 스스로의 한심함에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자신들의 왕이 전의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난쟁이들 역시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꿇어라. 나의 자비에 선처를 구해 보라.”
바르톨로뮤는 다 잡은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포식자와 같은 태도로 거만하게 말했다.
이미 귀족의 위엄에 반쯤 굴복한데다가 전의까지 잃은 난쟁이들의 왕은 그 말에 감히 거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런데 그렇게 굽혀지던 그의 몸이 어느 순간 움직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미세하게 떨리던 몸조차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멈춰.”
갑작스러운 상황, 하지만 바르톨로뮤는 난쟁이의 무릎을 꿇리는 가치 없는 행동 대신 난데없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강대한 살의를 찾아 눈을 번뜩였다.
“너는…….”
언제 다가온 것일까. 저 멀리서 초승달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곡도를 쥔 사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무릎을 꿇어야 할 존재는 저런 하찮은 쇳덩이가 아니라 그분뿐이다.”
피를 울컥대며 미소를 짓는 아리아네의 얼굴을 본 바르톨로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간악한 주술사가 자신의 이목을 흐렸음을 깨닫고는 그는 분노했다.
“보레아스! 네놈이 여긴 왜!”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갑작스레 전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이는 그와 똑같은 지저 남작이자 10층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로 불리는 삭풍의 보레아스였다.
“왜긴 왜야. 자비로운 왕께서 못난이 수하들이 걱정되어 보낸 것이지.”
보레아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정복자의 군대는 층간 페널티에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층을 벗어난 군대가 너무도 많아 정복자의 위엄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지정된 군대만이 층간 페널티에서 벗어납니다.] [10층 전체에 전승의 사령관의 이름이 울려 퍼집니다. 아군은 믿을 수 있는 지휘관의 참전에 사기가 올라 더욱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의 군대와 맞닥뜨린 군대는 몸이 굳고 사기가 저하됩니다. 쉽게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공포를 느낍니다.]지난 1년간의 혈투 끝에 정복자의 이름과 전승의 사령관의 효과는 더욱 성장하여 이제는 그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10층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 그의 명령을 받는 수많은 군대들이 층간 페널티에서 벗어나 전승의 사령관의 증폭 효과를 받았다.
“피해가 큰 듯합니다.”
“당연하지.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귀족이니까. 그들의 안방에서 과연 누가 피 흘리지 않고 승리를 얻을 수 있을까.”
도미니크의 보고에 김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층간 페널티에서 벗어나 증폭 효과를 받았다고 하나, 적들은 본 미궁의 방어 효과로 몇 배의 효험을 보고 있을 터였다.
그가 직접 전장에 나선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그의 몸은 하나였고 전장은 온 사방에 퍼져 있었다.
“그래도 언더 엘프 순찰자들이 제 몫을 해주어서 다행이야. 덕분에 모아이들이랑 쓸 데 없이 실랑이하는 일을 피하게 됐어.”
그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더 이상 릭샤샤를 하찮은 언더 엘프로 취급하지 않게 된 도미니크였지만, 그녀에 대한 칭찬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뾰루퉁한 얼굴을 해보인 그녀가 입을 비죽이다 화제를 돌렸다.
“너무 늦게 나선 것은 아닐까요?”
“아니, 지금이 딱 좋아. 너무 일찍 나섰다면 각자 공을 내세우느라 복잡해졌을 거야. 지금쯤이라면 자신들이 세운 공보다 도움받은 사실을 더욱 더 크게 느끼겠지.”
귀족들이 다스리는 미궁의 핵을 전리품으로 내세워 9층의 군대를 움직인 김진우였지만, 그 귀하디 귀한 미궁의 핵을 인심 좋게 나눠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물론 공짜로 부려먹어서야 아무리 지저의 시스템에 의해 충성을 맹세한 그들이라고 해도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적당한 선에서 공과 상을 조율할 생각이었다.
그간 양적 팽창을 거듭해온 9층의 상황상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가지.”
온 사방에서 생명이 명멸하고 죽음이 난무하는데 김진우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느긋했다.
하지만 이는 그저 보이는 것에 불과했을 뿐, 그의 눈은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분석하고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며 전장의 균형을 조절하고 있었다.
“모리건에게 전해라. 정리가 끝났으면 서쪽으로 향하라고.”
“헤임달은 북서쪽으로. 발자크와 퀀투스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릭샤샤와 언더 엘프들은 퇴각 중인 아군을 도와 적의 추격을 늦춰라. 직접적인 전투는 피하고 교란시키도록.”
역시나 직접적으로 귀족들과 맞붙을 전력이 부족했다. 헤임달과 모리건, 보레아스까지 합세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9층 미궁의 주인들 중 어느 누구도 귀족들을 꺾지 못하고 있었다.
발자크를 비롯한 요새의 수뇌부들도 나서서 거들고 있었지만, 소환석을 통해 성장을 거듭한 그들도 귀족과의 전투는 버거운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크게 불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10층에 투입된 9층의 미궁은 무려 100여 개에 달했다. 아무리 강대한 귀족들이라고 해도 모아이에게 시달려 쇠락해진 전력으로는 방어가 고작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에게는 타임 리미트가 걸려 있었다.
“서둘러라. 모아이들이 피 냄새를 맡았다.”
언더 엘프들이 기를 쓰고 유인해낸 모아이들이 피 냄새를 맡고 군집하여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망할 놈들. 10층을 아예 통째로 내주다시피 했군.”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모아이들의 비틀린 생기와 악의를 가늠하던 김진우가 욕설을 내뱉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모아이들이 10층에 진출해 있었던 탓이다.
“퇴각한 군대들을 모아 모아이들과의 전투를 대비하라.”
얻을 것도 없는 모아이와의 전투는 피하고 싶었지만 세상만사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김진우는 사방에서 빗발치는 전령의 보고를 받으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나도 미뤄두었던 일을 처리해야겠어.”
모아이들의 움직임이 급박해지자 김진우는 자신이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본대는 제가 맡겠습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모아이들의 움직임을 들었으면서도 도미니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역시 그녀와 본대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할게.”
“주, 주인님!”
호법룡의 등에 올라탄 김진우를 부르는 도미니크의 얼굴은 방금과는 달리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부디 조심하세요.”
“도미니크도.”
앉으나 서나 여전히 자신에 대한 염려뿐인 도미니크의 충정에 씨익 웃어 보인 그가 호법룡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가자!”
김진우와 오십의 용기사들이 일시에 본대를 박차고 나섰다.
모아이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요란스럽게 내달리는 그들이 향하는 곳은, 옛 군주의 파편이자 모든 외눈박이들의 왕인 우스투스와 그가 다스리는 미궁이 있는 곳이었다.
“일부러 힘 뺄 필요 없어! 앞을 막는 놈만 치우면서 이동해!”
김진우와 용기사들은 그야말로 쾌속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앞을 가로막는 모아이들이 있었지만 김진우는 단숨에 그들을 두동강 내며 내달렸다.
그렇게 달리기를 한참, 그는 마침내 목적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멈춰.”
미궁 밖을 가득 메운 외눈박이들을 본 김진우가 용기사들의 속도를 늦췄다.
“기다리고 있었소.”
외눈박이들의 중심에 선 우스투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맞이해 주었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
제법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던 김진우의 난데없는 방문, 그것도 사납게 기세를 올린 용기사들과 함께한 방문이었음에도 우스투스는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럼 내가 온 이유 역시 알고 있나?”
이번에도 우스투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댔을 뿐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침없던 김진우였지만 그 담담한 태도가 조금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어쩐 일인지 그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 우스투스가 나서 말했다.
“오백에 달했던 수하들은 이제 일백도 채 남지 않았소. 이대로라면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 비루한 끝을 맞이할 터, 차라리 내 스스로 끝을 선택하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오.”
그렇게 말한 우스투스가 똑바로 김진우를 올려다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그대는 부디 원했던 것을 취하시오.”